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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n 28. 2024

여성들의 기술체

프랑스 문학의 오늘 31화

[대문 사진] 베아트리스 디디에, 『여성과 글쓰기』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에 대한 과대평가, 나는 적어도 그와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1996년 년초에 발생한 뒤라스의 죽음은 이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온갖 찬사를 쏟아지게 만든 주 요인이었지만, 그녀의 죽음이 그녀에 대한 찬사를 필요로 할 만큼 필요 불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로지 여성 문학(littérature féminine)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1981년에 베아트리스 디디에(Béatrice Didier)가 발표한 탁월한 저서 『여성과 글쓰기(L’Écriture – femme)』에서 언급한 내용에 주목했던 몇몇 여성 작가들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해 뒤라스의 휘광(輝光)까지 이용하려는 기도 또한 무용한 것이기만 했다.


베아트리스 디디에의 탁월한 저서 『여성과 글쓰기』, 1981, 프랑스 대학출판사.


문학이란 “영역 내에서” 그녀는 강조하기를, “초현실주의나 ‘누보로망’과도 같은 다양한 여러 문학 운동들이 기존의 문학을 철폐하고 모든 전통의 속박으로부터 또한 문학을 벗어나게 한 범위 내에서 여성들은 더욱 자유롭고 진정한 새로운 문제를 확립하고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엘렌느 시쑤스(Hélène Cixous)의 표현에 따르자면, 여성 작가란 한마디로 선천적 재질을 ‘타고난 젊은 여성’을 뜻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과거 꼴레트(Colette)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를 대체한 오늘날 확실한 새로운 세대를 꼽자면, 앙드레 쉐디드(André Chédid)나 마리-클레흐 방꺄르(Marie-Claire Bancquart), 또는 플로랑스 들레(Florence Delay)나 엘렌느 시쑤스가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여기 언급한 네 명의 작가는 오늘날 프랑스 문학의 전 장르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들. 왼쪽부터 엘렌느 시쑤스, 플로랑스 들레, 앙드레 쉐디드, 마리-클레흐 방꺄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난감하다. 그녀의 전 남편인 기 슐레흐(Guy Scheuller)가 책임 편집을 맡은 것이 분명한 로베르 라퐁 출판사의 <부깽(Bouquins) 총서(叢書)>에서 1996년 그녀가 이때까지 발표한 소설들을 한 묶음으로 간행하였는데, <부깽 총서>로 다시 읽는 그녀의 전 작품은 일찍이 그녀의 문학적 명성을 드높일 대로 드높인 것은 물론 한 세상을 풍미하기도 했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하리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은 1954년에 비평가 상을 받은 작품이다.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이 소설은 그녀가 너무나도 성급하게 부도덕하고 추잡한 젊음 자체를 자신의 소설적 주제로 삼은 경솔함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연상의 남자들이 품고 있는 거짓 감정의 위선적 태도를 더 이상 믿기 어렵다는 식의 작가 자신의 특이한 젊은 감각을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60년에 이르러 그녀는 클로드 샤브홀(Claude Chabrol)이나 로제 바댕(Roger Vadim)에 의해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됨에 따라 당시 세상을 풍미하던 ‘새로운 물결(Nouvelle vague)’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브라암스를 좋아하시나요(Aimez-vous Brahms)?』에서는 작가 자신의 나이에 비해 너무도 일찍 쇠잔해 가는 여성의 삶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민첩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라암스를 좋아하시나요』


소설에 등장하는 사십 대의 중년 여성인 폴은 실내 장식가로서 그녀의 고객 가운데 한 여인의 아들을 유혹하고자 가슴을 설레기까지 하는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변호사 시보 시몽은 겨우 스물다섯 살밖에 안된 젊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동요시킨 신선한 감정이 주인공이었던 그는 폴이 로제에게서 더 이상 느낄 수 없던 매력을 지닌 청년이기도 했다. 감정의 잔잔한 소용돌이 속에 사랑의 뻔한 장소들을 오가는 구태의연함 뒤에 출구로 나서는 두 사람, 막 정염을 불사르던 시몽은 폴에게 그녀 역시 아직 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지만, 그러나 폴은 ‘예전의 정부 로제(그는 그녀와 동갑 나기다)’에게로 되돌아선다.


