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발굴로 모습을 드러낸 고대 도시

나의 프로방스 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1920년 고고학 발굴 당시의 모습


서기 270년경, 글라눔은 게르만 침략의 첫 번째 물결에 따라 파괴되고 점차적으로 버려졌다. 주민들은 도시를 떠나 더 북쪽으로 이주하여 현재의 도시인 생 레미 드 프로방스(Saint Rémy de Provence)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글라눔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돌이란 돌은 다 가져다 건물을 지었다. 그 결과 글라눔은 폐허로 돌변했다.


또한 글라눔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 갔다. 심지어 거의 8미터 높이에 달하는 두꺼운 충적층 아래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도시 입구에 있는 2개의 고대인이 건설한 아치와 영묘만이 고개를 겨우 쳐든 모습이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해 이 도시가 발견될 당시 글라눔은 올리브 나무 밭으로 덮여 있었고 마치 우리의 광개토대왕비가 그러했듯이 프로방스 농가가 포럼 부지 위에 자리한 형국이었다.


고고학 발굴은 피에르 드 브룅(Pierre de Brun), 쥘 포르미제(Jules Formigé), 앙리 롤랑(Henri Rolland)에 의해 주도되었다.


1921년 여름, 역사적 기념물의 수석 건축가인 쥘르 포르미제(Jules Formigé; 1879-1960)는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피에르 드 브륑(Pierre de Brun; 1874-1941)에게 글라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발굴을 맡겼다.


고고학적 발굴의 첫 삽을 뜬 이래로 이 역사적인 도시는 알피유(Alpilles) 산기슭에 보존된 고대 도시에 생생한 증언을 지속적으로 전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앙리 롤랑(Henri Rolland; 1887-1970)은 엄청난 고고학적 발견의 규모로 인해 1941년부터 이 고대 도시가 프랑스에서 가장 장대하고 엄청난 역사 유적이자 문화유산이란 점을 만천하에 입증해 냈다.


만일 고고학적 발굴이 아니었다면 이 오래된 도시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흙 속에 묻혀버린 글라눔은 잊히고 망각되어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졌을 것이다. 3명의 고고학자의 집념이 땅 속에 묻혀 있던 도시를 햇빛아래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 것이다. 이후로 많은 고고학자, 건축가, 엔지니어 및 역사학자들이 한 세기에 걸쳐 발굴 작업에 뛰어들었고 발굴 작업자, 석공 및 복원가가 유적 보존을 위한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이 엄청난 고대 도시 글라눔은 프랑스 인들의 모험 정신이 낳은 결실이었다. 더군다나 고고학과 금석학에 대한 오늘의 관심을 부추기고 증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현재 ‘고고학 공원’이라 명명된 이 고대 도시는 저 아득한 서구 인류 문명의 실상을 짐작케 해주는 하나의 ‘열쇠’ 임은 분명해 보인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고대 도시 글라눔(Glanum).


생 레미 드 프로방스(Saint Rémy de Provence) 인근에 위치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고대 도시 글라눔에서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고대 유적은 개선문(Arc de Triomphe)과 쥘 영묘(Mausoleum de Jules)일 것이다. 프랑스 인들이 ‘레장티끼떼(Les Antiquités, ‘유물’, ‘골동품’이란 뜻)’라 부르는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고대 도시를 빛내 주는 상징물들이다.


1991년 먼지가 풀풀 날리는 오전의 봄날, 버스에서 내린 글라눔, 입구에 세워진 개선문 쪽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일행 뒤쪽에서 따라가던 나는 프랑스어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답답해하면서도 폐허로 변한 고대 도시 유적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느낌에 당혹해했다. 정림사지 폐사지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겹쳐져서였을까? 돌기둥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석회암으로 만든 비석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면서 일행들을 눈치껏 따라다니느라 애먹었다.


쥴리의 영묘는 기원전 30년, 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쥴리(Julii)는 토착 엘리트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예를 기린 이 도시의 저명인사가 된 인물이다. 4개의 육중하게 제작된 직사각형 받침대에 승리의 아치로 마감된 이중 입구가 나 있으며, 그 위에는 기둥이 있는 작은 둥근 신전과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이 올라섰다.


개선문과 쥴리의 영묘(L'arc et le mausolée de Julii).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을 묘사한 아름다운 부조로 장식된 개선문은 압도적인 크기다. 아마도 슬레이트로 엮은 엉성한 지붕을 보건대 이웃한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주민들이 집짓기 위해 개선문 윗부분을 뜯어간 것으로 보인다. 온전한 모습이라면 아치 윗부분은 사각형으로 각진 꼭대기 부분을 이루고 있어야만 한다. 아랫부분 개선문 외벽에 조각된 풍요의 상징인 과일과 나뭇잎은 팍스 로마나를 암시하는 제1의 상징체계일 것이다.


서쪽에서 본 개선문.


글라눔은 로마 제국이 한창 평화를 구가하던 시기에 발전을 거듭한 식민 도시다. 그 평화의 근원은 식민지 확장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실이었다. 오늘날의 이념적 시각에서 본다면, 평화는 타민족의 희생 속에 이루어진 타협의 부산물과 같은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말을 빌지 않아도, 시오노 나나미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기독교는 결국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근본 원인이었다. 기독교는 그럼으로써 로마 제국 시기까지의 모든 고대 문명을 부정하고 나선 서구인들에게 새로운 갈망에 입각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암울한 시기에 꽃 피워진 중세 유럽 문명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글루눔은 중세 시기를 관통하지는 않는다. 고대 로마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식민도시로서의 수명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땅속 깊숙이 가라앉는다. 적어도 1920년 발굴되기 전까지는.


기원전 20년 로마 제국 시기에 지어진 포럼.


글라눔은 로마 제국의 도시를 특징짓는 중앙 거리를 따라 배열된 건축물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롭다. 위쪽 부분, 더 좁은, 건강의 여신 발레투도와 헤라클레스에게 헌정된 신전을 포함하여 작은 신전이 들어선 신성한 성소 주변으로 한정되기는 했으나, 목욕탕을 건설한 로마인들의 청결함에 대한 강박관념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다.


더 걸어 들어가면 대성당, 포럼, 쿠리아 및 사원이 있는 기념비적인 중앙 집회 공간이 나타난다. 그다음으로 목욕탕, 안테스의 집(Maison d’Antes), 키벨레 및 아티스의 집을 포함하여 부유층의 저택(빌라) 및 생필품을 팔던 가게가 들어선 주거 지역에 이른다.


번성했던 로마 제국 시기에 건설된 탓인지 글라눔 입구에서 주거지역으로 통하는 메인 도로는 돌로 포장한 아피아 가도처럼 돌을 깐 길이 인상적이다.


이 긴 역사의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프랑스어 가이드는 계속 길을 재촉한다. 돌아볼 것이 많다는 증거다. 오전 내내 돌아본 글라눔은 화석화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고고학적 발굴이 서구 문명에 어떤 의미를 띨지는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여행 중 내내 버스에다 두고 내린 카메라 가방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카메라 때문에 버스로 뛰어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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