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66화
아르튀르 랭보의 빛나는 시집 『지옥의 한 철(Une Saison en Enfer)』에서 랭보가 ‘샴(Cham :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의 아이들의 진짜 왕국’이라 노래했던 아프리카는 장 노엘 판크라지(Jean-Noël Pancrazi)의 『겨울의 거리(Les Quartiers d’hiver)』(1990)에 이르면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로 등장하며, “날이 밝기 전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와 함께 태워버려야 할 피로 얼룩진 포대자루들"처럼 즐비한 송장들을 매일 치워야만 하는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옥과 다를 바가 없다.
전염병은 항상 인간성에 경종을 울려주는 것 가운데 하나였으며, 더군다나 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 다시 말해 에이즈만을 놓고 볼 때, 이 병이 전염병과는 달리 전혀 전염되지 않을 것이란 오류 속에 진행된 거의 전 지구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작가와 질병의 관계 역시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주 중요한 문학적 주제이지만, 다른 때와는 달리 최근 20세기 후반 즉, 요 10년 사이에 에이즈로 말미암아 재앙을 당하게 된 세상의 참혹한 실상을 일깨워 준 또 하나의 새로이 변용된 문학적 주제로 자리 잡았다.
질병에 대응하는 방식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두 갈래로 나뉜다. 그 하나는 퇴폐적인 시대가 항상 요구했던 방식으로서 일종의 신의 섭리에 따라 행해지는 세계의 정리라는 차원에서 모럴리스트들의 근엄한 주장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애당초 저녁 모임의 동참자들의 퇴폐적인 행동에 증오에 섞인 온갖 욕설을 퍼붓는 모디아노의 『개선문 광장(La Place de l’étoile)』에서의 제르베르와 같은 발상에서 비롯된 위험성을 은닉하고 있으며, ‘암살자’의 새로운 ‘시대’를 환영하는 분위기 속에 폭력적인 정화의 수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또 다른 갈래는 앙드레 지드로부터 이어져온 동성연애를 비롯한 자유로운 성행위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성적 자유에 대한 ‘동정적’(에르베 귀베르의 표현을 빌자면) 논리다.
이러한 주장들이나 논리들은 에이즈가 그 실체를 드러내기 이전에 발표된 이브 나바르(Yves Navarre)의 아름다운 소설 『순화원(Le Jardin d’acclimatation)』(1980)에서 읽을 수 있듯이, 항상 아들 베르트랑 앞에서 부르주아 기성세대의 윤리를 들먹이는 아버지 앙리 푸이앙의 잔인한 이야기로 귀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연애나 성적 행위가 귀베르의 책 제목과도 같이 온 지구를 물들이는 신종 세포 감염바이러스(cytornegalovirus)의 확산을 예상치는 못했다. 이 불행한 작가는 죽음을 얼마 앞두고 펴낸 책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에이즈라는 질병에 대한 문학적 체계를 설정해 놓은 공로에도 아랑곳없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1991년에 사망한다. 이처럼 서른다섯의 남자에게 깃든 노인네의 피곤한 육체, 이 시대의 문학이 보여준 새로운 변신은 바로 그와 같은 죽음을 앞둔 노쇠 현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 왕』의 테베와도 같이 20세기말의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이 새로운 르와모스(loimos : 고대 그리스에서 창궐하던 전염병)는 참으로 많은 문학작품들을 환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장 노엘 판크라지의 『겨울의 거리』에 나오는 ‘연보랏빛 악(惡)’은 차라리 부드러운 편이다. 그러나 판크라지는 “극도로 절망적인 악감정 속에 모두로 하여금 우리를 저주하게 만들고 우리마저 원한을 갖게 만들었던 – 이처럼 파리는 술집들과 자유로운 성애가 흘러넘치는 곳이다. - 죽음을 예고하기 위해 에듀아르도의 누이가 다소 준엄한 행위를 취해야 한다는 점을 의도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지독하게도 절망적인 것은 시릴 꼴라흐(Cyril Collard)의 『야수의 밤(Les Nuits fauves)』을 물들이고 있는 야수성이다.
1989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연기를 맡은 한 편의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에르베 귀베르가 정치하게 묘사했던 것처럼(1990년에 발표한 『내게서 삶에 대한 욕망을 일깨워 주지 않은 친구를 위하여(À l’ami qui ne m’a pas sauvé la vie)』와 1991년에 펴낸 『동정의 사망신고서(Le Protocole compassionnel)』), 육체적인 타락이란 주제를 잔혹할 정도로 여실히 그린 작품에 해당한다.
이보다 더 거창하고 엄청난 것은 기 오켄겜(Guy Hocquenghem)의 유작 『죽음의 원형경기장(L’Amphithéâtre des morts)』(1994)일 것이다.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는 바람에 기 오켄겜은 이 작품을 생전에 발표할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사후에 정리하여 발간된 유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 묘비명에서 작가가 겪은 참혹한 정황을 읽을 수 있다.
