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디오르 기념관

몽생미셸 가는 길 262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그랑빌의 크리스티앙 디오르 기념관, © 오래된 타자기



한때 초현실주의와 입체파의 그림에, 나아가 인상주의에 푹 빠져있던 젊은이가 태어난 바닷가의 집 정원은 품이 널찍할 뿐 아니라 키 큰 레바논 삼나무들로 말미암아 풍요로운 느낌마저 든다.


기념관 정문 © 오래된 타자기
Photo 030.jpg 앞쪽에서 바라본 기념관 입구 © 오래된 타자기
Photo 034.jpg 뒤뜰에서 바라본 기념관 © 오래된 타자기


정원 한쪽에는 또다시 작은 정원이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52살의 나이에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죽은 한 남자의 초상을 담은 조각상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기념관 뒤뜰 정원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션 디자이너를 추모하는 조각상이 있다. © 오래된 타자기


저택은 19세기 건축의 기품과 우아함만이 아니라 남자가 평생 매달린 ‘사치스러운 여성성의 자태’까지도 은닉한 듯하다.


© 오래된 타자기



크리스티앙 디오르
Christian Dior
1905-1957



나는 사실 이 인물을 잘 알지 못했다. 프랑스의 퇴폐적인 패션 디자이너쯤으로 알고 있었던 게 전부였다. 꼬꼬 샤넬과 같이 한 세기를 주름잡은 패션 디자이너, 그러나 그는 내가 그에 대해 지닌 편견과는 아주 다르게 오히려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혹여 내가 그랑빌이란 곳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난 디오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기념관 번지를 새긴 문패. © 오래된 타자기


디오르가 만든 옷처럼 기품 있고 우아한 주택과 정원. © 오래된 타자기


디오르는 젊은 시절 예술가의 삶을 꿈꿨다. 툴루즈 로트레크나 폴 세잔이나 에두아르 마네와 같이 부모로부터 이른바 ‘권력과 명예를 통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자라기를 요구당한 불행한 천재.


그랑빌의 갑부 집 둘째 아들이었던 디오르는 그러나 부모의 바람대로 정치외교학과를 지망한 순수한 젊은이였다. 다만 대학 때와는 달리 순수 조형예술가의 꿈을 버릴 수 없어 대학 졸업 후에 친구와 갤러리를 차리고 당대 전위적인 작품들을 주로 기획 전시하는 큐레이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정원에서 내려다본 바다. © 오래된 타자기


그는 예술을 꿈꾸었지만, 아트 앤 머니(Art & Money)를 꿈궜던, 변기 세척제 제조 상인의 아들이었다. 예술도 돈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순수 조형미술보다는 패션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만들었다. 세척액으로 돈을 번 부모의 장사꾼 기질이 발동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생각한 아트는 비즈니스와 다름 아니었다.


갤러리를 운영하다 실패한 젊은이는 급기야 패션으로 눈을 돌린다. 양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조차 럭셔리 여성 패션을 지향했던 그의 비즈니스 감각은 꼬꼬 샤넬처럼 대성공을 거둔다. 프랑스가 늘 목말라한 최상의 유행을 성공시킨 배경에는 부유한 집안의 몰락과 전후의 참담한 빈곤 상황도 한몫했다.


기념관 뒤쪽에 자리한 정원에서 바라본 텅 빈 바다. © 오래된 타자기


어렸을 적 노르망디 해안의 장터에서 만난 손금쟁이한테 들었던 운명과도 같은 자신의 사주(四柱), ‘평생 여자들로 인해 부자가 될 팔자’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은 젊은 남자의 도발적인 망상은 그럼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 오래된 타자기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던 누이동생 카트린느와 함께 승산 없는 전쟁에 뛰어든 디오르는 모아둔 돈을 다 털어 그랑빌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저항 세력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대는 일에 매진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에게 수여된 레종 도뇌르 훈장은 이 독특한 애국활동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었다.


기념관 뒤뜰에 활짝 핀 장미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아내. © 오래된 타자기


그랑빌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태인 가족들을 가슴 아파하며 디오르는 자신이 소장한 미술품들을 다 처분하여 돈을 모아 그랑빌 무장저항세력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독일군과 대항해 싸울 수 있는 무기들을 구입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누이동생인 카트린느 디오르, 여성 잡지 <엘(Elle)>에서 인용.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누이를 위해서는 ‘미스 디오르’라는 향수를 개발했다. 디오르가 최초로 개발한 향수였다.



미스 디오르 향수


한 저널리스트가 평한 뉴룩(New look)은 디오르의 패션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아포리즘이다. 그는 살아생전 패션에 미친 사람처럼 오직 패션만을 위해 산 인물이다. 이브 생로랑이 그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이브 생로랑.


짧은 생애에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는 아이러니하게도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토스카나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홀연히 세상을 떠난 그의 장례식에는 세계 각지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이 다 모여들었다. 쉰두 살의 나이였다. 아직도 창창한 나이였음에도 패션계의 이단아란 이름만 남긴 채 쓸쓸히 세상을 등졌다.


그랑빌 시당국은 그의 생가를 개축하여 크리스티앙 디오르 기념관으로 꾸몄다. 주홍빛 페인트칠을 한 이 독특한 기념관은 대서양가 한적한 단애 끝에 자리하고 있다. 정원 한 구석 의아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조각상은 그가 평생 궁구했을 “패션이란 과연 뭘까?”라는 잠언을 떠올리게까지 만든다.


정원에 세워진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 조각상. © 오래된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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