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90화
[대문 사진] 트루빌 포구의 뚜크 강
바다에 면한 두 도시 사이에 강이 흐른다. 뚜크(Touques) 강이다. 뚜크 강은 오쥬 지방(Pay d’Auge)의 야트막한 산에서 발원하여 리지외와 퐁토드메흐 그리고 퐁레베크를 거쳐 투르빌과 도빌 사이 경계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든다.
길이가 108킬로미터 남짓하니 그리 긴 강은 아니다. 하지만 천 년 전인 1066년 퐁토드메흐에서 건조된 60여 척의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대선단이 영국 정벌을 위해 이 강을 따라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는 이미 기욤이 이끄는 노르망디 공국의 각지에서 징발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단이 집결해 있었다. 그 바다를 영국인들은 영국 해협이라 부르고 프랑스 인들은 소맷자락 같다 하여 망슈 해협이라 부른다.
가리비 조개가 서식하기 위해 최적 조건을 갖춘 영국 해협엔 늘 영국 어선들과 프랑스 어선들이 조개 잡이 때문에 충돌하고 있다. 독일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때는 한 편이었지만, 생업과 관련해서만큼은 서로 양보가 없다.
그놈의 가리비 조개가 뭐라고. 문제는 어획량의 90%를 영국 어선들이 싹쓸이하고 나머지 10%만 프랑스 어부들 몫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어부들로서는 이 점이 불만이고 불쾌하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 간의 어업협정은 이러한 불공평한 어로 조건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래서 양국 간 어부들의 충돌이 심심치 않게 뉴스거리로 등장한다.
나는 이 때문에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하면서 가리비 조개를 볼 때마다 뉴스에서 격렬하게 다투고 있는 양국 간 어부들의 싸움 장면이 떠올라 그 맛있는 조개를 시식하는 것조차 꺼림칙하다. 가리비 조개는 야고보 성인을 가리키는 또 다른 프랑스 어 명칭이다. 이름하여 성인을 가리키는 이름을 딴 생 자크(Saint Jacques)는 가리비 조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가리비 조개 요리는 상당히 비싼 편이다. 싱싱한 가리비 조개를 우리 같으면 날 것으로 먹겠지만, 이들은 조개 위에 치즈를 얹어 구워 먹는다. 그 맛도 독특하고 새롭다.
뚜크 강이 가로지르는 두 도시는 트루빌과 도빌인데, 이웃한 두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가 <벨기에 인들의 다리(Le Pont des Belges)>다. 다리에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2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깊다. 원래는 <유니언 브리지(Le Pont de l'Union)>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1973년 보행자 다리가 보강되면서 새 이름이 붙었다.
원래 뚜크 강 이쪽저쪽을 이어주는 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이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은 꺄부르를 출발하여 도빌과 트루빌을 거쳐 옹플뢰르에 이르는 이른바 이들이 ‘꽃 피는 해안(Côte Fleurie)’이라 부르는 연안도시들을 해방하기 위한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언덕위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독일군의 포격과 사격 속에서 임시로 가교를 설치하고 진군해야만 했다. 참고로 도빌은 1944년 8월 22일에, 트루빌 쉬흐 메흐는 1944년 8월 24일에 해방되었다.
도빌 해방 기간 동안 독일군은 도시를 포격하고 다리를 파괴했다. 이때 벨기에 인 병사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도시를 해방시킨 연합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다리 이름을 <유니언 브리지(Pont de l'Union)>라 불렀다. 그러다가 1973년 보행자 다리가 보강되면서 트루빌 쉬르 메르와 도빌의 해방자인 피롱(Piron) 여단의 벨기에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벨기에 인들의 다리(Pont des Belges)>라 명명하였다.
이 두 병사의 이름은 다리 입구에 새겨져 있다. 또한 다리 중간에는 피롱 여단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기념 돌판이 부착되어 있다.
프랑스란 나라는 어딜 가도 건물이나 다리나 할 것 없이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알리는 돌판을 부착해 놓았다. 그 아름다운 도시 파리의 건물들마다 “여기서 레지스탕스 단원으로 활동했던 누가 독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식의 추모 돌판이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명판은 “이 집에서 시인이자 작가인 누가 살았다”며 문학인을 기리기 위한 석회석이나 대리석으로 제작하여 부착한 기념 돌판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이러한 돌판들을 볼 때마다 작은 역사를 들추곤 한다. 명판에 적힌 이름들은 레지스탕스 단원, 병사, 시인, 작가, 화가, 조각가, 작곡가, 사상가, 역사학자, 지리학자, 천문학자 등 심지어 정치인까지 그 수열은 끝이 없을 정도다.
이 많은 이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프랑스 인들의 정서는 이들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고, 돌판에 적혀 있는 이들이 잊혀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정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후손들이 절대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음에도 자랑스러운 조상이란 점을 부추기기 위해 부착한 돌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악의적인 편견보다는 이 돌판에 씌어진 이름들 가운데 상당수가 ‘역사의 주역들’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개 병사로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해방을 도와 주려다 숨진 병사를 추모하는 것이 별 대수이겠냐마는 프랑스 인들의 자국의 해방을 도와준 병사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지칠 줄 모르면서 부족함마저 없다.
2020년 9월 21일 월요일 밤 11시에 프랑스 3 티브이 채널에서는 이에 관한 주제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도빌(Deauville)과 트루빌(Trouville)을 연결하는 저 유명한 다리가 왜 <르 퐁 데 벨쥬(Le pont des Belges)>라 불리는지 알고 계십니까? 칼바도스의 그 많은 거리에 <브리갸드 피롱(Brigade Piron)>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라는 아주 단순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방송 제작자인 뱅상 푸솅(Vincent Pouchain)은 다음과 같이 다큐멘터리 제작 소감을 밝힌다.
“저는 빌레흐 쉬흐 메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후에 도빌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지요. 제가 다닌 도빌의 중, 고등학교는 피롱 여단 대로(Avenue de la Brigade Piron)에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까지 매일 저녁, 저는 트루빌에 사는 어머니와 함께 <벨기에 인들의 다리(Pont des Belges)>에 가곤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제 개인사에 있어서 ‘피롱 여단’이란 단어는 잊을 수 없는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방면에 관한 군사 전문가도 아니고 전쟁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사는 동네가 어떻게 해방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접하지 못하였기에 이를 늘 아쉬워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사는 동네를 해방시켜 준 이 벨기에 출신의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는 일에 뛰어들게 만든 요인일지도 모릅니다.
(중략)
일차적으로 다리와 병사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증언을 토대로 제작에 돌입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한 마디로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누가 우리를 전쟁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는지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억은 현재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당시 전쟁의 참상을 겪었던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며, 미래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훈을 남겨야겠다는 소명에서였음을 밝힙니다.”
그가 힘주어 강조한 마지막 메시지를 가만히 읊조려본다.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거 전쟁의 참상을 되돌아보고, 전쟁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며, 또한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을 위한 교훈을 들려주고자 한 목적.
La mémoire, pour le temps présent. L'hommage, pour le passé de ces anciens. La transmission, pour les générations futures.
이 모두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리 위에서 이틀 밤 사흘 낮 동안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트루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생각에 젖는다. 똑 같이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이 메시지가 주는 교훈은 그처럼 의미심장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은 프랑스 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평화가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닐까? 내 스스로 되묻는다! 이 보잘것없을지도 모르는 작은 역사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