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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l 05. 2024

뒤라스에 대한 재검토

프랑스 문학의 오늘 32화

[대문 사진] 모데라토 칸타빌레


지극히 진부한 산문체임에도 불구하고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소설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문학의 판도 내에서 그녀의 작품이 확고하게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같은 맥락에서 작품 자체를 견고하게 해주는 어떠한 요소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해체 유희(Jeux de déconstruction)의 첫 징후로써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 징후는 디아벨리의 주명곡의 주조음에 해당하는 애수를 띤 조금 느리게(moderato cantabile)와 같은 음조로 씌어진 1958년의 작품 『모데라토 칸타빌레(Moderato cantabile)』에서 극명해지는데, 이 작품은 서사 구성단위를 이루는 기본 요소로부터 출발하여 피아노 초보자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순한 건반연습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고도 확장적인 소설의 영역을 새로이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이는 또한 베토벤 작품 120번 디아벨리 왈츠를 위한 서른 세 개의 변주(les 33 Variations sur une valse de Diabelli, opus 120 de Beethoven)에서 최대로 변조되는 변주 기법에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뷔토르나 쿤데라에 뒤질 정도로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변모(La Modification)』의 작가(미셸 뷔토르)는 1971년에 왈츠를 위한 서른 세 개의 변주를 통한 ‘대화’를 시도하고자 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로 나타난 것이 바로 두 저술들인 『소설의 기법(L’Art du roman)』(1986)과 『기대를 저버린 유언(Les Testaments trahis)』(1992)이었다.


미셸 뷔토르, 『기대를 저버린 유언』(1992)과 『소설의 기법』(1986).


이 두 권의 책들은 기존에 발표한 몇몇 소설들에게서 그 전조가 엿보이듯이 서로 반향을 이루는 작가의 의도가 최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물론 이 모두가 덧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서 전혀 의미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서른 세 개의 변주에서 오직 열네 번째의 변주곡만을 차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낮은 중음 이(e) 장엄하게(grave e maestoso)’라는 잔잔한 음조를 취하고 있음은 물론, 뷔토르가 전체적으로 조용한 톤을 이루는 가운데 “뇌성벽력에 다가감”을 느꼈다고 토로하고 있는 『인도의 노래(India Song)』가 그 좋은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인도의 노래』, 갈리마르.


물론 장엄하고도 위압적인 작품 전체 체계에 있어서 곡을 해체하지 않고 변주만을 따로 떼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기법은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Le Ravissement de Lol V, Stein)』에서 보듯 대단히 과단성 있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은 작품이 현대성을 띠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기법 상의 문제만을 고려해 볼 때,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앞서있고 기교적인 면에서도 훌륭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1964년의 소설을 재검토해 볼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평탄한 고요를 뒤엎어 버릴 만한 집채만 한 파도의 세찬 물결이야말로 이 소설이 획득한 현대성(la modernité)의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


작품에서의 ‘겁탈(Le Ravissement)’은 베아트리스 디디에가 정확하게 고찰하고 있듯이, “좌절의 시기에 적절히 들어맞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초기의 작품들을 부정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제스처를 보인 이후에 발견해 낸 작가 스스로에게 가장 적확하게 들어맞는 정체성에 기반 한 그만의 새로운 방법”에 해당했다.


뒤라스는 이 소설에서까지 이미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느 데바레데라는 나이 어린 소년을 등장시켜 완전한 음계에 관한 연습만을 반복시키던 장면을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이제 그녀에게는 몇 마디의 글귀가 적인 쪽지로, 즉 독일어로 씌어진 몇 개의 문자들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후작부인’의 문장과도 같은, 또한 누보로망에나 어울릴 것 같은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단순한 문장은 누보로망이 거의 관습적으로 애용에 오던 것이었다.


“롤 브이(V). 슈타인은 이곳 에스(S). 탈라에서 태어났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 소설이 비록 한 젊은 여성을 등장시켜 장 베드포드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에 이르고 세 아이까지 둔 주부가 되어 장장 1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뒤, 활짝 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독자들은 ‘어렸을 적 젊은 꿈’을 여태껏 되찾지 못한 롤라 발레리의 젊음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우리의 시선을 거스르게 만드는 것은 그 제목에 있다. 왜냐하면 소설의 제목이 기이하게도 두 번째 단어가 단 한 자의 머리글자인 브이(V) 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이름 표기 용례에 따른, 축약된 이름자와 완전한 전체 이름자 사이에 끼어든 이 난데없는 머리글자의 출현, 책 제목에 느닷없이 끼어든 틈입은 두 번째 이름을 단순히 머리글자만으로 표기함으로써 이름을 의뭉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동음이의를 피할 수 있다는 작가가 의도한 계산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순수하고도 보충적인 징후 표지로서의 멋과 경제적인 실리를 함께 추구하고자 한 의도화된 고려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 F. 케네디란 이름자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설명은 비록 도시적이면서 또한 장소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에까지 참으로 별난 표기방식을 고집하고 있지만, 소설이 지닌 허구적 미스터리를 적절히 해명해 주기에 충분하며, 작가의 의도를 적절히 밝혀줄 수 있는 확실한 준거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첫 번째 문장에 쓰인 롤이 태어난 장소 에스(S). 탈라가 그러하며, 도박장이 있는 티이(T). 비치 해수욕장, 그리고 롤이 결혼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장 베드포드와 함께 살아가는 유(U). 브리지가 그러하다.


이 일련의 알파벳만으로 구성된 문자군은 롤 브이(V). 슈타인의 이름에서의 브(V) 자를 이끌고 있다. 이 네 개의 머리글자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손가락 연습을 위한 피아노 건반의 기본 음계인 도레미파의 네 음정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은 그렇듯 4개의 머리글자에 의한 미려(美麗)한 장면을 의도한 소설의 새로운 양상을 향해 열려있다.


알파벳에 의한 이러한 문학적 예가 따로 고립되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아르튀르 랭보의 모음들(Voyelles)에게서 그와 같은 전조가 나타나고 있듯이, 『어휘의 연금술(Alchimie du verbe)』이야말로 알파벳 철자 유희에 입각한 그 어떤 작품보다도 훨씬 놀랍고도 탁월한 문학적 양상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발명하였다. A 검정, E 하양, I 빨강, O 파랑, U 초록.



그러나 같은 소네트에서 시적 전개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다.



A 검정, E 하양, I 빨강, U 초록, O 파랑 : 모음들
어느 날 나는 그대들의 잠재적인 출현을 이야기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시는 단지 “그의 눈에는 보랏빛 광선”에 불과한 난해한 그리스 자모의 마지막 글자인 오메가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랭보는 또한 “자음 각각의 형태와 운동이 규칙적”임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랭보의 이 말은 결국 언어를 분해하고 언어가 지닌 요소들로부터 완전히 다시 출발함으로써 언어에 새로운 출현을 부과하려는 의도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시적 기도는 해체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입장을 띤 것이다.


아르튀르 랭보의 친필 자작시 「모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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