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93화
[대문 사진] 옛 도빌의 생 로랑 성당
그럼에도 내가 도빌을 다시 찾은 이유는 도빌에 최초로 들어선 로마 가톨릭 천주교회 때문이다. 이 교회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 로마네스크 시기에 지어진 성당으로 거의 버려지다시피 하다가 우연히 역사적 기념물을 애호하는 이들에 의해 복원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중세 종교 건축물이다. 지금도 매달 월요일 첫 번째 토요일 그것도 오후 2시 반부터 4시까지만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것도 5월부터 10월까지만 방문객을 받아들이고 있다.
교회는 생 로랑 성당(Chapelle Saint Laurent)으로 불린다. 생 로랑은 라우렌시오 성인의 프랑스어 표기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교회 재물을 가난한 이들을 나눠주다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 처참히 순교를 당한 성인이다. 잉글거리는 불 위에 올려진 커다란 석쇠에 몸을 누인 채 화형 당한 성인으로 유명하다.
교회는 도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았다. 도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지도상으로는 ‘옛 도빌(Vieux Deauville)’ 지구로 명명되었다.
언덕바지 잘 보이는 곳에 교회가 들어섰는데, 원래는 교회가 있던 자리는 습지였고 교회 주변은 목초지였다고 전해진다. 습지를 메워 교회를 지었는데, 노르망디 인들 답게 인근 채석장에서 옮겨온 석재로 건물 몸체를 세운 뒤, 노르망디-로마네스크 양식에 입각하여 지붕을 올렸다. 성당 내부에서 올려다보면 천장은 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여 완성한 한 척의 배를 엎어놓은 형태다.
도빌로 들어서는 길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과수마다 핀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는 벌을 부르고 이리저리 봄꽃 사이를 오가던 벌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세상만물 어느 것 하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없다. 그것이 자연법칙이거늘 인간만이 홀로 버티고자 발버둥 친다. 그 모습이 그저 고집 피우는 것처럼 보여 안쓰럽기까지 하다.
도빌 트루빌 도로 표지판을 보니 반갑다. 파리에서 2시간 거리, 13번 고속도로(A13)를 이용하면 넉넉잡고 2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이른바 ‘노르망디를 향한 길’ 또는 ‘바이킹의 길’로 불려지는 13번 고속도로는 세느 강을 끼고도는 굴곡이 심한 도로여서 강에서 생성된 안개 때문에 야간 주행이 위험한 도로다. 하지만 대낮의 드라이브는 산과 구릉을 지나 강을 건너뛰는 재미마저 쏠쏠한 대서양을 향해 쭉 뻗어 나간 도로이기도 하다.
중간중간 톨게이트가 자리한 이유는 ‘안개’ 때문이다. 시속 130킬로미터 정속 주행을 권하는 친절함 뒤에는 톨게이트마다 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다. 휴게소에 들러 에스프레소 한 잔이 주는 상큼함을 즐기다 보면 목초지, 과수밭, 노르망디의 전형적인 농가, 꼴롱바쥬 건물, 세느 강 풍경이 다 한 자리에 모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동안 상쾌한 봄 취기가 마냥 상승했다. 시속 130킬로미터에 헉헉대던 차의 속도를 줄이고 도빌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생 로랑 성당을 향한 길이다. 생타흐눌(Saint-Arnoult) 주민센터를 옆으로 끼고 로터리에서 우회전하면 새로 들어선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정갈한 집들이 산뜻하게 줄지어 서있다. 마을을 지나 달리는 길은 옛 도빌(Vieux Deauville)을 향해 나 있는 길이다.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는 플라타너스 길은 거꾸로 도빌 쪽에서 보면 경마장 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길 끄트머리 도빌 시가지를 앞에 두고 좌측 길로 꺾어질 즈음 언덕길에서 마주치는 성채를 방불케 하는 근사한 별장 건물은 도빌 시에 의해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스트라스뷔흐제흐 빌라(Villa Strassburger)다. 소유주였던 미국인 스트라스뷔거 가문의 이름대로 발음하면 ‘빌라 스트라스버거’가 된다.
