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62화
문학 비평가들과 문학 이론가들에게도 위기는 항상 열린 채 상존하고 있다. “온갖 이론들이 난무하는 문학 비평가들과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문학의 모든 영역에 대해” 장-마리 쉐페르(Jean-Marie Schaeffer)는 그의 탁월한 저서 『문학 장르란 무엇인가(Qu’est-ce qu’un genre littéraire)?』(1989)에서 기술하고 있기를, “장르론이야말로 온갖 설이 난무하는 가장 혼란스러운 분야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장-마리 쉐페르는 같은 책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구별적 개념들을 꼭 문학 작품이라는 복합적인 정보 전달 행위의 다섯 양상에 결부시키기 위해 너무도 명백한 이질적 개념을 차용하거나 그와 같은 개념에 종속시키는 행위를 중지해야 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들을 엄밀하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개념들이나 한정적 용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각종 문학 이론서들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비록 서서히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문학 장르에 관한 범주가 재차 정비되어 간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물론 지난 20년간의 작업을 일별해 볼 때, 이전에 활발히 논의되던 장르에 관한 문제로 다시 복귀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말이다.
대학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장르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일례를 들면, 다니엘 마들레나(Daniel Madelénat)의 『서사시(L’Épopée)』나 알랭 몽탕동(Alain Montandon)의 『간결한 형식들(Les Formes brèves)』이 그에 해당한다.
도미니크 꽁브(Dominique Combe)는 치밀한 에세이 『시와 기술체 - 장르의 수사학(Poésie et récit – une rhétorique des genres)』(1989)에서 시로서의 기술체에 대해 말라르메와 싸르트르가 선고한 바 있는 저주와 비난을 다시 문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는 물론이고 소설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한 기술체로 회귀하고 있음을 입증해 보인다.
드니 로슈(Denis Roche)의 『이야기 총서(Récit complets)』(1963)나 장 대브(Jean Daive)의 『간파되지 않는 1, 2 시리즈(1, 2, de la série non aperçue)』(1976), 또는 『문학의 주위(Autour de la littérature) III』(1984)에서 「루지고뉴(Rougigogne : ‘붉은색을 띤’이란 뜻을 지닌 루지(rougi)와 부르고뉴(Bourgogne)에서 gogne만을 다로 떼어 서로 조합한 합성어 )」를 평하기도 했던 쟘므 사크레(James Sacré) 등은 도미니크 꽁브로 하여금 의미심장하면서도 다양한 실험들을 하게끔 해주었다.
다음 두 준거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선구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과 「가짜 돈(La Fause monnaie)」이 지닌 독특한 양상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분석에 따르면, 화자(話者)의 친구가 거지에게 준 가짜 동전의 양면적인 속성과 역설적인 기능은 “기술체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기술체에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산문시는 회의적이고도 역설적이며, 비결정적인 특성으로 규정된다(자크 데리다의 『시간 부여하기(Donner le temps) I - 가짜 돈(La Fausse monnaie)』, 1991).
이와 비견되는 20세기의 또 다른 작가는 프랑시스 퐁쥬(Francis Ponge)라 할 수 있는데, 이 주목을 요하는 작가는 말라르메 사후에 태어나 1974년 텔켈(Tel Quel) 파가 해체될 때까지 이를 이끌던 장본인이었다.
싸르트르를 비롯하여 솔레르스와 텔켈주의자들로부터 찬양과 칭송을 한몸에 받은 퐁쥬는 1988년 죽는 날까지 이들의 선봉에 섰을 뿐 아니라 “사물의 밀도가 지닌 한 원천 속에 어휘의 의미론적인 밀도가 지닌 무한한 표현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믿은 시인이기도 했다. 사물의 어휘에 다가간 이 텔켈주의자는 객관화된 ‘대상(objet)’에서 ‘대상기쁨(objoie)’에로의 ‘대상유희(objeu)’를 통한 시적 실험을 감행했다.
