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테스, 텍스트극으로의 복귀 4

프랑스 문학의 오늘 60화

by 오래된 타자기


15개로 나누어진 극적인 시퀀스의 각 장면들은 15개의 간결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마치 알반 베르그(Alban Berg(1885-1935) ; 오페라 『보첵과 루루(Wozzcek et Lulu)』를 작곡한 오스트리아 음악가)에 의해 재음미되는 게오르그 뷔흐너(Georg Büchner)의 『보첵(Wozzcek)』을 연상케 해준다.


게오르그 뷔흐너(Georg Büchner)의 『보첵(Wozzcek)』


그러나 보첵을 쥬꼬로 부르는 것은 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한 세대인 것처럼, 콜테스가 베케트를 거쳐 극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이름이 그의 선배이기도 한 한 위대한 극작가의 이름을 통해 불리고 있으며, 또한 이 공통의 케이(K)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으나 어떤 징벌에 처한 카프카의 경우처럼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치 않은 어떤 흐릿한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작가들의 공통된 표징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오르그 뷔흐너(Georg Büchner)의 『보첵(Wozzcek)』의 한 장면.


콜테스의 극으로 돌아가면, 고대 비극에서 혹은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따온 것 같은 단조로운 도식은 1953년에 발표된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를 수용하게 된 작가에 의해 순환하는 형태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극은 쥬꼬의 탈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는 탈출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극중 한 장면.


이카로스의 추락은 다시 닫히는 원을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따라서 극은 오직 등장인물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 언뜻 보기에는 격렬한 말들이 오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침묵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단지 호명하거나 때로는 호명에 대꾸하는 것 같은 말들만 오갈 뿐이다.


어머니의 역할 가운데 비유적이고도 감각적인 표현의 과도한 사용은(그녀를 위해서라면 로베르토는 선로를 벗어난 기차이며, 계곡 밑으로 굴러떨어져 곧 산산이 부서지고 찌그러질 자동차가 될 것이다) 쥬꼬 자신의 역할 속에서 독특하게 제한되고 있다. 쥬꼬의 역할로 볼 때, 이 태양의 죽음은 간결한 표현에 다름없는 절제된 표현으로 말미암아 창조적 은유(태양은 성을 가진다)와 또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목소리 : 그는 미쳤어.

한 목소리 : 그는 추락할 거야.

[…]

한 목소리(외치듯) : 그가 떨어진다.


텍스트 상에서 강조하고 있는 휴지통의 모티프는 극 전체에 등장하고 있다. 『놀이의 끝(Fin de partie)』으로부터 차용해 온 것 같은 이 휴지통은 넬이나 나그처럼 단음절로 되어있음은 물론 다른 어휘들과 똑같이 축약을 강요당하는 개체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놀이의 끝(Fin de partie)』 한 장면.


확실히 쥬꼬는 “휴지통에 완전히 구겨 박[힌]” 것 이상으로 “골방 구석에 처박혀 몸을 오그라뜨리고” 있는 신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쥬꼬는 아마도 빌어먹을 인간인지도 모른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한 목소리는 들려준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는 지붕 위로 기어올라가서는 당신의 아가리에 처박힌다.” 만일 그가 영웅이 아니라면 그는 아마도 코뿔소일 것이다(“나는 코뿔소다”라고 그는 이오네스코에게 은밀한 눈짓을 보내면서 이야기한다).


이오네스코(Ionesco), <코뿔소(Rhinocéros)>, 홀리오 문고판 및 코뿔소 삽화.


그러나 이보다 오히려 우리는 랭보의 그 찬탄할 만한 표현을 다시 취하기 위하여 “태양과 함께 가자”고 외치는 절규와 함께 종교에 등을 돌리고 바로 이 지상이 영원임을 강조하면서 그 안에 안주하자고 한 절규를 상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영원은, 지상은 열려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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