노르망디 스타일의 반 목조 건물로 지은 빌라는 원래 작가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목초지를 구입한 앙리 드 로스차일드가 건축가 조르쥬 피슈로에 의뢰해 완성한 건물이다.
처음에는 빌라 꼬또(Villa Coteau)라 불렸지만, 이후에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랠프 비버 스트라스버거가 구입한 뒤로 빌라 스트라스뷔흐제흐로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시 전쟁의 참화를 비껴가지 못한 빌라는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했지만 스트라스버거 가문의 마지막 유증자인 피터가 복원하여 1980년 빌라를 도빌 시에 기증함으로써 역사적 기념물이 되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답게 스트라스뷔르제흐 빌라는 뾰족하게 솟아오른 지붕이 심하게 경사지고 지붕보다 높이 솟아오른 굴뚝과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스트라스뷔흐제흐 빌라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꺾어 든 고갯길이 생 로랑 성당으로 향한 길이다.
길은 뤼 뒤 물랭 생 로랑(Rue du Moulin Saint-Laurent)이라 불린다. 언덕 위 성당 근처에 풍차가 있었던 모양이다. 물랭(Moulin)은 ‘풍차’란 뜻이다. 길은 지금의 도빌 시가지가 조성되기 전 원래 자리했던 조그만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는 행정구역 상 꼬토(Coteau) 지구로 불리고 있고 약 2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초입에 성당이 있다. 이름하여 생 로랑 성당(Chapelle Saint Laurent)!
아주 아득한 옛날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언덕 꼭대기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들판이나 해안가보다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수단에서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석회암 지형은 어느 곳이나 우물을 파면 식수를 구하기 쉽고 이 꼬또 지구는 마침 산기슭이기도 하여서 샘도 있었다.
1950년대까지 샘은 ‘기적의 물’이라 알려지면서 수많은 순례자들을 비롯하여 특히 피부병 환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기적수’로 유명한 성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번영에도 기여를 했다. 그렇듯 번영을 가져온 교회는 언덕 위 도빌 시가지와 해안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안성맞춤 들어앉았다.
교회는 교회가 소유한 재물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준 라우렌시오 성인에게 봉헌되었다. 하여 프랑스 어로 생 로랑 교회(Chapelle Saint Laurent)란 이름이 붙었다.
생 로랑 성당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에 지어졌다. 로마네스크 시기다. 그러나 요새를 방불케 하는 두툼한 벽에 작은 틈처럼 나 있는 창문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뿐, 로마네스크 흔적은 어디에서 건 찾아볼 수가 없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오기엔 성당은 너무 작고 신자수도 보잘것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진행하던 시기에 번성했던 교구 소속 교회였다는 점이 믿기지 않는다. 그나마 전쟁으로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성당은 그저 폐사지에 유일하게 남은 유적처럼 다가온다.
그런 성당에 기적이 일어났다.
버려지다시피 한 교회 건축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모여 예전에는 꽤 번성했던 교회였음을 알게 된 이후 기적을 만들어간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모여 기적을 만들어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여기에 진짜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났다. 패션 디자이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브 생 로랑이 이 보잘것없는 성당 재건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그가 엄청난 기부금을 봉헌하는 바람에 버려진 교회는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브 생 로랑이 성당 복원사업에 기부금을 자진해서 헌사한 이유는 자신의 성이 바로 생 로랑, 성인과 같은 이름이었다는 데 있었다고 패션 디자이너는 소박하게 말한다.
고향 그랑빌에서 독일군과 맞서 저항하던 레지스탕스에게 군사자금을 지원했던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이브 생 로랑이 그 이름에 걸맞게 한 자그마한 마을의 버려진 성당 재건에 막대한 기부금을 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훌륭한 일인가? 비록 교회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눠준 성인만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과 같은 교회 기념 복구사업에 흔쾌히 기부금을 낸 패션 디자이너, 한 마을의 성당이 복구되기까지엔 이런 작은 기적들이 하나 둘 쌓여간 결과였다.
