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63화
[대문 사진] 샤를 보들레르
디디에 드꼬엥(Didier Decoin)이나 르네 빅토르 필레스(René-Victor Pilhes)는 서로 다른 장르를 한데 혼합한 양식을 추구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인물들이다. 이 두 사람은 소설에 있어서 쇠락과 파탄이라는 속성을 띤 퇴폐적 분위기가 기능할 수 있는 역할을 충분히 인식한 소설가이자 단편 작가로서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된다”는 문명 세계의 이미지를 치열하게 그려낸 작가들에 속한다.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된다”란 표현은 위이스망스(Huysmans)의 작품을 관류하는 투사(透寫) 개념으로서 마리 클레흐 방꺄흐(Marie-Claire Bancquart)와 피에르 꺄네(Pierre Cahné)는 공저 『20세기 문학(Littérature du xxesiécle)』(1992, 프랑스 대학 출판사)에서 이에 대한 문맥을 탁월하게 짚어내고 있다.
『브루클린의 아브라함(Abraham de Brooklyn)』(1972)에서부터 이미 디디에 드꼬엥은 도시 소설 작가로서의 면모와 함께 성서 속의 거대한 신화들을 소설 속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현란하고도 기교적인 솜씨를 한껏 발휘했다.
1977년 공쿠르 상을 수상한 『지옥에서의 존(John l’Enfer)』은 온통 세상의 종말을 암시하는 표지들로 가득 찬 맘모스 도시의 실상을 과감 없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돌의 반점은 집들과 가구들을 갉아먹으며, 주인 잃은 개들은 길거리와 대학 캠퍼스 안을 우르르 몰려다닌다. 마천루의 유리창닦이로 고용된 인디언 출신의 존은 특전을 부여받은 감시자이긴 하지만 직업훈련을 받는 중에 자신이 거대한 뱀이 된 것을 알자마자 악의 화신과 마주하게 된다.
에드가 포우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위셔의 별장을 연상시키듯 르네-빅토르 필레스(René-Victor Pilhes)의 소설 『저주하는 사람(L’Imprécateur)』에 등장하는 다국적 가구들은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진다.
「목요일에 발생한 사건(L’Événement du jeudi)」의 기둥들에서는 제롬 가르쌩(Jérôme Garcin)은 역시 르네 빅토르 필레스의 소설 『폼페이(La Pompéi)』(1985)를 암시한 바 있는데, 같은 작가의 『폼페이』는 “스탕달의 거울처럼 이 시대의 종말을 정치하게 묘사해 간 가공스러운 공포소설”의 한 전형에 해당한다. 이 거울은 경기병들의 거울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세기말’을 다룬 이 선전 포스터는 바로 책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세기말
세기말, 이는 장-에데른 알리에르(Jean-Edern Hallier)가 1980년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 제목을 위해 레옹 블롸(Léon Bloy)의 소설에서 따온 것인데, 20세기 말 역시 19세기 말과 똑같은 현상을 띠어간다는 점에서, 또한 새 시대의 도래 역시 같은 출발선상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극명하게 조명하기 위한 19세기 말의 현상축을 설정하기 위한 의도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장면은 더 이상 데 제쌩뜨로부터 퐁트네 오 로즈에 이르는 데베나 몽테스키외 백작의 파리는 아니다. 소설의 장면은 바로 이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설의 도입 부분에서 방콕 공항을 이륙하여 화자인 “국제연합 기구 가운데 보건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조직”인 유니세프 사무총장 헨리 콜러를 따라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일랜드를 향해 날아간다.
퇴폐문학(la littérature décadente)은 확실히 동양적인 신기루를 배제하지 않았다. 1901년에 발표된 장 로랭(Jean Lorrain)의 『포카스의 신사(Monsieur de Phocas)』를 연상해 보자.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장-에데른 알리에르의 소설에서 극동이란 영역에서 한층 그 영역이 넓어진 동양은 동서양을 오가는 사람들로 연일 혼잡을 이루는 방콕이란 한 도시에서 출발하여 보트-피플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시각적으로 포착한 실상이었으며, 또한 절대 유일한 빛들로부터 가려질 수 없었던 음지의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화자인 피에르 할슈엥이 오리엔탈이라는 이름의 아주 유명한 방콕의 한 고급 호텔에서 콜러를 만나고 있을 때, 공항에서는 아주 끔찍하고도 참혹한 비행기 사고가 막 발생한 탓으로 사고를 우연히 접한 그는 증인이 되기에 이른다. 사고는 샤농으로부터 날아온 듯한, 의심할 것도 없이 아편을 싣고 온 디시(DC) 10 비행기가 유럽을 향해 막 날아르던 보잉 747기를 들이받은 사고였다. 이 보잉 747기에는 공산치하를 피해 도망쳐 온 300여 명의 베트남인들과 라오스, 캄보디아인들이 타고 있었다.