어느 누가 이러한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줄거리를 지닌 소설의 행태에 작가의 구태의연한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의 와중에서조차 한가한 부르주아 세계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낸 사강이 부잣집 여식으로서의 유한계급의 논리를 벗어나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의 상황을 다룬 것은(『싸움에 지쳐(De guerre lasse)』, 1985와 『수채화 빛 꿈(Un songe d’aquarelle)』, 1987) 랭보의 표현을 빌건대, 그와 같은 ‘고루한 행태’는 작가의 살갗에 늘 따라붙어 다니는 부적과 같이 여겨질 정도다.


[사진] 프랑수아즈 사강의 『싸움에 지쳐』(1985)와 『수채화 빛 꿈』(1987).


“그리고 어느 날 친구 집에서 나는 내게 슬픔과 기쁨을 함께 맛보게 해준 친구의 사촌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난다.” 『슬픔이여 안녕』에 나오는 이 한 줄, 이 조잡한 단 한 줄의 문장이 얼마나 작가의 문학적 의도를 반영한 것이건 간에, 이는 터무니없는 상상에 의한 조작에 가까운 서두로서 화자가 이끌고 갈 이야기의 빈약한 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발상은 이미 폴 발레리나 앙드레 브르통이 지적한 바와 같이, “후작부인은 5시에 외출한다”라는 문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더군다나 요즘의 문학적 경향으로 비추어 볼 때, 밀란 쿤데라나 ‘빙 방 스토리(Bing Bang Story)’를 쓰던 때의 장 도르므송(Jean d’Ormesson)의 표현에 견주어 보더라도 작가의 수준마저 의심이 드는 저급한 것일 따름이다.


플로랑스 들래(Florence Delay)가 1975년 그의 소설 『안개 뿔에서 나는 아이으 아이으 소리(Le aïe aïe de la corne de brume)』라는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제목을 붙였을 때로 돌아가면,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유형의 문장과 이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제목 사이의 관계에 궁금증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플로랑스 들래가 1975년 발표한 『안개 뿔에서 나는 아이으 아이으 소리』, 갈리마르 출판사.


“그리고 그날 밤 샤를리는 아델의 몸을 찔러 박았다.” 그녀는 과연 랭보와 클레흐 에츄렐리(Claire Etcherelli : 『엘리즈와 솔직한 삶(Élise ou la vrai vie)』, 페미나 상, 1967) 이후에 ‘솔직한 삶’을 발견하였다는 이야기인가? 그녀는 정말로 우리 모두가 고대해 마지않던 새롭고도 현대적인 형태에 어울리는 진실한 형식을 그녀의 작품 속에 구현하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인가? 아니 오히려 우리는 순간적인 쾌감에 의존한 듯한 그녀의 삶과도 같은 이 짧은 문장을 두고 작가의 문체야말로 지나치게 성적인 표현을 부추기는 오르가슴의 문체에 불과하며, 또한 이러한 문장이 지닌 빈곤한 형태야말로 오늘날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대부분의 작품 구성 원리가 되어버린 지극히 초라한 작가의 시선에서 초래된 것은 아닌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클레흐 에츄렐리, 『엘리즈와 솔직한 삶』, 1967년 페미나 상 수상작.


이런 점에서 『사십 대(La Quarantaine)』(1995)에서 레옹 아르샹보와 슈래의 육체적 결합을 묘사한 제이(J). – 엠(M). 지이(G) 르 클레지오(Le Clézio)의 시는 좀 더 섬세할 필요가 있으며, “솟[구치]는 정액[의] 분출”과 같은 모호한 표현이나 이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동궤에 놓일 만한 “떨림, 죽음을 느끼는 쉬탈라의 차가운 숨결, 비 오기 전의 바람”과도 같은 표현은 보다 정치(精緻)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르 클레지오, 『사십 대』, 1995, 갈리마르 출판사.


