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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Sep 30. 2024

문자 유희

프랑스 문학의 오늘 33화


랭보의 탁월한 주석가인 벨기에인 에밀 누레(Émile Noulet)야말로 랭보의 「모음들 (Voyelles)」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냈을 뿐 아니라, 문자 비평에 대한 영역을 훨씬 더 넓혀놓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랭보 시에 관한 그의 독특한 평가는 1963년에 출간된 『랭보의 첫인상(Le Premier Visage de Rimbaud)』을 통해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


에밀 누레, 『랭보의 첫인상』


우리는 여기서 1966년에 드니 로슈(Denis Roche)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된 에즈라 파운드의 『읽기의 에이, 비, 시(A. B. C. of Reading)』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에즈라 파운드, 드니 로슈 번역, 『읽기의 에이, 비, 시』


이 미국 작가는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어 하는 초보자들이 교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라두스 애드 빠르나쑴」과 같이 읽기 교본을 위한 철자들을 제시하는 듯하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욕망은 결국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듯 모든 형태들을 한데 혼융하는 형식의 무정부주의를 설파하던 이 국립도서관 사서는 1950년에 이르러 미뉘(Minuit) 출판사에서 『시이(C)라는 이름을 가진 사제(Abbé C)』라는 제목이 붙은 선정적인 기술체를 우리 앞에 펼쳐 놓았는데,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소설의 발상은 도 레 미 음정과도 같은 알파벳 처음의 철자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르주 바타유, 『시이(C)라는 이름을 가진 사제』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첫 번째 필명이었던 오슈 경(Lord Auch)으로부터 자신의 본명인 바타유(Bataille)로 이행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참고적으로 오슈 경이란 필명은 1928년에 발표한 『시선에 관한 이야기(L’Histoire de l’oeil)』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르주 바타유, 『시선에 관한 이야기』


바타유란 이름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이 이름은 1935년에 결성된 결사체 <반격(Contre-Attaque)>(혁명적인 지성을 통한 투쟁 연합체)의 대표적 작가를 가리키는 상징적 이름이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1946년에 창간한 <비평(Critique)> 지의 발행인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기도 했다.


조르주 바타유가 창간한 문학비평 잡지 <비평> 창간호.


이러한 유희적인 작품 창작으로부터 이른바 우리가 요즘 일컫고 있는 문학에 있어서의 후기 현대성(post-modernité)이 도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에드몽 알렌(Edmond Alleyn)의 그림이 곁들여진 미셸 뷔토르(Michel Butor)의 시집 『조건부(Conditionnement)』(1967)야말로 장난삼아 하는 문자 유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뷔토르가 1962년에 펴낸 『움직이는 조각(Mobile)』이란 저술을 통해 이미 실험한 바 있듯이, 칼더(Calder)의 방법론에 비추어본다면, 알파벳 철자마저도 유동의 체계 속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미셸 뷔토르, 『움직이는 조각』, 체코어 판.


뷔토르의 『움직이는 조각』은 충격적인 인쇄 방법을 통해 제작된 것으로서 333쪽(33 + 3?)에 달하는 “미합중국을 표현하기 위한 습작(étude : 나는 특히 이 말을 강조하고 싶다)”에 해당했다.


이에 대해 뷔토르는 1968년 조르쥬 샤르보니에(Georges Charbonnier)와의 대담에서 “움직이는 조각에 대한 건축 총계”라고 자신의 작품을 정의한 뒤, 결국 이 작품은 “이름들을 반복함과 동시에 국가들을 표기한 알파벳 순서가 발생시킨 아주 초보적인 우연의 조합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핵에 인접한 입자들과 같은 이름이 반복되는 숫자가 일반적으로 문화의 공동체, 즉 역사의 뿌리가 같은 집단에 연결되면서 되풀이가 충족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경우들 가운데에서 내 스스로 이를 구성하는데 성공했던 모든 주위 입자들의 순서에 따른 기초 우연성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비록 알파벳 순서가 『조건부』와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에서 그 순서가 일목요연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뷔토르가 일련의 알파벳 철자들을 갖고 실험시를 썼던 여러 편의 시들 가운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미합중국의 알파벳 목록, 즉 돈환의 목록(lista donjuanesque)은 부분적으로 앞뒤가 엇갈리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음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t

나를 도와주시오                티타늄            연결하시오

            u

계속하다

            v

나를 도와주시오                지레                나는 듣는다

            w

            x

나를 내버려두시오              우라늄            대답하시오

            y

고통을 견디다

            z

나를 너그럽게 봐주시오        메스              나는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나 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되풀이될 수 있다.


텍스트의 결구를 향한 철자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거한 이합체시(離合體詩, l’acrostiche : 각 행의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한 마디의 말이 되는 일종의 유희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전이와 틈입을 이용한 방법(x 선이나 자외선으로부터 주어진 ‘x 보랏빛 회전’), 두운 형태의 강조 음향을 이용한 방법(‘z 검정 전기를 띠게 하기’), 구문론의 가치 부여나 음성학상의 유희를 이용한 방법(‘y c 슬개골’, 여기에서 부사어 ‘y’는 ‘물가에서’를 취하고 있거나 ‘가벼운 카누 속에’를 가리키고 있는데, 달리 이야기해서 y c가 hisser(게양하다)로 전환되는 부사어의 가치 부여와 같은 형태)이 그와 같은 경우에 속한다.


언뜻 보기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이 브이(V) 자에서 멈춰버린 것처럼, 뷔토르의 시 또한 더블유(W) 자로 끝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의 마지막 단어가 ‘(voyage(여행)’이라는 점이 그러하며, 마지막 어휘를 처음에 선택했던 자음에서 따왔다는 점 또한 그와 같은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비의(秘義)를 내포한 텍스트로서의 작업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설명될 수 있는 부분과 알파벳 상으로 어느 한 글자를 따오는 것은 텍스트가 지닌 비의적 요소를 서로 보완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를 더욱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독자들은 뒤라스의 소설에서 티이(T). 비치의 무도회장으로부터 롤의 약혼자 미카엘 리차르드슨의 머리글자인 알(R)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알(R)은 안느-마리 스트레테에 의해 제거되고 겁탈당한 리차르드슨과 같이 속(屬)이 사라진 것일 뿐이다. 더블유(W)는 롤과 자크가 함께 하는 티(T). 비치의 머리글자인 티이(t)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기차)’라 표기하기를 고집한 듯하며, 적어도 더블유(W)나 작가가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어둡고 음울한 것으로 묘사하고자 의도한 이상,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이 『실종(La Disparition)』에서 체계적으로 이(e)를 삭제해 갔듯이, 더블유(w) 역시 실종이란 주제적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wagon(객차)마저 거부한 듯이 보인다.


조르주 페렉의 소설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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