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66화
옹플뢰르하면 화가 으젠 부댕이 떠오른다. 프랑스에 처음 와서 노르망디 칼바도스 지방의 인상파 마을인 옹플뢰를 찾기 전까지는 으젠 부댕이 그렇게 대단한 화가인 줄 몰랐다. 이전의 내 취향은 서사가 담긴 정밀화에 이끌렸고 온 유럽을 뒤덮은 진정한 예술 혁명이었던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견인한 작가들의 작품에 솔직히 마음이 더 쏠렸다.
이외에도 내가 탐구할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정밀화에 더 애착이 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의 작품은 이들 역사 속의 고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유를 선명하게도 내게 일러주었고 그걸 답습하지 않고서는 예술가로서 행사할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 함께 했다는 사실까지도 추론하게 만들었다. 이름하여 아카데믹한 예술이란 것이 꼭 미술관이나 박물관 벽에 걸려있는 작품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란 점도 알게 해 준 것이다.
그마저도 와닿지 않을 때는 모처럼 찾아간 성당의 제단화에 이끌리기도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예술사가들이 이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전에 그들 역시 예술을 좋아하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예술작품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예술작품에 타당성 있는 논리를 생각해 냈고, 그에 입각한 나름대로의 주관적 해석을 가했으며, 그 의미를 더해온 것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샤를 보들레르 같은 미술비평가란 나름의 주관적 해석으로 예술작품을 평단으로 이끄는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쯤으로 정의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나는 소박한 예술 애호가일 뿐이지 예술작품에 어떠한 비평이나 나름 주관적 해석을 가할 만큼 박식하지도 않다. 직접 보지도 않은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진으로나 화집을 통해 보게 되는 작품은 진정한 작품에 대한 감상적 태도는 아니다. 미술관에 걸려있든, 시청사에 걸려있든, 교회에 걸려있든 직접 작품을 발견하고 바라보고 음미하는 관람자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예술작품은 이론적 바탕 위에 해석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고 음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편으로 예술작품은 벽걸이 용이 아니란 점도 명백하다. 작품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무 인연도 없고 외려 생뚱맞은 곳의 벽면에 걸어 놓고자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하지는 않았으리라. 예술가는 진정 자기 작품을 좋아하고 음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그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이라 짐작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술품을 사는 데 인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미술품을 사서 집안에 걸어 놓고 음미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난관에 자연 봉착할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은 미술관을 포함한 박물관들이 앞장 서서 감상자의 대리 충족을 도맡아 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에 그럴 듯한 합리화의 논리를 제공한다.
미술관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맘이 이끌리는 작품에 오래 서서 감상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작품에 눈길이 가기도 하면서 자연 그 작품이 누구 것인지, 어떤 면에서 내 잠재적인 예술작품에 대한 기호를 충족시켜 주는 지를 깨닫는 순간, “그림이 참 좋다.”란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일 게다. 나는 그 순간의 예술작품에 대한 감동과 환희를 즐기기 위해 미술관엘 간다. 교회를 찾아간다. 시청의, 법원의, 관공서 벽면에 걸려있는 작품들까지도 눈 여겨 찬찬히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져만 간다.
이 모든 감상자의 태도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것은 한 마을 전체가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광경에 몰입하는 때다. 그곳이 바로 옹플뢰르다. 물론 프로방스의 생폴이나 에즈 마을 같은 곳에서도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고흐의 마을로 일컬어지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 모두에게 알려진 아흘르에서도 똑같은 황홀경에 빠진다. 그러나 그 모든 곳보다도 옹플뢰르에서는 걸어갈 때마저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사람 사는 풍경조차도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는 이 기막힌 순간을 어떻게 글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나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옛 항구에서, 줄지어 서있는 문 연 카페 레스토랑에서, 기념품 가게에서, 술 가게에서, 초콜릿 과자 상점에서, 성당에서,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목조건물에서, 가로등에게서, 가로등에 매달려 있는 제라늄 꽃들에게서, 돌로 지은 호텔의 테라스에서, 그리고 벽난로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참나무가 피어 올리는 연기가 목조주택의 굴뚝을 타고 허공으로 퍼져 나가는 그 진한 향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모든 풍경을 다 마음에 새겨 두고자 길을 걷다가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산책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내가 머물고 있는 도시나 마을이, 내가 한없이 올려다보는 교회 천장이나 묵묵히 바라보는 제단이, 내가 앉아있거나 음식을 들거나 차를 마시는 공간이, 또한 내가 직접적으로 접하는 주민들이 무언가 내 친숙한 공간으로 전이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일테면,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행자들 가운데에서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황홀한 일몰을 완상하거나, 느릿느릿 산책을 즐기거나, 아늑한 곳에서 책을 읽거나, 조용한 곳을 찾아 음악을 감상하는 부류들도 분명 있겠지만,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서기 위해 여행지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면서 살아갈 삶의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이 소중하다 생각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여행지란 이 모두를 충족시켜 주는 힘이 있다. 그 모두를 끌어안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풍경을 제공해 주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굳이 이곳까지 찾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곳도 있다. 그곳이 바로 신도시다! 콘크리트로 무장한 도심의 폭력에 내 모든 감성이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공간이 바로 그곳이다. 인공적인 자연이라 하더라도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도시의 생김새는 어디나 똑같다.
