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65화
[대문 사진] 미셸 뚜흐니에, 르 피가로(Le Figaro) 지
미셸 뚜흐니에(Michel Tournier)의 소설 『방드레디, 태평양의 변방(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에서 우리는 또 다른 탁월한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작품이 1967년에 간행된 성인을 위한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위한 작품은 4년 후인 1971년에 『방드레디, 야수의 거친 삶(Vendredi ou la vie sauvage)』으로 출간되었다.
소설가는 『방드레디 태평양의 변방』을 1971년에 펴낸 『마왕(Le Roi des aulnes)』과 같은 시기에 구상하였는데,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는 사자, 식인귀 아벨 티포쥬가 스스로 성에 찰 때까지 괴링과 히틀러의 독일에서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기이한 우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니엘 드 푀(Daniel de Foe)의 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방드레디는 15살이다. 로빈슨 이후의 성공작 『쥐디(Jeudi)』(1967년 판)이나 『디망슈(Dimanche)』(1971년 판)은 단지 12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다니엘 드 푀는 1985년에 발표한 『황금 물방울(La Goutte d’or)』의 주인공 이드리스에서 보듯, 독자들은 여전히 북아프리카의 한 시골에 사는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을 통해 뚜흐니에의 이상적 독자들로 자리 잡아간 듯하다.
식인귀와 같이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뚜흐니에는 그러나 글쓰기를 통하여 어른에 대한 집요한 탐구 또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내용, 같은 형태의 글쓰기를 통한 모작의 단계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1759년 9월 30일 <버지니아 호>를 타고 항해하다가 배가 파도에 난파당하자 데리고 있던 강아지 텐과 함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로빈슨은 있는 힘을 다해 황량함이란 섬 기슭을 향해 헤엄쳐 가는데, 이때 그는 스페란자란 이름을 지니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작과 함께 이에 대한 패러디도 뚜흐니에의 어른 세계에 대한 집요한 관찰을 보여주는 한 예에 속한다. 로빈슨에 의해 개척된 섬은 다른 하나의 거대한 대영제국이라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만일 로빈슨이 문명의 재창조라는 노력에 어떤 결실을 맺었다 할지라도, 또한 그 어떠한 혹독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아주 견고하고도 훌륭한 세계를 재구축 했다 할지라도 로빈슨은 자신의 모험적 창조와 더불어 이에 대해 금방 싫증과 권태를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모든 인공적이고도 외적인 노력, 다시 말해 금방 와해될 수 있지만 세계를 개선코자 하는 열광적인 시도는 다름 아닌 훨씬 더 생존력이 강한 신인류를 구현하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리병 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병 속에서 다시 꺼내어져 정확하게 되돌려진 로빈슨의 시대는 우리에게 아주 낯선 운명의 장난, 혹은 정상적인 것에서 일탈한 파격쯤으로 여겨진다. 정지된 물시계, 그리고 조난을 당해 표류하는 인간 모두는 그의 아늑한 동굴 깊숙이 은거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 동굴은 어떠한 곳인가? 동굴은 바로 자신의 고유한 신체가 만들어 낸 입방미터의 벌집 모양을 한 폐 조직에 해당하며, 이른바 ‘채식주의자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생활 수단 이외에는 가능치 않은 작은 골짜기에 해당하는데, 이곳에서 그는 꽃들과 어우러진 무릉도원과도 같은 삶의 계기와 맞닥뜨려지는 것이다. 꽃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조우, 이후에 씌어진 패러디나 모작을 언급하지 않아도 젊은 여인들이라 할 수 있는 어린 꽃들과 함께 하는 삶은 바로 프루스트의 꽃들로 피어난 젊은 여인들에게 되돌려진 삶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셸 뚜흐니에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유혹은 이야기를 두 배로 부풀리거나 같은 줄거리를 지닌 내용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속임수는 소설의 내용이 풍부해지면 풍부해질수록 더욱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다. 시적으로나 자의적으로 보아도 미셸 뚜흐니에가 빠져든 세계는 범성주의(汎性主義, pansexualisme)의 세계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로빈슨은 대지와의 사랑에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로빈슨이 행하는 매장의 제식은 대지를 끌어안으려는 몸짓이다), 방드레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신하기까지 한다.
자신을 제식의 희생물로 삼으려는 위협으로부터 공포를 느낀 젊은 칠레 중부지역 출신인 젊은 남자는 로빈슨에 의해 구출되기에 이르는데, 그는 자신에게 엄격한 규제가 가해지기를 원하지만, 간혹 자신의 절대 권력자로부터, 또한 분홍빛 작은 골짜기 속에서 자신을 깜짝 놀래킨 사건으로부터 도망쳐 나오고야 만다.
이 푸른빛 사랑이 감도는 은밀한 곳에서는 한창 작고도 검은 두 엉덩이가 들썩이고 있다. 이렇듯 이들에게서 서로 대립하는 사랑의 경쟁은 대지를 둘러싼 경쟁이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한 쌍을 이룬 경쟁 관계를 낳았으며, 뚜흐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성(Les Météores)』(1975)을 통하여 태어날 때부터 커플로 태어난 장과 폴이란 두 인물에게서 벌어지는 사랑의 경쟁 관계로 발전시켜 나간다.
뚜흐니에는 확실히 식물의 성징(性徵)으로부터 쌍둥이의 성징에 이르기까지 또한 역시 식물의 성징으로부터 동성애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생한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의 이행을 의도했음이 틀림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뚜흐니에는 자신이 구상한 대로 하나의 이야기에서 이와는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소설의 추이 속에서 단지 어떤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수단으로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을 중단하는 식으로까지 태도를 돌변한다.
