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92화
[대문 사진] 19세기말 도빌의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봄은 아직도 먼 것일까? 아니면 이미 가버린 것일까? 대낮에는 영상 17-18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이건만 비만 내리면 10도 이하로 뚝 떨어지고 만다. 이들은 해양성 기후이기 때문이라 한다. 확실히 바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비만 내리면 써늘해지는 것이 빗물에 온몸이 젖어드는 기분이다.
프레스낄(Presqu'île)은 도빌 기차역 바로 앞에 새롭게 조성된 특화지구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해야 하나. 우중충한 예전의 모습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인생무상이란 말이 떠오른다. 저 변화 앞에서 나만이 초라한 모습이지 않은지 불안감마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서 바뀔 줄 모르는 인생살이의 애꿎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세상살이에 파도치는 폭풍우 몰아쳐도 꿈쩍 않는 바위의 든든한 풍경이 그리운 것도 이곳 바닷가를 찾을 때마다 되풀이되는 꿈이다.
기차역 앞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에 목을 축이면서 깃발이 휘날리는 로터리(Rond Point) 너머 도빌 시가지 초입을 바라본다. 저곳이 진짜 도빌이 시작되는 곳이다. 초입에 이비스(Ibis)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1995년 아내와 함께 처음 도빌을 찾았던 그날 모습 그대로 예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호텔만 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로터리에서 온갖 농수산물에 잡화를 비롯하여 옷가지 등속까지 팔고 있는 근사한 도빌 장터를 지나 시청을 지나고 이브 생 로랑 광장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길의 풍경조차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이 길은 도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다. 욕망의 거리, 나는 이 길에 그와 같은 별칭을 붙이고 싶어 진다. 산뜻한 분위기에 진열장을 들여다보다 결국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가게들, 바깥 테이블에 앉아 차라도 한 잔 들며 고즈넉하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시선을 주고 싶은 카페들, 왠지 음식이 맛깔스러울 것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식당들, 담배꽁초 하나 발견할 수 없는 깨끗한 도로는 돌을 쪼아 만든 타일로 마치 물살이 퍼져나가는 듯한 멋진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왜 이들이 이처럼 깨끗함에 집착하는지를 이해할 만도 하다. 해변의 도시고 욕망의 도시다 보니 많은 외지인이 찾아오고 그런 연유로 인산인해를 이룬 도시는 소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도심의 길도 금방 더러워지고 온갖 방언들마저 난무한다.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 어느 도시 주민보다 자긍심 높은 도빌 주민들로서는 소란스러움은 어쩔 수 없다지만 도시가 점점 추해지고 길들마저 더러워지는 꼴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도빌은 원래 부르주아의 휴양지였고 기품 있는 도시였으며 고상한 도시였다. 그런 도시에 사는 주민들로서 자신들 역시 프티 부르주아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시당국의 지나친 청결에 대한 강박관념이 스위스의 도시들처럼 프랑스에서 제일 깨끗한 도시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도빌은 내가 가본 프랑스 어느 도시보다도 가장 깨끗했다. 똑같은 브랜드이긴 하지만 왠지 여기서 파는 제품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으며, 똑같은 사과인 데도 여기서 파는 사과가 더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반면에 가격은 파리보다 비싸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도시에서 살려면 돈을 많이 벌든지 아니면 복권에라도 당첨되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도빌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처럼 프랑스에서 제일 큰 도박장이 있는 온갖 욕망이 배설되고 있는 곳이다.
도빌은 도박의 도시다.
온갖 욕망이 배설되는 도시.
도박장 카지노는 역사의 현장이자 영화의 촬영장이자 지금도 수많은 사연을 쏟아내는 인간사의 파탄의 장으로 이 도시를 상징한다. 아이러니한 일은 정부 당국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어도 프랑스는 해안가에 도박장이 집중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카지노가 도빌에 있다. 그런 연유에는 한 인물이 끼어든 사정이 있다. 그 역시 ‘역사의 주역’ 임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지만.
처음 도빌에 도박장이 들어선 이후로 변천을 거듭하다가 프랑수아 앙드레(François André)란 인물이 어찌어찌하여 도박장을 인수한 이후로 이를 관광산업과 연계시켰다. 그 공로로 그가 지은 <노르망디 호텔> 앞 광장에는 이를 기리는 그의 조각상마저 세워져 있다. 조각상이 자리한 정원도 그의 이름을 땄다. 지금은 조카인 뤼시엥 바리에르(Lucien Barrière)가 물려받아 프랑스 호텔 카지노를 대표하는 바리에르 그룹을 탄생시켰다.
바리에르 그룹은 도박장뿐 아니라 호텔, 리조트, 골프장 등 관광산업에 관련된 온갖 사업에 손을 뻗치고 있다. 나 역시도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그 멋진 <노르망디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으며, 바리에르 그룹이 운영하는 <골프장 호텔>에서도 하룻밤 묵으며 도빌 해안의 밤풍경을 지켜본 적이 있을 정도다.
카지노 사업은 도빌을 대표하는 가장 주된 사업이다. 이런 비아냥이 싫었는지 도빌 시는 ‘영화’라는 테마를 꺼내 들었다. 깐느 영화제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영화제라면 도빌 아메리칸 시네마 페스티벌(Festival du Cinéma Américain de Deauville)은 국제영화제에 해당한다. 여기서 한국 영화감독들이 몇 차례 수상을 하기도 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세계적인 슈퍼스타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쇄도한다. 조용한 산책자는 이때를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여름철에는 더 많은 피서객들마저 몰려든다.
쓸쓸히 바닷가를 산책해 본다. 텅 빈 바다! 바다에 서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고운 모래들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 자꾸만 귀찮게 군다. 바닷가에서 노을과 함께 물드는 인생에는 수많은 사연마저 쏟아진다. 그 사연을 다 무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허공을 나는 갈매기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갈매기는 까악 까악 하며 울며 달아나기만 한다. 그렇다는 뜻인지 아니라는 뜻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새처럼 날아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어 진다. 이쯤에서 여행자는 지리학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