게다가 콜러는 이 ‘거대한 자유란 이름의 점보제트기’와 자유를 위해 탈출해 온 피난민들이 화염 속에 사라져 가는 것을 전혀 애통해 하지 않는 분위기다. “수많은 인명이 한 줌 재로 스러져 가는 중에 선택된 몇 명만이 행복하게도 서양이란 천국으로 곧바로 날아가는” 해프닝을 바라보며 즐기는 화자의 파렴치한 견유주의에 이르지 않더라도 반숙한 계란 가운데 흰자만 골라 먹는 탐욕스러운 인간은 그것이 바로 세상의 법칙이고 질서이며,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가운데 죽을 목숨들을 골라내는 일을 맡은, 보편적인 인간을 처치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조정위원들”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기아로 굶어 죽어 가는, 서로를 죽이며 간혹 소위 아시아 인민들을 구제했다는 장본인들이 단지 몇 명밖에 안 되는 특권 계층을 살해하는 이 지역의 인민들은 이른바 1945년부터 지구촌을 엄습했던 인간 살육의 전쟁으로부터, 또한 공공연히 자행되는 인간 제거의 공포로부터조차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한 인민들이었다.
아시아인들
‘아시아인들’, 콜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가장 뿌리 깊은 인종들이며, 비 오듯 쏟아지는 폭탄의 폭우 속이거나, 마치 둑이 터져 강물이 범람하듯 걷잡을 수 없이 온 도시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는 전쟁의 홍수 속에서도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분출하는 화산의 마그마와도 같이 지구 곳곳으로 몰려가 터를 잡고 살아가는 그 어떠한 척박한 대지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가장 끈질긴 생명을 지닌 인간들”이었던 셈이다.
할슈엥은 국내 학회와 국제 학회 모두에 환심을 사려고 아시아 인민들을 향해 이렇듯 사려 깊은 주시를 던진 것은 아니다. 한 세기 동안 고고학과 종교 비교사를 가르치던 르낭이 그러했듯이, 보수적인 꼴레쥬 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선전구호만 요란할 뿐인, 게다가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에게 억만장자의 삶으로 이끈다고 유혹하는 무능한 세계 보건복지기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들에게 던져지는 조소를 피하기는 어려울 따름이다.
‘약의 시대’는 인도주의의 4반세기이어야만 할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선심을 자극하여 아낌없는 선량을 베풀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에게 무질서와 굶주림과 전쟁과 파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에데른 알리에르의 소설이 아무리 뒤집기를 시도한다 할지라도, 또한 마찬가지로 공화국 대통령의 휴양지에서 지지해 마지않던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을 이제는 작가 스스로가 거꾸로 반대하고 나선다 할지라도, 이러한 논리는 단지 작가가 노린 의도적인 계산일 따름이다.
장-에데른 알리에르는 소설 『세기말(Fin de siècle)』에서 우리를 “선이란 지옥으로의 추락”으로 이끌고자 했으며, 셀린느의 수법에서 엿볼 수 있듯이, 가시적인 여러 양상들을 다루고자 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로 들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시험 삼아 보트-피플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빛의 섬’으로의 여행이라든가, 이른바 ‘피의 뱃놀이’나 ‘자선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간 사냥’ 등을 수반한 크메르 루즈가 지배하는 인도차이나로의 항해에 귀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헨리 콜러의 조언을 맡은 리자 드 살라브뢰에게 있다. 그녀는 소설에서 1968년 5월 소르본느 대학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서서 어린 시절 그녀가 겪은 추악한 교육의 병폐를 폭로하면서 이를 쇄신하고자 데모대를 이끌던 젊은 프랑스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마리 데레사 이후로 노벨 평화상을 탈만한 인물로 손꼽힐 만큼 용감한 행동으로 국제적인 시선을 한몸에 받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육체에 대한 광기에 사로잡힌 여성이었을 따름이다.
그녀의 욕정에 불을 지핀 피에르 할슈엥은 마치 탐욕 그 끝으로의 여행을 즐기듯 그녀와 함께 지칠 줄 모르는 음란한 행위를 일삼으면서 자신의 음탕하고도 저질적인 호색 취미를 한껏 과시하기에 이른다. 결국 암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신음하는 리자는 모든 통상 치료를 거부한 채, 이른바 보건위생에 적극적인 한 열성분자의 새롭고도 낯선 치료로 말미암아 더욱 병이 악화되기에 이르러 아일랜드에 위치한 유니세프 소유의 호화주택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이 호화주택은 콜러가 부른 할슈엥과 죽어가는 리자가 재회하는 공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콜러와 새로운 인물로 등장하는 샥따스, 그리고 할슈엥과 역시 새로운 인물인 오브리 신부 - 혹은 이미 등장했던 인물이거나, 또 다른 르네에 해당하는 -를 둘러싼 리자의 죽음은 일종의 아딸라의 죽음을 새롭게 각색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결국 죽음이 소설의 결말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과장된 엄숙함이야말로 진부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 빈축을 사기에 충분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장 에데른 알리에르의 소설은 할슈엥이 브르통과 같이 작가 스스로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샤토브리앙의 인물 동일시와 같은 관점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100살에 가까운 죽음으로서 생을 다하는 것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신부가 사는 뵈지트 저택은 또 다른 꽁부르그(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공간)로 존재한다.
