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64화
[대문 사진] 르 클레지오
“도망치다. 저 멀리로 달아나다.” 그렇듯 울려 퍼지는 수병(水兵)의 노래는 권태와 이국취미에 찌든 말라르메가 꿈꿨던 탈출구였으며, 로티의 꿈의 피난처였고, 세갈랭이 꿈꾸던 안식처였다. 이러한 절규는 또한 퇴폐적인 감정의 여지 속에 자리 잡은 것이기도 했다.
도망치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같은 후렴구는 1969년에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Marie Gustav Le Clézio)라는 젊은 작가가 펴낸 『도주의 책(Le Livre des fuites)』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20세기 말의 문학에도 재등장하기는 마찬가지다.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가 평단의 관심을 끈 것은 1963년에 출간한 『언어 소송(Le Procès Verbal)』 덕분이었는데, 이 책은 알베르 카뮈를 연상시킬 만큼 카뮈에게서 받은 영향이 책 전체에 걸쳐 현저하게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아당 폴로는 또 다른 뫼르소(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에 해당할 만큼 두 인물이 서로 닮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책은 마치 미치광이를 연상케 하는 경찰과 정신분석가의해 끈질기고도 집요한 물음들이 되풀이되는 언어 소송이며, 세상에 대한 소송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도저히 양도할 수 없는 삶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고장들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르 클레지오는 확실히 자신의 소설 첫 번째 주인공으로 작가 자신을 등장시키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작품에서 보이는 르 클레지오만의 독특한 공간 이동은 파나마와 멕시코를 향한 상상 또는 육체의 패주 속에 자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르 클레지오는 “나는 인디언이다”라고 1975년에 쓴 『아이(Haï)』에서 토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독특한 문학적 여정은 그를 다시 누르가 ‘푸른 인간들’의 거대한 메시지에 접하는 사막으로 향하게 만든다.
가난, 자유 그리고 신앙을 표현한 1980년 작 『사막(Désert)』. 이러한 새로운 이상은 르 클레지오가 1967년에 펴낸 에세이집 제목을 빌자면 『물질적 법열(L’Extase matérielle)』에 해당한다.
J. M. G. 르 클레지오의 운명은 선조들이 18세기에 브르타뉴 지방에서 모리스 섬으로 이주해 갔듯이 여행자의 숙명을 띤 것이었다. 1995년에 발표한 소설 『사십 대(La Quarantaine)』에는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는 몇몇 증거들마저 제시되고 있다. 『도주의 책』에는 ‘여행의 책’이란 부제가 붙으리만치 작가 자신이 시간이 주는 권태로운 추악함과 일정한 거리를 띄우기 위해 공간 속에 스스로 몸을 은폐하고 있기까지 하다.
책 속에 다른 글귀도 아닌 여행자 마르코 폴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명구처럼 새겨져 있다는 점은 바로 그와 같은 작가의 의중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자 이 아름다운 도시는 내버려두고 앞으로 전진하자.“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뽈로에서 폴로로의 이행이다. 다시 말해 여행에 사로잡힌 자로서 말이다.
『도주의 책』의 주제는 제4장 표지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여행 소설의 주제로서 적당한 표지를 장식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J. H. H. 젊은 남자 오강(Jeune Homme Hogan) 29세, 랑송(베트남) 출생, 영원한 도피를 뜻하는 세계 이곳저곳으로의 산책을 즐김.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캘리포니아와 멕시코를 거쳐 뉴욕에서 몬트리올과 토론토로, 그는 삼라만상들과 괴물 같은 도시들, 고속도로들과 사막들, 산들과 항구들, 그리고 바글거리는 인간들이 습한 대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고 있는 풍경들을 마치 엑스(X) 선 찍듯 세밀히 그려간다.
이러한 수법이 현대 문학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기정 사실인 것처럼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양 기술해 가는 이야기체 형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기술체를 허구가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생동감을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처럼 르 클레지오는 여행의 글쓰기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며, 이를 반증하듯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이 자연스레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더구나 작가 자신의 나이에 걸맞게 『도주의 책』은 작가가 태어난 해인 1969년과 같은 해에 시작하고 있다.
소설 첫부분에 등장하는 인물은 젊은이는 아니지만, 그의 나이에 걸맞은 여러 가능한 사실들을 추측하는 어린 소년이 등장한다. 국제공항의 대기실에서 호기심에 찬 표정을 지닌 어린아이는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발생 가능한 일들을 떠올린다.
갑자기 날아오르던 비행기가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비행기는 “저만큼에서 몇 초 동안 검붉고도 황금빛으로 번쩍이다가 조용히 사그라지는 불꽃으로 흔들리면서 이내 수많은 검은 점들 가운데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소설 속에서조차 정체를 은닉하고자 숨겼던 소설 속의 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소설 속에서 소설적 표현이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가?
능란한 기교가 그 자체로 결점으로 작용하는, 더군다나 극단적인 문명의 단층으로부터 주어지는 시는 언제든지 정반대의 논리로 회귀해 간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많은 현대 작가들처럼 르 클레지오 역시 랭보의 초상과 ‘바람의 바닥창을 한 인간’으로 불렸던 베를렌의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이렇듯 작가의 초상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소설 『사십 대』는 인간 아덴과 아라의 이야기에 집안의 내력을 가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쉬르야바티와의 ‘야만적인’ 사랑에 너무도 잘 알려진 전설을 가미함으로써 다른 작품들 가운데에 단연 돋보이는 그만의 야심작이 되었다.
여행객들이 나이 사십을 맞는 인도양의 한 작은 섬 좁은 공간에서 ‘지칠 줄 모르는 여행에 빠진 한 사내’는 랭보가 그러했듯이 ‘영원’을 찾아 나선다. “아난타, 아난타, 오! 영원이여!” 이처럼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름은 다름 아닌 쉬르야였으며, 랭보는 그의 간결한 그러나 결코 빈약하지 않은 시를 통해 그렇듯 외쳤다.
르 클레지오는 1978년에 펴낸 『몬도와 또 다른 이야기들(Mondo et autres histoires)』을 거쳐 1995년에 발표한 이 꽤 긴 소설에 이르기까지 그가 획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공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경탄할 만한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찬 이 1978년의 작품에서 “바다를 전혀 본 적이 없는 자”,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소멸이란 이야기 속의 다니엘은 바다 즉, 원소를 향한 탈출을 위한 행복의 정상에 위치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세계의 퇴폐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단지 모리스 섬이나 일본으로의 도피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러한 형태의 이야기는 거의 전지구상에서 되풀이되고 있을 만큼 보편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세상 속의 세상을 결코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듯 알리에르의 『세기말』은 이러한 점을 완벽히 설명해 준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벨기에 출신의 작가 갸스똥 꽁뻬흐(Gaston Compère)가 쓴 『로빈슨(Robinson) 86』(1986)은 이러한 유형의 소설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예에 속한다.
페렉(Perec)은 이와는 정반대로 선회했는데, 이야기 틀은 로빈슨 크루소에서 빌려왔지만, 두려운 기억으로의 방향 선회를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나치 독일 즉, 더블유(W) 섬으로의 여행을 다룬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20세기 말을 살고 있는 로빈슨 추종자들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인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