몽생미셸 가는 길 182화
[대문 사진] 쇠라, 빌레흐빌 바닷가 풍경
쇠라(Georges Seurat)는 참으로 불행한 화가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불행은 너무도 일찍 죽음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펠릭스 페네옹(Félix Fénéon)이 쇠라의 회고전에서 쇠라에게 너무도 일찍 찾아온 죽음이 회화사에서 불행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 회고하고 있을 정도다.
31세의 나이란 말 그대로 한참 젊은 혈기를 쏟아낼 시점이다. 37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흐처럼 비극적이진 않지만, 좀 더 활동할 시기에 요절한 화가의 작품에 자꾸 시선이 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걸려 있는 「서커스」 그림은 그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에 남아있는 화가의 내력을 설명해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왜 다른 화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주변을 맴도는 아웃사이더였을까? 유복한 집안 태생이었던 그가 일찍부터 미술 수업마저 작파했던 화가의 고집스러움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는 화려한 인상주의의 도발적인 무대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의 예술가적 태도가 어떤 것이었을지를 상상해 보곤 하는 것이다.
쇠라는 인상파 화가들의 이상이 붕괴될 것을 직감한 몇 안 되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인상파 회화가 야외에서 재빨리 작품을 완성하는 직접성을 넘어 자신의 예술만큼은 과학적 법칙에 기초한 구상 예술의 개념 자체에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 회화 방법을 선구적으로 개발한 예술가였다. 그가 항상 고민했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술과 과학, 더 정확하게는 회화, 생리학 및 지각의 심리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화폭에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그려가는 점묘법(Pointillisme)이었다. 점묘법은 1839년 이래로 화학자였던 미셸-으젠 슈브뢸(Michel-Eugène Chevreul)이 주장한 ‘동시 색상 대비의 법칙’이란 광학 및 보색 색각의 법칙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더불어 쇠라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그의 예술 이론을 뒷받침했던 폴 시냐크가 펴낸 『들라크루와에서 신인상주의까지(D’Eugène Delacroix au Néo-Impressionnisme)』가 쇠라의 점묘법 이론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는 점 또한 거론해야 할 것이다. 점묘법은 광학 페인팅 또는 크로모 루미나리즘(Chromo Luminarisme)이라고 불리는 소위 분할 기법(Divisionist technique)에 바탕을 두고 있다.
쇠라는 이를 토대로 점묘법이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색채술을 창안해 낸 화가였다. 크로노 루미나리즘은 19세기 후반의 회화 운동으로 순수한 색상의 작은 병치 패치의 적용을 옹호했다. 보는 사람의 눈과 뇌가 광학적으로 색상을 결합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색상의 분할 방식은 가능한 최대한의 순도와 광도를 달성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에는 화가들은 일일이 자신이 원하는 물감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색상 하나하나의 튜브 물감이 발명됨으로써 화가들은 물감을 만들어 쓰는 수고로움을 포기하고 아연으로 만든 외피 속에 담긴 튜브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하나하나의 색상을 화폭에 한 점 한 점 찍어 나가다 보면 점들이 만들어 내는 색상의 어울림을 통해 대상의 묘한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전에는 색상의 혼합이 화가의 팔레트에서 이루어졌지만, 색상의 분할주의에 따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캔버스에 직접 두 가지 순수한 색상을 병치했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작은 노란색 점 옆에 놓인 작은 파란색 점은 녹색의 인상을 주어야 한다. 구분이 눈에 띄지 않으면 노란색이나 파란색 또는 덜 녹색이나 빨간색으로 기울어진 회색으로 나타난다. 또한 구분이 감지 가능하다면 색상의 동시 대비의 법칙이 그 차이를 강화해 준다. 따라서 색상 분할주의가 낳는 효과는 화가의 설명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 매력은 주로 그림에 근접하거나 그림에서 멀어질 때 발생하는 인식의 차이에 있다.
쇠라는 이러한 색채술이 단순한 점찍기 기법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점묘법은 과학적 논리에 따른 새로운 색채술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에 찬 자신의 논리만 믿고 여타의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지 않았음은 물론 그들의 화풍을 비웃기까지 한 태도가 문제였다. 사후에 프랑스가 그의 작품 수집에조차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사실은 이러한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조르쥬 쇠라가 인상파 그룹전에 작품을 출품한 것은 화가와 거의 유일하게 함께 했던 폴 시냐크와 함께 1886년 인상파의 8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에 참여한 일이다. 쇠라는 이 마지막 인상파 전시회에서 「그랑드 자트 섬(Île de la Grande Jatte)에서의 일요일 오후」를 선보였다.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쇠라와 폴 시냐크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모네, 시슬리 및 까유보트는 쇠라와 함께 전시하기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이 전시회에서 인상파가 아닌 여러 화가들(쇠라, 시냐크, 오딜롱 르동 등)의 존재는 인상파 전시회의 종말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1890년 여름, 화가는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유명해진 덩케르크에 면한 그라블린느(Gravelines)에 살면서 바다 풍경을 담은 몇 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가 만들어낸 풍경은 자연을 그만의 색채 이론의 엄격한 ‘점묘’에 종속시키면서 현실의 혼란보다 탁월하게 우선하는 내면의 평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는 어둡거나 밝은 색조, 차갑거나 따뜻한 색조, 처짐과 슬픔 또는 상승과 쾌활함의 색선들이 이룬 화면들을 재구성하고자 애쓴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그림 「서커스」를 계획하고 제8회 독립작가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미완성인 채로 출품한다.
그는 1891년 3월 29일 전시회 기간 동안 3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아마도 전염성 협심증 또는 디프테리아의 영향으로 전해진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쇠라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쇠라의 죽음은 부친이 사망한 지 2주 후에 같은 병에 감염된 결과였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묻혀 있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영광스럽게 묻혔다.
생애 동안 조르쥬 쇠라는 펠릭스 훼네옹(Fénéon)을 제외한 동시대인과 비평가들로부터 무관심이나 경멸만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당시의 많은 화가들, 특히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의 몰이해에 직면했는데, 이는 그가 그들의 주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또한 그의 작품의 진지함과 그의 회화 예술에 대한 과학적 이론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는 그를 ‘공증인’이라고 부르며 그를 희화화하기까지 했다. 폴 고갱(Paul Gauguin)은 스스로 유일하게 진정한 예술 혁신가로 자신이 대중에게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당연히 점묘법을 창안한 쇠라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친구였던 폴 시냐크(Paul Signac)만이 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쇠라가 죽었을 때 비평가들은 그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그가 아무런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쳤고 감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쇠라는 더 많은 그림을 그리고 예술 정신을 꽃피웠을 것이지만, 그의 예술가로서의 임무는 그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다. 쇠라는 모든 것을 거쳐 흑백, 선의 조화, 구성, 대비, 색의 조화를 거의 결정적으로 확립한 인물이었다. 이것 말고 우리가 화가에게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