1983년 『풍부하고도 가벼운(Riche et légère)』으로 페미나 상을 받은 플로랑스 들래는 스스로 몇 년간 이 상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나 상은 오로지 젊은 남자와의 열렬한 사랑에 빠진 한 젊은 여성의 연약함을 들려주기 위하여 후작부인의 단순 과거를 사용하였다는 점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여성-글쓰기에 대한 매력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사진] 플로랑스 들래의 『풍부하고도 가벼운』, 1983년 페미나 상 수상작.


실제로 이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들래 자신의 단순 과거로 둘러싸인 안이한 발상만이 온통 백지를 가득 채워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마저 유추될 뿐이다. 예를 들어, 기성복 판매원인 클레흐가 어떻게 해서 젊은 여성 아델 방톨리라를 만나고 있는지, 또한 모로코 계의 유태인 가정, 즉 ‘여왕’에게 있어서 철옹성과도 같은 세무서가 있는 막다른 골목길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형제들로부터 질시 어린 감호를 받고 있는 그녀를 그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고 몸을 빼앗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만을 지겹게 나열해 가고 있을 뿐이다.


주시, 연인들, 시각, 휴가, 대가 등 그 길이로 말미암아 화마저 치밀어 오르는 소설의 이야기 구조하며, 각각의 단계를 특징짓고 있는 이러한 계기들이야말로 실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인상마저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플로랑스 들래가 점잖은 사랑의 단계들을 묘사해 가고자 원하였기에 그와 같은 점잖은 중세 이야기 도식들만이 그녀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비쳤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게 만든다.


그녀는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이 소설을 쓰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크 루보(Jacques Roubaud)와 함께 원탁(la Table ronde)의 소설들을 『성배(聖杯) 극(Graal Théâtre)』(1977년 및 1981년)이란 제목으로 장면마다 각색을 시도하면서 이미 중세 이야기 구조에 도취되어 갔기 때문이다.


플로랑스 들래와 자크 루보 공저, 『성배(聖杯) 극』, 갈리마르.


그녀의 연인들에 관한 묘사(두 번째 단계)는 그렇듯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이미지들로 가득 찬 빛나는 문체를 이룩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 그는 더 이상 앞쪽을 응시하기가 어려웠다. 멀리로는 벌써 모든 것이 안갯속에 자취를 감춘 뒤였고 순결하기만 했던 살과 피의 부드러운 갑(岬)만이 솟아올라 있었다. (…) 그러나 추방당한 이의 고통은 가장 강렬한 것이었으며, 고통은 그가 자신의 피난처와 이성을 내려치는 것을 가로막고 목화와 아마의 밤에 식물의 줄기를 뻗어 올리는 고통, 그 처절한 아이으 아이으 소리만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물들여 갔다. 소스라쳐 깨어난 중에야 샤를리는 기억을 되찾았다. 스스로 파멸하지 않도록,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에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두였으며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룻배였고 안개 언덕의 주술에 찬 공허한 외침을 통해 나룻배가 밀어 올려지는 그를 부르는 바위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만이 오직 ‘후작부인’의 무미건조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가능성처럼 보인다. 레이몽 끄노(Raymond Queneau)가 그렇게도 시시콜콜 물고 늘어졌던 은유를 배가하는 방법 또한 바로 이 같은 문체 속에 함유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세의 도식은 이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철학이 여실히 증명해 준 어휘로써, 또한 가장 현대적인 문학에서의 가장 확실한 창작 방법론으로서의 해체(la déconstruction)라는 유용한 실험 무대를 거치지 않는다면, 이는 오로지 너무도 자의적인 서사적 구성이란 구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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