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67화
옹플뢰르 마을엔 ‘예쁜 언덕’이 있다. 마을주민들이 이름하여 몽 졸리, 몽(mont)은 ‘언덕’을 뜻하고 졸리(joli)는 ‘예쁘다’란 뜻이니 우리말로 하면 예쁜 언덕이 된다. 이름처럼 숨 가쁘게 오르는 언덕이 예쁘기만 하다. 우리네 동네 뒷산처럼 둥그스름한 모양새하며 호젓한 오르막길에다가 언덕 정상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까지 하니 그만한 산책로도 없다.
언덕을 향해 오르는 길은 마을에서 걸어 올라가는 가파른 경사길이 있고 차를 타고 올라가는 에두른 길도 있다. 마을 한복판에서 바로 걸어 올라가면 숨이 차기는 하지만 올라가면서 쉬엄쉬엄 마을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때건 인적조차 없는 산책로인 탓에 고적하기도 하다. 하긴 이 좁은 오르막길에 차량들이 가로막거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오르내리면 이들 말로 프로므나드(promenade)라 일컫는 ‘산책’일 리가 만무할 것이다.
산책이란 휴식과도 같은 것이어서 산봉우리를 목표로 삼고 등산을 즐기는 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상의 휴지(休止)에 조용히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걸 즐기면서 언덕을 오르는 일이 어떻게 등산의 즐거움과 비견되랴만 고독한 일상인은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일처럼 귀찮은 일도 없다. 더군다나 잠깐 마을을 스치듯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는 언덕을 오르는 일조차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고 며칠을 마을을 쏘다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모든 버거움에도 불구하고 잠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해서라도 마을 뒷산을 산책하는 일은 여행 중에 꽤 괜찮은 휴식이 된다. 더군다나 산책로에 뜻밖의 성소(聖所)를 발견한다면 그보다 더 유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쁜 언덕’ 몽 졸리를 두어 차례 오르내렸던 것 같다. 한 번은 차로, 한 번은 걸어서 올라간 기억이 선하게 떠오른다. 언덕바지에 자리한 자그마한 성당을 발견한 것도 참으로 우연한 일이다. 첫인상은 그렇듯 그저 자그마한 기도소(la chapelle) 같다는 느낌이었다.
성당을 찬찬히 둘러보니 느낌도 바뀌어 예사롭지 않다는 호기심마저 발동한다. 아득한 천 년 전의 일이다. 기록상으로 1023년 노르망디 공국을 다스리던 리샤르 2세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천신만고 끝에 뭍에 상륙한 리샤르 2세는 자신을 수호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이 바닷가 마을 언덕에 기도소를 지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은총의 성모 마리아(La chapelle Notre Dame de Grâce)> 성당이다.
기적을 체험한 공작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서였을까? 기도의 힘을 믿은 리샤르 2세로 말미암아 노르망디 공국은 이 시기에 프랑스 북서쪽을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으로 발돋움하고 기욤 볼피아노 수도원장을 통해 수도원 개혁까지 완성했음은 물론 나아가 저 멀리 비바람 몰아치는 몽생미셸 돌산에 수도원을 건설하여 21세기 오늘날에도 수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기적의 성소’를 이룩했다. 그의 혜안이 천 년을 내다본 것인가? 아니면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노르망디를 세계인의 마음속에 버킷 리스트로 자리하게 만든 것인가?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 아득한 중세에, 문맹의 시대에 그와 같은 혜안을 지녔던 것일까?
리샤르 2세는 책을 많이 읽은 인물로 옛 문헌들은 전한다. 조상이 바이킹이었지만, 기독교 문명에 흠씬 젖어든 노르망디 인으로서 필사본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그는 몽생미셸을 포함하여 노르망디 전역의 수도원들에서 양피지 수사본을 제작하게 만든 ‘문화지상주의자’였다. 전 유럽 각지로 비싼 값에 팔려 나간 이 필사본들이 수도원들의 자립갱생을 도운 경제적 원천이었음은 물론, 노르망디 공국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바탕 위에서 훗날 노르망디와 영국 땅을 동시에 지배하는 정복왕 기욤(윌리엄 1세)이 태어난다.
