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4화
[대문 사진] 에두아르 마네는 파리 프티 오귀스탱 가(rue des Petits-Augustins) 5번지에서 태어났다. [1]
1장 3
(1832-1848)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프티 오귀스탱 거리로 통했다. 정면엔 보자르(파리 미술대학)를 비롯하여 이상하게도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건물들 하며, 뒤편으로는 프랑스 학회가, 거의 맞닿을 거리에는 루브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푸르니에 가문은 대대로 프티 오귀스탱 거리에 있는 건물에 살았다. 오귀스트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곳도 이곳이었다. 대지는 엄청난 크기였으며, 으리으리하게 들어선 건물 안쪽에 커다란 안뜰을 낀 구조의 건물은 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안뜰 세 방향으로 파리에서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유명한 환기가 잘 되는 4층 건물이 빙 둘러싼 형국이었다. 각 층 별로 먼저 1층에는 오귀스트의 사촌이었던 노처녀가 살고 있었고, 마네 가족은 2층에, 그 위층에는 예술에 대한 애호가일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 홀린 일명 에드몽 외삼촌이라 불리는 고집 센 미혼남이 살고 있었다. 이 미혼 남은 오로지 자신의 어린 누이에게서 건물을 빼앗을 것만 생각하면서 마치 부모나 된 듯 세 조카들을 돌봤다.
건물 4층에는 전선에서 온 삶을 다 보낸 군인인 사촌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그를 다시 보지 못한 까닭에 아마도 전선에서 그가 사망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2층과 3층 사이 건물 안에 살고 있는 과일 속의 벌레 같은 외삼촌은 오후가 되면 아주 우아한 젊은 여자들을 건물로 불러들였다. 이 젊은 여인들은 그의 조카들과 같은 향내를 풍겼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각자 다른 향수를 몸에 뿌린 탓에 그녀들 각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맞힐 수 있었다.
전통에 넌덜머리가 난 기혼자였던 공화주의자와 예술과 모든 호사스러운 것에 대한 애호가였던 왕정주의자 사이에서 아이들만이 고통을 겪었다. 그렇지만 오로지 두 남자에게 만이 아이들에 대한 또한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법적인 권리가 부여된 상태였다.
이러한 생기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 수업을 빼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두아르를 감시하고 있는 건 이보다 더한 이제야 결혼 적령기에 막 도달한 젊은 여자였다.
장남으로서 에두아르는 부자 관계에 따른 약간은 유순하면서도 경직된 아버지의 모든 간섭과 질책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집에서 아버지 오귀스트는 마치 한 부서의 장이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하달하듯 행동했다. 아내인 으제니 또한 그 지시를 기꺼이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나쁜 짓을 할까 봐 부모는 아이들을 돌보며 그들 곁에서 한시라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세 아이들은 푸왈루 신부가 운영하는 보지라 거리에 위치한 명성이 자자한 학교에 기숙했다. 그곳에서 금요일마다 초라한 식사를 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 영성체를 했다.
오귀스트 마네는 공화주의자였지만, 이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관례적인 행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8일 만에 세 아이 모두 영세를 받게 했다. 이에 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다. 어린 영혼들은 너무나도 유약하기만 했을 따름이다.
1844년부터 1848년까지 세 아이들은 차례차례 발 드 그라스 인근의 로몽 거리에 위치한 롤랭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예전에 수녀원 부속 여자 기숙학교였던 이곳은 구 왕정체제하에서 귀족들이 빈털터리가 되자 그들의 어린 딸아이들을 맡겨놓았던 감화원 같은 곳이었다.
중학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불행한 일을 겪었다는 듯이 어둡고 침침했으며, 난방시설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급 교실마다 60명이 넘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에두아르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초기에는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다. “뛰어나지도 않고, 무능하며, 라틴어 실력은 아주 형편없는 성적.” 그가 최고의 성적을 받은 것은 66명 가운데 고작 42등을 차지한 때였다. 교장이 에두아르에게 법관이 될 자질은 전혀 보이질 않으며, 아주 혼란스러운 잡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에두아르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불손한 행동을 하는 것마저도 지겹고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점점 오만불손해져 갔다. 그는 권위에 도전하는 상궤에 벗어난 짓들을 벌이면서 동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동료들 가운데 한 명이 1845년 줄곧 속내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 앙토냉 프루스트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수업을 빼먹고 학교를 벗어날 것만을 골똘히 고민하는 친구였다. 우정만이 우울한 학교생활에서 그들에게 구원으로 자리 잡았다.
