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테스, 텍스트극으로의 복귀 2

프랑스 문학의 오늘 58화

by 오래된 타자기


콜테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극의 ‘삼일치에 관한 규칙을 재발견하기’에까지 이르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브왈로라는 고전주의 작가를 재조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기보다는 이와는 다른 이유가 게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콜테스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비약을 통해 도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연극에 있어 거의 강압적으로 계산된 시간은 단조로운 흐름으로 극 전편에 걸쳐 지속되고 있으며,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한결같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무대장치를 바꾼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콜테스가 새로이 고전주의의 속박에 스스로 갇혔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또한 임의적인 강요라 할 수 있는 극의 삼일치로 나아갔다고는 볼 수 없다. 단지 “오늘날 다른 각도에서 이를 성취할 의미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연극과 영화를 구별하게 해 주는 요소이다. 왜냐면 “연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시간과 공간을 적절히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와 소설은 또 다른 세계로 유영하지만 극은 우리 모두의 무게로 지상을 짓누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콜테스의 극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생각은 어떤 계산된 의도를 포함한 주장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거꾸로 돌아가자는 것(rétro)’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콜테스의 극은 랭보가 견자의 둘째 서한에서 시를 요구했던 것처럼 ‘전취하려는(en avant)’ 욕구로 풀이하는 것이 온당하다.


실존적 삶, 그것은 단지 도덕적인 삶만이 아니다. 안으로부터 분출하는 요구는 이처럼 ‘참된 삶’에 대한 욕구로 나아갔다. 또한 그러한 요구는 『지옥에서의 한 철』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부재하는’ 어떤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채색문자들』에서와 같이 개조하고자 하는 그 무엇에 대한 요구로 자연히 이어진 것이다.


아르튀르 랭보, 『채색문자들(Illuminations)』과 『지옥에서의 한 철(Une saison en enfer)』.


장 니콜라 아르튀는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이 발발한 1870년 여름, 프랑스 군대가 완전히 궤멸할 때까지 샤를르빌 중학교의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로베르토 쥬꼬는 기억하기를 “함께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나중에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했던 말수가 적고 눈에 띄지 않는 모범생”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무슈(Monsieur)와의 대화).


그러나 그는 랭보처럼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기를 바라며(퓌트와 발레즈와의 대화), 삶의 시작부터 가민느 앞에서 비밀경찰이 되었다고 떠벌리기까지 한다. “경찰, 그것도 비밀경찰이 되고, 여행하고,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무기까지 지니게 되고” 바로 이것이 새로 시작된 삶이었던 것이다. 이 무기가 어떻게 랭보가 아비시니아(Abyssinie ;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에서 메네릭크 왕에게 팔려했던 그 구식 총하고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랭보는 ‘금수의 행복’을 자청했던 것이며, 유충의 결백과 두더지 잠, 어린아이의 숙취를 동경해 마지않았던 것이고 “각자에게 그만큼 다른 삶이 있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지옥에서의 한 철』의 「망상(Délire) II – 어휘의 연금술」). 쥬꼬는 더욱 불행해지기 위하여 개로 다시 태어날 것을 열망하기까지 한다. 그는 “개와 괄태충과 풍뎅이의 불멸”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콜테스는 알랭 프리끄와의 대담을 통하여 그 자신 연극을 “문제를 제기하는 장소, 다시 말해 비록 회전 무대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항상 문제의 해결이 주어진다 해도, 또한 고전주의 극에서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단지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연극은 참된 삶은 아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람의 페달을 밟고 있는 인간, 그러나 ‘떠날 줄을 모르는’ 그는 ‘살인자들의 시대’를 열어젖히려고 애쓰고 있다. 이 기계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다시 이야기하자면 모범생인 쥬꼬는 스스로 죽기를 원치 않는 살인자이다.


콜테스는 이처럼 “미리 구조를 설정했기에 창고에 쌓아두게 [될] 것은 예상치도 못한 채, 지붕에까지 기초공사를 마무리하는 꼴을 당하게 되는” 헛간(un hangar)과도 같은 극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콜테스 극에 있어서 이러한 초보적 구조는 텅 빈 구조임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왜냐면 이는 단지 극의 형식에 대비를 통한 구조만을 적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가장 날카로운 대비는 다름 아닌 모순어법(l’oxymoron)이었다.