복원된 성당은 인근 채석장에서 운반해 온 화강암 돌로 건물 몸체를 짓고 그 위에 역시 돌을 쌓아 지붕을 올렸다. 이후로 마로니에 나무로 완성한 배를 엎어놓은 듯한 천장을 완성했다. 대혁명 이후에 버려진 교회였던 성당은 그나마 전쟁의 참화를 견디지 못해 종탑마저 날아갔다. 새로 지은 종탑은 얇은 돌판 슬레이트 장식으로 쌓아 올린 전형적인 노르망디 지방의 종탑 양식을 보여준다.
소박하다 못해 검소함마저 한껏 풍기는 교회 건물은 로마네스크 시대에 발흥한 시토회 수도원 교회를 연상시킨다. 이렇다 할 성상(聖像) 하나 놓여있지 않은 성당 내부엔 라우렌시오 성인의 성스러운 조각상만이 유일하게 방문객을 맞는다.
본당 내부는 단출하다 못해 단 하나의 회랑 구조로 되어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노르망디 교회 건축물에서 흔히 보는 나무 천장 구조를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신자석과 제단이 놓인 내진(성가대석)을 벽이 가르고 있다는 점이다.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이 경계는 천상과 지상을 상징한다. 이는 미사를 집전하는 성스러운 장소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리스도의 몸을 영할 때마다 밀떡으로 신자들에게 현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신비를 체험하는(영성체) 신자들만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소박한 상징이 자리 잡은 성당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만종의 시각에 맞춰 미사가 집전되고 있는데, 약 15명의 신자들이 저녁미사에 참석하여 성당의 존속을 함께 기리고 있다.
교회 건물을 에워싼 정원에는 묘석들이 눈에 띈다. 베드로 성인이 순교한 터에 베드로 성당이 지어졌듯, 교회는 원래 순교자의 무덤을 상징한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교회 뒤편에는 공동묘지가 자리했다. 생 로랑 성당의 공동묘지는 근교로 이전되고 몇 개의 묘비들만이 교회 벽면을 따라 서 있다. 이는 도빌 인근의 해상에서 실종된 선원들의 묘석이거나 옛 도빌 시장의 무덤임을 일러준다.
지붕 처마밑을 가만 올려다보면 로마네스크 시기에 제작된 처마밑 조각 장식들을 볼 수 있다. 이 처마 조각 장식은 모디용(Modillon)이라 부르는데 그 기원만큼은 오래되었다.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양식에 만나게 되는 코린트 양식이 그 기원에 해당하는데,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원통형 기둥 꼭대기 부분에 조각된 식물 문양의 장식은 중세로 이어져오면서 처마 밑 장식으로 발전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온갖 그로테스크 한 형상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에 관한 논란 또한 끊이질 않았다. 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한 고딕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전 로마네스크 시기에 제작된 모디용, 즉 처마 장식 조각들에 대한 시비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흉측하고 기괴한 동물 형상 또는 악마의 모습을 한 인물 형상 조각들이 과연 성스로운 공간에 합당하느냐 하는 논란이었다. 시토회 수도원 교회 건축을 대표하는 이론가였던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던 중세 수도승이자 수도원장이었다.
“수도원 경내에 자리잡은 이 더러운 원숭이 조각하며, 사나운 사자들과 거짓으로 꾸며낸 이 반인반수들 가운데 무엇 하나 선한 것이 있단 말인가? (···) 만일 여기 다양한 모습들로 표현된 것들이 그토록 매혹적인 것들이라면 수사본을 읽어가는 것보다 대리석들을 쳐다보는 것을 더 즐겼을 테고, 하느님의 계명을 묵상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상탄하는데 허송세월했을 것이다.”[1]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 다양한 처마 밑 조각 장식들을 보고 있자면, 저 아득한 천 년 전의 석공들의 영혼을 만나는 느낌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조각 장식을 제작하였을까? 혹시 그들은 작업장에서의 일과가 무료하고 너무 고되어 재미 삼아 이 괴기한 동물들을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이 동물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가르구이유(빗물 홈통 조각 장식)처럼 로마네스크 만이 빚어낸 조각 예술의 결정체가 모디용이라 불리는 처마 밑 조각 장식이란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1] 브런치 북 『초기 로마네스크 예술』, 「종교 예술의 두 관점, 쉬제흐와 성 베르나르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