단정적인 어투이긴 하나 전 세계 신도시는 어디나 한결같다. 그런 곳에서 살면서 그런 곳을 찬찬히 산책하는 기분은 ‘휴식’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사는 신도시를 어떡하든 탈출하고자 꿈꾼다. 그리고 내 죽음의 완성까지도 꿈꾼다. 내가 어디에 묻힐지를 고민한다. 내 영혼이 잠들 곳은 비바람 매섭게 몰아치는 바닷가이길 바라는 것이 차라리 자연에 내 영혼을 맡기리라 다짐하는 것 또한 속내에 자리한 제일 그럴듯한 바람일 것이다.
옹플뢰르는 순수한 자연으로 진입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이다. 화가 으젠 부댕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화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곳이 옹플뢰르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다.
으젠 부댕 때문에 인상파의 가장 탁월한 클로드 모네도 이곳을 찾아와서 그림을 그렸으며, 두 사람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롭게 인상주의라는 예술사조를 견인해 갔다.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으젠 부댕을 기리기 위해 미술관을 설립하고 미술관 이름도 으젠 부댕이라 이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으젠 부댕의 그림이 걸려있는 그곳을 가면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까지도 일별할 수 있는 기회도 자연 주어진다. 그림 속 풍경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도 깨달을 수 있다.
변화를 모르는, 변화하기를 싫어하는, 변화 자체를 용인하지 않는 옹플뢰르는 백년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양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목숨을 건진 중세 마을이다. 17세기 구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도망치던 신교도들의 엑소더스가 이 항구에서 펼쳐졌지만, 그러나 그 역사의 흔적조차 가물가물한 도시다.
항구는 마을이 예로부터 어촌마을임을 일러준다. 잡아온 생선을 절이기 위해 지은 거대한 소금창고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걸 입증해 준다. 역사적으로 전란을 피한 유일한 노르망디의 마을, 옹플뢰르는 주민의 태반이 어업에 종사한다. 그래서 어딜 가도 차가운 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요리한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모든 요리가 다 맛있다. 왜냐면 마을 자체가 향기롭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옛것의 아름다움과 진미와 향기를 지녔기 때문에 음식도 감탄스러운 맛을 지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도시를 지금 산책하고 있다. 으젠 부댕의 거리, 바닷가, 어항, 백사장, 등대를 돌아서 요트가 정박해 있는 구 항구로 돌아오면 한 나절이 숨 가쁘게 흘러간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고자 인상파 화가들이 드나들었던 호텔 생 시메옹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모여 술 마시고 떠들며 각자의 예술혼을 쏟아내던 광경마저도 아련히 떠오른다.
늘 배 고팠던 모네와 늘 혁명을 꿈꾸던 쿠르베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늘 없는 이들을 화폭에 담고자 열망했던 까유보트, 심지어 고향 네덜란드를 떠나 정처 없이 프랑스를 떠돌며 그림을 그렸던 종킨드의 심정이 마치 내가 처한 상황이듯 겹쳐지기까지 한다.
대체 예술이 뭐 길래 그들은 뿌연 안갯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바닷가에서, 폭설이 쏟아지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진입로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대서양 부둣가에서 홀로 그림을 그렸을까? 그려야만 했을까?
으젠 부댕은 그런 의문에 답을 준다. 그 답이 뭘까 되짚어보는 순간 그들의 그림들이 내게 비로소 말을 건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풍경화란 기실 수수할 정도로 겸손한 화가가 바라본 진실한 세상"일 지도 모른다. 21세기인 지금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림 속 풍경은 다시 봐도 실감 날 뿐인 풍경화의 영원성을 되새겨 준다. 그게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 창조해 낸 세상이다. 풍경이다!
나는 오늘도 꽤 긴 산책을 마쳤다. 걷는 일처럼 흥분되는 일도 없다. 걷고 또 걸으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만 아니라 생각을 떠도는 그림 속 풍경을 함께 거닌다.
또 하루가 저물었다. 해가 지면서 짙은 노을을 테라스에 흩뿌리는 시각에 인생의 저묾도 저와 같으리라 마음이 먼저 수긍한다. 아름답다. 해서는 안 될 말을 다시 찾은 옹플뢰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서 되뇐다. 이 모든 것이 으젠 부댕 때문이고 에릭 사티의 음악 때문이고 모네가 그린 예술가들의 아지트 겨울 풍경 덕분이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이 참다운 여행에 항상 동반해준 아내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