콜테스의 극 『로베르토 쥬꼬(Roberto Zucco)』는 바로 그와 같은 모순어법의 시험장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왜 아프리카에 가는지 그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단지 눈을 보기 위한 것일 뿐이다(가민느와의 대화). 또한 쥴리오라 불리는 베를린 사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쥴리오는 가민느를 신문하는 형사로 등장한다). 가민느는 때 이르게 사랑을 하게 되지만(이로 말미암아 그녀는 장 아누이의 주변 인물들을 실토하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언니와의 대화). 쥬꼬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형사 그리고 어린애마저 살해한다. 그렇지만 그는 태양의 아들이기에 무죄다.


이러한 살인극은 어떤 내적 욕구에 의한 것이며, 그의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욕구는 그를 가둬놓았던 감옥으로부터 – 또한 모든 형태의 미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행동으로 발산된 것이다 이 미궁은 끝내는 살인범을 찾겠다는 전단과 함께 그의 몽타주가 덕지덕지 붙은 지하철로 제시되며, 노인네 무슈 역시 매일 도망칠 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못한 채 단지 그에게 익숙한 통로만을 되풀이하여 오가는 ‘투명한 통과’를 꿈꾸는 미로인데, 또한 이 미로는 “방향조차 알 수 없는, 터널들만이 길게 뻗어 있는 어둠침침한 세계”이어서 길을 잃고 마는 그런 공간으로 제시된다(IV. 지하철).


극의 마지막 장면, 거대한 그림과 함께 하는 로베르토의 최후를 그린 XI. 태양을 향한 쥬꼬는 완벽하게 이카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있는 정오, ‘태양을 향해’ 그는 죽어라 도망친다. 이른바 정원들이라 여겨지는 비존재의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이것은 바로 살해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이다). 그는 떨어져 나갈 것이고, 그는 추락한다. 그의 상승과 추락을 이루는 극적인 계기들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또박또박 전해주는 동안 “태양은 솟아올라 빛나면서 찬연히 타오른다.” 그러고 나서 “마치 원자폭탄의 섬광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 같은 강렬함 속에 막이 내려진다(배우에게 주는 작가의 주지 사항(didascalies)).


이러한 극적인 진행은 『로베르토 쥬꼬』에서 보듯이 극의 텍스트가 신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나 또한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시적인 구성으로 구조화되었을 때 훨씬 현저해진다. 콜테스는 이러한 점을 이미 자각하고 있었는 듯하다. 왜냐하면 『로베르토 쥬꼬』의 넷째 장의 겉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있음 직하기 않은 사건의 연속, 신화적인 인물, 삼손이나 골리앗 같은 영웅, 돌멩이나 혹은 여자에 의해 마침내 쓰러지는 엄청난 힘을 지닌 괴물.”


그러나 그 무엇에 의해서도 쥬꼬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는 오직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갈 뿐이다. 그 모든 것에도 쓰러지지 않던 그가 태양의 전지전능함에 무너져 내린다면, 이는 말라르메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바 있는 막스 뮐러(Max Müler) 학파의 이론에 따를 것 같으면, 모든 신화에 내포되어 있는 태양의 전지전능함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콜테스가 드라마틱한 텍스트의 제명을 위해 파리 시가 소장하고 있는 위대한 마법의 파피루스의 한 부분이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이 생애 최후의 인터뷰였던 비비시(BBC)와의 대담에서 밝힌 페르시아 태양신인 미트라(Mithra)의 제식에 사용되는 기도문의 일절을 차용한 데에서 분명해진다.


“두 번째 기도 후에 너는 햇살을 펼치는 태양의 회전판을 보게 될 것이며, 그 회전판에 매달린 바람의 근원, 남근(男根)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얼굴을 동쪽으로 돌린다면 그것 역시 동쪽을 향하여 방향을 틀 것이며, 네가 서쪽으로 얼굴을 돌린다면, 그것 역시 너를 따라 서쪽으로 돌아설 것이다.”


콜테스의 극 『로베르토 쥬꼬(Roberto Zucco)』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