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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페렉의 유희

프랑스 문학의 오늘 34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조르주 페렉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은 언어의 실험을 통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론에 입각해 글쓰기를 일종의 유희로 생각하며 글을 쓴 작가다. 생전에 발표한 두 권의 소설 사이에서 그의 문학적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는데, 『사물들(Les Choses)』(르노도 상, 1965)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La Vie mode d’emploi)』(메디시스 상, 1978)는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여주기에 충분했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글쓰기의 유희가 파도를 치는 두 작품들을 발표한 시기 사이에 또한 주목할 만한 두 작품이 함께 놓이는데, 『사물들』로부터 출발한 페렉의 글쓰기 유희는 클로드 뷔흐쥴랭(Claude Burgelin)이 “잘난 체하는 어릿광대 짓”이라 평한 『마음 깊숙한 곳에 크롬 핸들을 한 작은 자전거는 어떤 자전거인가?(Quel petit vélo à guide chromé au fond de la cœur?)』(1968)을 거쳐 “기교와 낱말 가로지르기 방법에 관한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낱말 맞추기(Mots croisés)』(1978)로 이어지고 있다.


조르주 페렉의 소설 『낱말 맞추기』와 『마음 깊숙한 곳에 크롬 핸들을 한 작은 자전거는 어떤 자전거인가?』.


우리는 이제까지 자크 루보(Jacques Roubaud)를 가리켜 시인으로 기억해 온 반면 페렉을 우리포(OuLiPo)의 산문작가(le prosateur)쯤으로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단정은 자크 루보와 조르주 페렉 간에 존재할 수도 있는 공모 관계(서로 다른 장르에 스며드는 작품의 유연성)를 간과한 데서 따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사진 한 장이 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는데, 사진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두 사람 모두 동시 유희(jeu de go ; 서로 교차하는 어느 한 낱말과 다른 한 낱말로 글을 짓기 위한 하나의 예)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크 루보(왼쪽 인물)와 조르주 페렉(가운데 인물).


그들은 『실종(La Disparition)』(1969)에서 존재가 부재함을 상징하는 이(e)라는 글자에 관해 어느 한 낱말과 또 다른 한 낱말을 이용해 언어의 유희를 감행하고 있는데, 페렉이 『유령들(Les Revenentes ; 페렉의 신조어. 중간의 철자가 a가 아닌 e임에 유의)』(1972)에서 괴상한 형태로 부활시킨 이(e)가 그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며, 루보의 첫 번째 시집 『이(ε)』(1967) 제목으로 사용된 이(E) 또한 그로써 발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르주 페렉의 소설 『실종』(1969)과 『유령들』(1972).


루보는 랭보가 그리스 자모의 마지막 글자인 오메가를 이용한 것처럼 그리스 자모의 다섯 번째 글자(epsilon)인 이(e)를 이용함은 물론, 그 자신 수학자로서 0에 대한 기발한 착상을 응용해 이(e)를 사용한 것인데, 0이 지닌 완전한 몸체를 향해 진행하는 이(e)의 질량으로서의 불완전한 실체에 대한 표지가 바로 그가 사용한 문자 이(ε)였던 것이다.


‘실종’은 페렉의 소설 『실종』을 위한 루보의 권두 시 제목이다. 우리는 여기서 1977년에 발표한 루보의 『자서전 제10장(Autobiographie chapitre X)』을 재차 관류하는 오르페와 유리디스의 신화와 결합한 『유령들』과 같이 ‘élégie(연가)’란 단어 속에 이(e)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어렴풋이 서 있는 그녀의 유리디스 쪽으로 되돌아선다.

[...] 부드러운

그렇게 진한 푸른빛이 쏟아지며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물속에 다시 한번 벌거벗은

벌거벗은 그대 모습 비추는 아 우리들 과수원의 투명한 유리디스.”


“et chacun de nous se retourne vers son Eurydice de fumée

[...] douce

eurydice transparente de nos vergers où tant d’azur pleut

ah montre toi une fois encore nue nue dans l’herbe étouffée”


자크 루보, 『자서전 제10장』, 갈리마르.


그러나 페렉의 유희가 단지 알파벳 유희 수준에 머문 것에 불과하며, 또한 『알파벳(Alphabets)』에 속한 것일 뿐이라고 그의 글쓰기를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비록 그가 1976년에 펴낸 시집 『알파벳(Alphabets)』에서 176편의 파격적인 이형 문법을 보여주는 11행시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조르주 페렉, 『알파벳』


페렉의 작품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이(e) 역시 파리의 만보객(漫步客)이며 『아멘(Amen)』(1968)과 『고칠 수 없는(L’incorrigible)』(1995)의 시인인 자크 레다(Jacques Réda)의 시편들 속에 등장하는 무성의 이(e)에 가깝다고 보기도 어렵다.


자크 레다의 시집 『아멘』(1968)과 『고칠 수 없는』(1995).


자크 레다는 오히려 프랑스어의 ‘고유한 특성의 탁월함’을 발견(『파리의 폐허(Les Ruines de Paris)』, 1977)한 시인이었으며, 이미 그가 공공연히 주장해 온 바를 1978년에 펴낸 『알렉상드렝이란 폐시(La Vieillesse d’Alexandre)』란 저술 속에서 선명히 밝히기까지 한 이제야말로 자신이 실종된 주제를 다뤄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던 시인이었다.


자크 레다의 시집 『파리의 폐허』(1977)와 『알렉상드렝이란 폐시』(1978).