이러한 유혹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 성적인 그 어떤 유혹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의 성적인 본능에 관련하여” 로빈슨은 언급하기를 “나는 단 한 번도 방드레디가 나로 하여금 남색에 눈 뜨게 해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 성욕은 이미 초보적인 상태로 되돌아간 상태였으며, 또한 스페란자를 향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드레디는 로빈슨을 야수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물시계가 멈춤으로 인해 방드레디는 자신의 지배자의 비밀에 충격을 받기까지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방드레디가 뒤바뀌는 식의 전복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듯 두 인물에 의해 발생하게 된 소란 법석이나, 약간은 이론적인 틀을 갖춘 부연 설명과 함께 뚜흐니에의 소설은 약간은 무미건조하고도 지루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설가를 유혹하는 또 다른 유혹에 작가 자신마저 빠져들고 만다는 점이다. 이 다른 유혹은 다름 아닌 철학에의 유혹이다.
소설가가 철학도였다는 점 말고도 『방드레디』를 평한 최초의 평자가 다름 아닌 『의미 논리(Logique du sens)』(1971)를 쓴 저자이자 이 시대의 철학을 이끌고 있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질 들뢰즈는 『의미 논리』에서 자신의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이원성과 함께 이원론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야만의 삶,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태양의 아들 상태에 이르자마자 로빈슨이 발견했던 것은 또 하나의 섬이었는데, 로빈슨은 스페란자의 등 뒤에 펼쳐진 섬을 제시하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각의 물질 원소는 두 개씩이다. 불, 물, 하늘, 존재 형상들도 역시 이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절대 권력을 지닌 로빈슨은 야만인이었으며, 방드레디는 바로 로빈슨의 모습을 한 그와는 다른 또 다른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점으로 말미암아 인물의 이중성의 문제는 일찍이 싸르트르가 표명한 바 있는 타자(autrui)의 문제로 귀결한다.
타자란 타인을 가리킨다.
내가 아닌 나인 것이다.
- 장 폴 싸르트르(Jean-Paul Sartre)
싸르트르가 주도한 실존철학에 입각한 고전적 명제는 여기에서 새롭게 부각되며, 로빈슨(또는 뚜흐니에)은 이 경우에 교사로서 정확한 형태들이나 어원들과는 동떨어진 이질적인 형태들이나 사실에 근접한 어원들을 배가시키기에 이른다.
존재하지 않는 바를 주장한다.
존재하기 위한 역설로써.
- 미셸 뚜흐니에(Michel Tournier)
섬 기슭으로 밀려온 <하얀 새>의 선원들이 등장할 때는 실망스럽기도 하다가 태양의 방드레디가 등장할 때는 흥분마저 이는 뚜흐니에의 소설 끝부분에서 로빈슨이 타인들과 조우하는 장면은 꾸밈없는 인간애의 감동마저 불러일으킨다. 방드레디가 도망치자마자 로빈슨은 바다를 표류하던 어린 자앙이 방드레디 대신 자신 앞에 출현했음을 깨닫기까지 하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해 던져진 물음처럼 이 소설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은 “과연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섬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상황론에 근거한 문제 제기라 할 수 있다. 방드레디는 하나의 표상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타인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출발 즉, 다른 세계로의 이행의 필요성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가? 로빈슨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 그는 단지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내에 머무는 위험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 밖 어느 곳으로든지’의 도피는 단지 그 자신과 함께 할 뿐인 세계 내 존재에의 수단일 뿐이다.
르 클레지오가 그러했듯이, 뚜흐니에가 꿈꾼 육체적이고도 물질적인 법열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시준한 바 있는 거울이란 무대로의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만이 존재하는 섬에서 로빈슨은 스스로에 의해 기록되는 ‘항해일지’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위험에 이미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에 온전히 마비된 상태와 흡사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진창 속에) 빠져들고 만 탓으로 짐승처럼 울부짖는 파멸의 구덩이 속에 갇힌, 반쯤은 뿌리 뽑힌 인간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보다 신성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따른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정신세계 속에 진입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글쓰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은 그 자체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표현대로라면 주인공은 어떤 상관관계 - 타자를 위한 글쓰기 –에 따른 글쓰기의 행동을 시준해 주어야 하는데, 주인공은 단지 부조리한 시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태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의 로빈슨은 더 이상 그와 같은 글쓰기를 지속하지 못한다.
뚜흐니에는 나이 마흔셋에 이 처녀작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뒤늦게 창작의 길에 들어선 작가는 어른과 아이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벌써 작가 자신을 위한 글쓰기에 몰입했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첫 소설이 나오기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타인(他者)를 위한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며, 또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오늘날 잘 읽히는 책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그 나름의 글쓰기의 비법, 물론 이러한 창작방법마저 오늘날에는 아주 흔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예를 들어 일상적인 사건 연대기 식의 구성이라든지, 간결한 텍스트와도 같은 독특한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또한 이 늦깎이 작가는 르 클레지오의 경우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수와셀의 은자(은자), ‘황금을 찾는 이’였던 공상 속의 방랑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뚜흐니에는 이드리스(Idriss ;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등장하는 예언자)가 벨빌(Belleville)에서 ‘황금 물방울’을 찾는 과정을 너무도 정치하게 묘사한 작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