에두아르는 중학교 교장이 아버지의 친구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 부친은 그가 잘 적응해 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 에두아르는 그런 아버지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집에서조차 에두아르는 아버지의 그 잔인한 금지규정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강직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아침 인사를 나눌 때조차 아버지는 명령을 내리듯 딱딱한 어조로 말하거나 화난 듯한 어조로 인사를 나눴다.
외삼촌 푸르니에 만이 자신의 조카에게 잠시 동안이나마 딱딱한 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 푸르니에는 스케치하는 법을 터득했다. 사진은 아직 그렇게 널리 알려진 장르가 아니었다.
외삼촌은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개발해 가면서 또한 아름다운 그림에 대한 취향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를 조카들에게 물려주고자 애썼다. 그 가운데 장남이 그런 의도를 가진 외삼촌의 의도에 부합해 보였다.
으제니는 외삼촌이 에두아르와 산책하는 걸 말리지 않은 채, 남편과 함께 소일했다. 그런 관계로 외삼촌 에드몽은 에두아르와 함께 주기적으로 루브르 박물관과 뤽상부르 미술관을 찾았다.
1848년 루이 필리프는 퇴위할 때까지 프랑스 인들이 대경실색할 만큼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5백여 점에 이르는 스페인 대가들의 회화 작품들을 기증했다. 외삼촌과 조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손을 맞잡고 고야가 그린 흑인들에게서 뭉클한 감동을 받으면서 벨라스케즈의 광기에 찬 작품들 앞에서는 꿈꾸듯 멍하니 그림만 바라보았다.
비록 에두아르는 앙토냉 프루스트와의 우정에 더욱 강렬하게 이끌리긴 했지만, 외삼촌은 두 남자아이들을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두 사내아이들은 항상 함께 틀어박혀 있었던 관계로 그들이 품고 있는 열정 또한 같았다.
외삼촌은 자신이 품고 있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애국심에 입각하여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을 찾아가 두 아이들로 하여금 이미 쇠락한 프랑스 역사를 이해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도왔으며, 작품으로 정치하게 묘사된 모든 프랑스 인들이 이룩한 놀라우리만치 경이적인 사건들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추겼다.
그뿐만 아니라 에두아르가 온종일 내내 서투르나마 그림 그리는데 진력하게 된 것은 오로지 외삼촌이 그로 하여금 초보적이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초를 터득하게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외삼촌은 에두아르에게 데생 수업을 받게 해 주었다. 아버지는 그러나 그런 하잘 데 없는 일(원문대로!)에 돈 쓸 까닭이 없다고 미술 수업 비용을 딱 잘라 거절했다. 수업 시간에 에두아르는 투구를 쓴 고대 조각상들이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석고상들을 그렸다.
그러면서 나른하고도 지루한 수업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림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같은 반 동료들이나 선생들을 캐리커처로 그리곤 했다. 덕분에 공책은 시커멓게 변하여 말 그대로 수많은 캐리커처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데생은 에두아르로 하여금 꾀병을 부리는 수단과도 같이 옆길로 샐 수 있는 출구였고, 그가 생각한 바를 확실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였다. 예를 들어 헝클어진 채 늘어뜨려진 머리털 타래, 들창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귀들이 그러했다.
하늘이 에두아르에게 재능을 준 것일까? 그가 재능을 타고난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에두아르는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자유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갔고 나른하면서도 지루할 뿐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두아르에게 생겨난 용기가 직접적인 수단을 통하여 또는 정면으로 아버지에 대항하는 식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지만, 데생 수업에서 사용하는 목탄이야말로 화약고의 폭탄과도 같았으며, 그를 자신만만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 그림을 완성해 감에 따라 에두아르는 우쭐해지기까지 하면서 뿌듯한 자부심마저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만족감마저 차올랐던 것이다.
앙토냉과의 긴밀한 우정 역시 절실했다. 그러면서도 생각의 한편으로는 늘 지긋지긋한 법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식의 각성이 도사리고 있어 그를 괴롭혀댔다. 이 의식의 각성은 마침내 제 목소리를 갖춘 채 아니야! 하고 소리치게 만들고야 말았다.
법학이라고?
아니야.
세상 무슨 일이 닥쳐도 내 결심한 바는 변함없어!
[1] 지금은 보나파르트 가(Rue Bonaparte) 5번지로 거리명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