“무성의 이(e)에다가 성(性)을 나타내는 표식을 붙여 ‘여성의 이(e)’라 이름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수사학자들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와 같이, 언어의 음율학과의 본질적인 유대 관계에 입각한 언어의 독자성에 비춰볼 때, ‘여성의 이(e)’라 이름 한 무성의 이(e)는 시구에 있어서 운율/리듬이라는 서로 상반된 모순의 무게를 실제적으로 혼자 잘도 견디어왔다. 여기 음율학 상으로 불멸의 저작임을 증거해 주는 시가 어떻게 와해되었는지를 소개하면 (…),


(…) 이러한 운율상의 모순에 적대적인 용어들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한, 씌어진 것조차 『실종』이 알레고리로 표현한 것처럼 조르주 페렉의 소설의 불안정한 기묘함을 그대로 주조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e)라는 철자 없이 씌어진 텍스트에서 우리가 그걸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조차 우리가 모르는 채라면, 그것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전적인 무지일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단절된 지표 위에 세워진 언어는 점점 이(e)의 모든 음향을 재 건립하는 주요 수단일 수 있지만, 무성의 이(e)는 ‘알렉상드렝 소설’의 최후의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비록 페렉이 자신의 소설을 통하여 실종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가 잊지 않은 것 속에 우리가 모든 소멸을 언급하지 않은 채로 오로지 그의 텍스트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또 한차례의 소멸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고 밖에는 달리 볼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이미 전쟁 때 과부가 된 그의 모친의 실종은 1943년 1월 17일 독일군에 의한 체포 구금이 한창이던 드랑시와 아우슈비츠 사이에서 발생하였는데, 포로 수용소에의 감금과 집단 수용소에로의 강제 수용은 그러나 비록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근거로 미공개의 문건 하나를 검토해 볼 수가 있다. 즉, 재향군인회에서 발행한 문건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출생 시의 이름이 시롤라 스쥴르비츠인 페렉 부인의 <실종 증명서>에 해당하는 이 낯선 문건의 첫머리에는 그녀의 실종 시기가 1947년 8월 19일로 명시되어 있다.


유태계 폴란드인이었던 이 젊은 여인은 그녀의 고향으로 곧바로 후송되었지만, 페렉이 일종의 공간으로서 다른 처소라 명명했던 곳으로 그녀는 아름답고도 행복하게 사라진 셈이다. 반면 당시에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던 그녀의 아이는 숙모 에스데에 의해 알프스 근처의 빌라르-드-랑스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E)를 위해’ 씌어진 『더블유(W) 또는 유년의 기억(W ou le souvenir d'enfance)』(1975)은 그와 같은 기억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해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의 모친의 실종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증언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불가능성은 글을 쓰고자(e) 한 계획이 더블유(W) 계획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조르주 페렉의 소설 『더블유(W) 또는 유년의 기억』(1975)


다시 말해, 에스데의 이(e)나 아유슈비츠(Auschwitz)의 더블유(w ; 비록 『실종』의 첫째 쪽에 명시된 것이 드랑시(Drancy)라 할지라도), 또한 스쥴르비츠(Szulewicz)의 더블유(w) 등,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지명들이 정확하게 기술된 것만 봐도 이(e)의 글쓰기가 더블유(w)에 대한 글쓰기로 전환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페렉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부모에 대한 일반적인 기억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즉, 어린 조르주에게 있어서 두 사람의 실종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1940년 뱅센느에서 살해된 이지 페레츠는 페렉을 가리키며, 휴전 다음날에 우연히 폭발한 포탄의 파편에 사망한 시롤라 스쥴르비츠는 이른바 슈오아의 희생자인 세실이라 불리던 그 이름이다.


페렉은 자신이 ‘오이디푸스나 거세에 관한 아름다운 반향들’과는 또 달리 추구해야 할 대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프로이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Sur un souvenir d’enfance de Léonard de Vinci)』 또는 『시와 진실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관하여(Un souvenir d’enfance de 「Poésie et vérité」)』에서 기술한 것을 정반대로 시도하고자 했다.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


“나는 절대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운을 뗀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가고 있다. “글쓰기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는 말의 최후 반영과도 같은 내 추억의 되씹기에는 그들의 침묵과 나의 암묵에 대한 씻지 못할 부끄러움만이 존재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게 이야기할 그 무엇도 없음을 일부러 밝히기 위해 글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함께 공존했던 이유에 대해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며, 내가 그들 가운데 존재했던, 그들의 그림자 속에 하나의 그림자로, 그들의 육체 바로 곁에 또 하나의 육체로 존재했던 이유만이 오직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쓴다. 그들이 내 자체를 그들의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여기는 까닭으로 말미암아, 또한 그 흔적이야말로 내게 있어서 바로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기억은 글쓰기 속에서 사라진 채이지만, 글쓰기 자체가 그들의 실종에 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 내 삶에 대한 긍정으로 자리 잡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블유(W) 또는 유년의 기억』은 하나의 유희로써 시도되고 있는 것은 물론,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에서 뒤라스가 시도했던 언어유희와 아주 흡사한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렉은 두 기술체를 하나는 이탤릭체로 다른 하나는 로마체로 번갈아 가며 기술하였는데, 완전히 가공된 가스파르 빈클러(Gaspard Winckler)와 관계하고 있는 전자의 기술체에서 우리는 에이치(H)를 향해 더블유(W) 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브이(V) 마을의 티이(T) 교육센터를 지나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페렉의 언어유희는 뒤라스의 언어유희 연장선상에 놓이는 또 다른 형태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페렉의 기술체에서 에이치(H)는 랭보의 수수께끼임은 물론(『채색 문자들(Illuminations)』에서의 에이치(H)를 상상해 보라), 공포(Horreur)와 수치(Honte) 그리고 역사(Histoire)의 에이치(H)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에이치(H)는 작가인 페렉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의 커다란 도끼(Hache)와 함께 하는 이야기(Histoire)"로서의 에이치(H)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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