자그마한 기도소는 그런 역사적 사실마저 떠올려주게 만든다. 성당은 그처럼 체구는 작지만 엄청난 영성의 힘을 느끼게 해 준다. 그저 돌을 쌓아 지은 건축물로만 바라본다면 굳이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볼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문화유산에 등재된 적도 없고 이렇다 할 내세울 만한 내력도 없기 때문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동네 뒷산에 자리한 서낭당쯤 여기면 될 일이듯이 자꾸 발에 차이는 하찮은 들꽃과도 같은 운명이다.
성당 내부 역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바다에 빠져 죽은 영혼들을 위한 명패가 묘비명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내벽에는 그 이름조차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명패들이 줄지어 붙어있다. 누구는 스무 살 갓 넘긴 나이에 죽고, 누구는 삼십에, 누구는 사십 또는 오십에, 누구는 수명을 다하고 죽은 이도 있지만 아직도 바다를 떠돌고 있을 영혼을 달래주기에 이만한 성소도 없다. 바닷가 어딜 가도 이런 성소가 마련되어 있는 이유가 살아남은 자의 최소한 예의 때문일 것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이는 살아남은 가족의 아픔을 달래주기에 이만한 도상(圖像)도 없음을 실증하는 성상(聖像)이다. 의지할 데 없는 선원의 가족을 누가 돌보랴. 하지만 은총의 성모 마리아께서는 주저함 없이 이들을 돌보고 선원의 가족은 기도의 힘을 믿고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이 단순한 도상의 이해가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 때마다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낼 수도 있을 법하다.
바람이 잔잔하기를 바라지만, 바람은 잔잔하다 가도 금방 휘몰아쳐온다. 이 자연의 엄중한 변화 앞에서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고깃배에 얹혀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인생을 과연 어느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그들은 바다의 수호성인에게 물살이 잠잠해지기를 기도했고 그 기도에도 불구하고 조난을 당하기라도 할라치면 스스로의 가없는 목숨을 순순히 자연에 맡겼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절대자를 향한 믿음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왜? 이승의 삶은 끝났지만 저승의 삶이 다시 이어지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여 선원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축제가 해마다 이곳 성당에서 거행된다. <예수 승천 대축일>이 되면 주일을 맞이하여 옹플뢰르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카타리나 성당에서 ‘선원들의 축제’가 열리고, 이를 위한 특별미사가 진행되며, 마을에서 퍼레이드가 펼쳐지면서 이튿날 월요일이 되면 선원들을 상징한 모형 보트가 이곳 몽 졸리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운구된다. 이 축제를 보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옹플뢰르를 찾아오기도 한다.
성당을 나오면 그 떠들썩한 축제의 팡파르 소리마저 온데간데없다. 발걸음은 자연 바닷가 쪽을 향한다. 성당에서 얼마쯤 걸어가면 나오는 전망대가 바로 갈보리 언덕이다. 프랑스어로 Calvaire는 ‘십자고상이 서 있는 언덕’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저 ‘골고다 언덕’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 우리말로 갈보리는 프랑스어의 어원에 해당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물론 히브리어에 기원을 두고 있음은 두 말해서 뭐 하랴.
몽 졸리에서 바라보는 느낌과는 완연히 다른 갈보리 언덕 전망대는 순례자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쉼터 같은 곳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며 맨 땅을 헤집듯 걸어가는 순례자에게 이처럼 아늑한 품이 또 있으랴 싶기도 하다. 순례자에 가까운 나그네는 나날이 늘어난 여행 봇짐 같은 생각들을 시원한 바람에 날려 보내면서 세상 살 맛 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멀리 바다와 함께 바다 건너 숨 가쁘게 달려온 르 아브르마저 시야에 잡힌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아름답지만 이처럼 평안한 휴식처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의지를 불태우게 만든다.
많은 여행자들이 스스로의 영혼을 달랠 곳을 찾아 헤매는 이유도 삶에 대한 의지를 새로이 불태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반면 조용히 쉴 곳을 찾아 나선 이들도 있다. “아!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도 좋겠다”란 말이 자연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유가 그처럼 삶이 각박하기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의 삶은 항상 엄중하다.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영혼은 버림받아도 좋다. 갈보리 언덕에서 깨달은 생각 한 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