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37화
[대문 사진] 디디에 까앙, 『폴 셀랑을 읽다』.
셀랑의 시가 비록 이목을 끌기에 충분치 못하다고는 하나, 오늘날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펼치고 있는 많은 프랑스 시인들에게 그의 시가 매혹적인 것으로 비쳤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그의 시가 오늘날 씌어지고 있는 프랑스 시에 있어서 매혹적인 것으로 자리하게 된 데에는 그의 처절했던 삶과 함께 시에 대한 증언을 비롯하여, 독일어로 씌어진 시를 프랑스어로 탁월하게 옮긴 번역의 효과임은 물론, 셀랑이 결국 프랑스 동료 시인들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경쟁심리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셀랑의 시는 일정한 거리를 지닌 것이면서도 정신의 심층부를 뒤흔드는 불안 요소들을 정신적 동요와 함께 그 자체를 시로써 치환시켰던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이를 증언해 주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역시 오늘의 프랑스 시에 있어서 셀랑의 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가장 먼저 언급한 이브 본느파(Yves Bonnefoy)일 것이다.
본느파는 셀랑이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인 1950년경부터 셀랑을 본격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본느파는 희미하게나마 셀랑과 우정의 관계를 유지해 가다가 1970년 우연히 지나가다 들른 투르(Tours)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프랑스 중서부 루아르 강가에 위치한 투르라는 도시는 본느파에게 있어서 1938년부터 1939년까지 고등학교를 다니던 곳이었으며, 셀랑에게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처음 프랑스에 와서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 같은 학교를 다니며 교유했던 듯하나 1970년에 이루어진 두 사람의 재회는 너무도 뜻밖의 것인 동시에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는 망연한 것이기도 했다. 셀랑은 결국 1970년 4월, 세느 강의 차디찬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셀랑이 그처럼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시와 그 자신이 처한 유형(流刑)의 상황 […] 어휘들과 어휘들에 잇닿아 있는 정황이 그에게 요구했던 삶과는 다른, 정반대의 삶을 향해 뛰어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느파는 1972년 쥬네브에서 간행한 상당히 주목을 요하는 책 한 장을 「셀랑의 장」이란 제목을 붙이면서 그 맨 첫머리에다가 사라진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듯 적어가고 있다.
이 독특한 산문집은 『적운(赤雲, Le Nuage rouge)』(1977, 1982)이란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재 간행되었는데, 그러나 산문집 속에서 프랑스 시인은 망명자(프랑스에 단지 체류하고 있을 뿐인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태생)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적 상황(야수와도 같은 나치의 잔혹성을 온몸으로 체험한 그로서는 당연히 이들과 같은 언어로 글을 써야만 한다는 작가라는 점에 대해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엄중한 상황)을, 또한 가계의 성씨를 버리고 가명을 써야만 하는 상황으로의 이행(셀랑의 이름은 원래 독일식 표기에 따른 안첼(Antschel)이었다), 그리고 말과 말이 지칭하는 사물 간에는 경계가 존재한다는 셀랑의 상황적 인식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본느파에게 있어서 쉬볼렛은 말라르메의 표명과도 같이 단지 “음향의 공허란 효과를 노린 부질없는 언어의 정지 현상”이었을 뿐이다. 이 점은 페렉 역시 『알파벳』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정지, 전혀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와 같은 시적 기교는 뻔뻔스럽게도 /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음향의 공허(곰 같은 미련함으로 객설을 이어나가다 / 실패에 이르고 마는……)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본느파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셀랑은 “실재하는 그 어느 것도 절대 안에서 지시물과도 같이 가치를 지닌 [말의] 흐름[에] 적절히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던 시인이었다.
『익명의 장미(La rose de personne)』 가운데 한 편의 시를 통하여 셀랑은 시에서 섬광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이 만돌라(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그리스도를 둘러싼 후광을 가리키는 라틴어)의 어휘를 탐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후광에 둘러싸인 어휘는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Das Nichts)이었다.
폴 셀랑은 시를 계속 써 나감으로써 결국 그에게 있어 모든 시가 열망하는 바를 발견하기 위해 죽었다.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그럼으로써 긴 문장과 그렇듯 긴 문장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존재 간의 연합이었던 것이다.
- 이브 본느파, 『적운』, 메르뀌르 드 프랑스, 1992, 325쪽.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분명해 보이는 것은 말라르메를 추구했던 셀랑의 시적 인식과도 같이 본느파 역시 1947년에 발표한 『반 플라톤(Anti-Platon)』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듯이, 자신만의 독특한 고유 관념을 표명해 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본느파는 어휘에 있어서의 불가피한 초월과 크라틸리즘(cratylisme : 플라톤의 『대화』에 나오는 ‘사물에 대한 자연 본위의 지칭’을 지지하는 태도)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와 반대로 시적인 연설을 통한 의혹 등을 문제 삼아 왔던 것이며, 결국 사물에 주어지는 개념의 단순한 지칭이 아닌 현존의 의미(le sens d’une présence)로 나아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