화강암 벽을 좀먹고 있는 레프라(문둥병)는 리자의 몸에 엄습하는 악(악)처럼 자연적인 것이다. 알리에르는 바로 이 부분에서 소설이 지닌 여러 특징 가운데(예를 들어 서로 쌍을 이루는 모티프와도 같은) 허구적인 유약함 즉, 허구의 가벼움을 드러내고 말았다.
유년의 피에르 할슈엥은 부친의 유품 가운데 벌거벗은 몸을 한 여자 사진을 보고는 충격을 받게 된다. 엘리자베스라 불린 이 여자는 결혼하자마자 1년 뒤에 숨을 거둔 아버지의 첫 번째 아내였던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할슈엥은 알몸의 진속 주인공이 자신의 진짜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신경질적으로 그를 대하는 성미 까다로운 마들렌느와는 달리), 밤마다 이루어지는 몽설과 브르타뉴 지방의 광야를 정처 없이 헤매는 몽상 가운데에서 미친 듯이 매달리는 광기 어린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실피드, 환각 그러나 살갗에 대한 환각 증세는 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자와 중첩되며, 소설 속의 화자이기도 한 할슈엥은 게다가 그가 방금 전까지 감행한 열정적이고도 실감 어린 모험이 더 낳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허구의 가벼움들은 글쓰기의 가벼움을 더욱 중첩적으로 드러내 줄 뿐이다. 그의 소설이 지닌 이러한 유형의 가벼움은 또한 작가인 장-에데른 알리에르로 하여금 세기말을 적절히 묘파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문체로서 작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서로 번갈아 가며 갈마짓기한 듯한 구성하며, 트리스탄이나 오르페에서 차용한 듯한 모티프들에 의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나, 마치 이것저것을 옮겨다 놓은 듯한 경박한 이야기투가 주는 피곤함 말고도 판에 박힌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잡스러운 글투는 글쓴이가 비록 재치 있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하여금 퇴폐의 부조리함을 현대적인 차원에서 올곧게 전달하는데 실패했음을 한눈에 입증해 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세기말,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단지 장-에데른 알리에르만을 위한 어떤 추측, 어떤 가벼움, 어떤 글쓰기의 수단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 역시 도달한 지점은 자신의 소설을 통하여 세기말의 분위기를 다룬 뒤에야 모면케 되는 시대적 주류를 탄 ‘악착같은 면모’나 ‘사물의 평탄한 면만을 조응한’ 천박함에 대한 질시로부터의 도피는 아니었을까?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 일찍이 물러나 있는 듯한” 작가의 태도에서 더욱 그러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누가, 어떤 소설가가 그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을 다뤘다고? 그것은 단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다음날이면 제풀에 꺾여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는 거짓말쟁이나 신문기자들이나 할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판에 박힌 글투나 진부한 표현들은 책의 곳곳에서 되살아나 또 다른 진부함으로 책의 이곳저곳을 더럽혀 놓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휠더린은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비탄의 순간들(dürftige Zeit)’이라고?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세계에 처한 시적 상황을 가리켜 본느파가 행한 성찰은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세기말, 이 순간은 바로 “두 시기가, 두 문화가, 두 종교가 서로 중첩한” 시대를 가리키며, “모든 세대가 삶의 두 시기와 두 양식 사이에서 꼭 끼인 상태로 질식할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음으로 해서 모든 자발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모든 윤리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모든 영혼의 순수한 상태마저 상실해 버린” 시대일 뿐이다.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이 세기말의 시간들은 “새로움은 존재하지도 않고 구식의 것조차 더는 존재하지 않는” 순간일뿐더러, 무엇을 생산한다는 차원을 떠나 단지 그 어떤 이상(理想)을 망연히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기다림의 순간일 뿐이라는 점이다.
책은 바로 미학적 실패로 말미암아 고도(Godot)가 그러했던 것처럼 허무한 그 무엇을 망연히 기다리는 그러한 기다림을 단지 증언해 주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장-에데른 알리에르는 불행하게도 이 기다림조차 의도하지 못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