병원의 막다른 골목에 나무처럼 버티고 선
수수께끼 같은 묘비명은
다름 아닌 ‘광기와 갈색빛을 띤 종양
그리고 등대’였다.
- 기 오켄겜의 『죽음의 원형경기장』, 1994.
‘구원의 글쓰기’, 그것은 죽음의 집행유예로서 행해지는 질병으로부터의 마지막 안간힘이다. 이러한 글쓰기가 실로 질병의 재앙으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주술적이고도 구제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오켄겜으로 하여금 단지 단편적인 서술만을, 다시 말해 질병으로부터 지친 삶의 흔적만을 나열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아름답게 정리된 이 한 권의 책은 애초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파리 몽파르나스(Paris Montparnasse)
‘파리-몽파르나스, 2018년 5월’이라는 부기는 단지 작가의 상상적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듯한 실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에이즈를 다룬 문학 작품에서 이러한 거짓-기억(pseudo-mémoires)에의 서술이 지극히 초보적인(primaire) 단계에서 설정된 허구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더하여 귀베르의 소설들에서 이러한 예가 너무 자주 눈에 띄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에이즈 문학이 다 이러한 가상의 사건에 바탕을 두고 씌어진 상상물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 버릴 수 없는 의문 하나는 왜, 무엇 때문에 작가들은 에이즈를 다루기 위해 실제 작가 스스로가 에이즈에 걸려 죽어야만 했느냐 하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내 개인적으로는 꼴라흐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야수의 밤』에서 꼴라흐는 17살밖에 안 된 젊은 연인 로라에게 에이즈를 감염시키는데, 결국 그는 그녀를 자신의 모친에 대한 희생물로 삼은 것이다) 기욤 르 뚜즈(Guillaume Le Touze)가 쓴 『그 아비의 그 자식(Comme ton père)』에 더 관심이 간다.
기욤 르 뚜즈가 두 번째로 발표한 이 소설은 작가가 보다 세심하게 소설적 장치를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는 비길 데 없이 완벽한 구성을 보인 경우에 속한다. 단지 26살밖에 되지 않은 이 젊은 작가가 세상의 이목을 끌 수 있던 이유나, 1994년에 메디시스 상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그와 같은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젊은 소설가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작품 속에 장치한 소설적 구성은 다름 아닌 허구의 뼈대에 전기적인 요소를 가미한 점인데, 이러한 자전적 요소는 앙드레 지드의 『여학교(L’École des femmes)』의 로베르와 쥬느비에브에서처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시선들을 성공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허구이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바로 지금 여기임을 실감 나게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해진다.
기욤 르 뚜즈의 『그 아비의 그 자식』에서 질병에 걸린 젊은 이탈리아 남자인 기위세프는 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의 동굴로 피신해 간다. 아버지 폴 역시 동성연애자다. 남편 폴과 갈라 선 어머니 끌로디아는 나중에야 이 두 사람과 다시 결합한다.
기위세프는 어머니와 살던 파리에서는 마치 버려진 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아드 같은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로마에서는 항상 거실에 놓인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수가 놓인 두 개의 안락의자를 지켜보곤 했는데, 이 소파들은 다름 아닌 모친과 의붓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오자 이 의붓아버지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
로마에서 파리로 그러나 이 소설의 수렴점 구실을 해 주는 남아프리카는 더 이상 도망칠 데가 없는 상황을 암시해 주고 있다. 끌로디아는 아들로부터 전화를 받고 자신의 아이가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편지를 떠올린다. 그녀는 아들 기위세프와 남편 폴이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무래도 자신의 아이 기위세프가 소설을 쓴 것이고,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한 아이가 오래도록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꾸민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점이 바로 기위세프가 꼴라흐와는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해 기위세프는 꼴라흐와는 달리 자신에의 희생물인 에리네를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붙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끌로디아의 시점에서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아들과 어머니는 재회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아들도 죽고 어머니마저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끌로디아는 적포도주 잔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기다리고 있으마.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에이즈 문학은 20세기말에 또 한 번 되풀이될 것을 이미 예정하고 있었다. 1996년 같은 주제로 씌어진 크리스티앙 기위디첼리(Christian Giudicelli)의 소설 『떠나는 자(Celui aui s’en va)』가 이에 해당하는데, 말리크라는 대학생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파리의 이름 모를 병원에서 죽어가는 이 짧고도 슬픈 이야기는 한 젊은이가 끝끝내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처절함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 역시 병으로 인한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그 아비의 그 자식』처럼 주인공 역시 무한정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 세기말이 궁금해요.
- 당신은 지금 다음 세상의 시작이 궁금하다고 했나요?
필립 솔레르스의 『비밀(Secret)』(1992)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나르와 끌레망의 이 대화는 또 다른 소설, 또 다른 문학을 향한 출발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되풀이되는 문학의 구태라는 덫을 피하기 위한, 앞에서 언급한 도피의 문학과도 같은 것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