퐁쥬가 보여준 이 새로운 형태는 서정적인 것인가? 아니면 서술체에 의한 것인가? 산문인가? 시인가? 퐁쥬는 자신의 시집 『산문시(Poèmes)』 속의 시들을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산문시(Poèmes)’(서막을 가리키는 수사학 상의 용어)란 용어를 과감하게 채택했는데, 이 ‘산문시’란 용어는 산문시(poèmes en prose)란 어휘보다는 오히려 산문-시(proses-poèmes)에 가까운 용어이기도 했다. 이제는 한물 간 예전의 형식이 되어버린 이러한 시도는 『전집(Le Grand Recueil)』(1961)과 『새 시집(Le Nouveau Recueil)』(1967)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림에서와 같이 내 더 이상 즐길 수 없도록 가깝게 위치한 것으로부터
조각들이나 건축물들에서처럼 또한 너무나 가깝게 자리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음식물들처럼 진짜 소화불량에 걸린 느낌으로 내 무릎에까지 닿아있는 사물들의 실재로부터
그리하여 확 뚫린 굴뚝 저 꼭대기에 걸려 있는 푸른 하늘로 말미암아 마침내 내 온몸에 밀려들어
머리로 빠져나가는 것에 이르기까지
- 「풍경(Paysage)」에서
말라르메는 ‘질적인 전체’를 대신하여 책에 대해, 다시 말해 데리다가 말라르메에게서 본래의 문맥과는 다르게 취한 ‘산포(le dissémination)’와는 전혀 다른 위대한 책에 마침내 이르게 되기를 원하였다.
장-피에르 리샤르(Jean-Pierre Richard)는 『말라르메의 상상적 우주(L’univers imaginaire de Mallarmé)』(1961)에서 이를 탁월하게 해명하기를, “의미의 산포와는 정반대로 행복한 어휘는(말라르메에게 있어서) 아주 명확한 돋을새김을 한 진실로 자리 잡아갈 것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장르들 - 다소 퇴화했거나, 동강난 채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것들과 잡다하게 섞여있거나, 혼합된 형태들 -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면, 전통이 장르들을 고착시키지 않는 한, 현대 작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책을 완성하고자 고심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피에르 빌브로(Pierre Vilbreau)의 책(1985) 제목이기도 한 『나는 책을 탐구한다(Je cherche un livre)』는 책 더미 속에 파묻혀 버린,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작품에의 탐구라는 차원에서 상징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 된다.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짧고도 리듬감 넘치는 문장들, 허구의 배경을 이루는 이탈리아, 그 속에서 전개되는 어떤 이야기의 개연성과 함께 오랫동안 책을 출판할 수 없었던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이 마침내 무언가를 해방시킨다는 점을 깨닫기까지 한 것이다.
“책을 탐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르 몽드> 지에서 조시안느 사비노(Josyane Savigneau)가 던진 물음은 바로 이러한 추구를 의미한 말이기도 했다.
“책을 탐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작가인가? 화자인가? 아니면 삼자 모두인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 셋 가운데 둘은 어느 순간 책을 발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왜냐면 글은 곧 끝날 것이고, 누가 글을 쓴 것이며, 누가 글을 읽었는지가 곧 판명 날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글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인 그는 잃어버린 텍스트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구가 너무 일찍 끝나버리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그가 이미 옛날에 글을 읽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단지 시작했을 뿐이거나, 대충 훑어보았거나, 대강 살펴보았다는 사실은 누가 알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서로 단절된 10개의 서두로 구성된 아름다운 소설 『만일 한 겨울밤의 여행객이라면(Si par une nuit d’hiver un voyageur)』의 이탈로 깔비노(Italo Calvino)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성 역시 가능하다. 안될 것은 없다. 모든 가능성은 열린 채이기 때문이다. 아라공의 마지막 선택은 『왜 나는 글 쓰는 방식과 책의 서두에 쓸 말들을 전혀 몰랐을까(Pourquoi je n’ai jamais appris à écrire, ou les incipit)?』(1970)였다. 하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나는 책을 탐구한다’가 훨씬 더 프루스트적인 방법론에 가깝다. 잊힌 것에 대한 암중모색으로부터 뒤늦게 발견한 책, 되찾은, 재발견한 책을 향한 탐구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