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공화국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9화

by 오래된 타자기


2장 4
(1848-1851)



에두아르 마네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은 하루빨리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시험을 치르도록 입학원서를 넣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들뿐이다. 기항지 리오에 머무는 동안 에두아르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을뿐더러 자신이 받아들일 것 역시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충류에 물려 독이 퍼진 걸 치료하는 길고 긴 시간 동안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할 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력 상태에 빠져있기만 했다.


시험을 다시 치러야만 한다! 게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황상태에서의 두려움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가망성조차 없다는 낙담에 빠져들었다.


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선실에 홀로 갇혀서 지내다 보니 사랑 탓에 몇 날 며칠 긴긴 날을 허송세월 한 것이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확실히 이 기후는 바다에서의 생활 이상으로 그에게 들어맞지 않았다.


마침내 아침이 도래했다. 맑은 날씨였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덕분에 아침부터 그는 걷고 뛸 수 있었다. 그러자 피곤하고 지친 날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출항하는 날이다! 다시는 혼혈 여자애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생명의 위태로운 공포로부터 벗어나기조차 한 것이기도 했다.


“헛되이 리오에서 미술 실기를 지도할 분을 구하고자 애썼습니다. 장래에 해군 수병이 될 모든 선원들은 그림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림 그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당신이 이 예비 선원들에게 기초적인 방법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함장께서 정중하게 요청하셨습니다.”


“선상에서 동료들에게 미술 수업을 진행한다고? 못할 거야 없지.”


너무도 다정한 외삼촌에게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얼 하며 지냈을 것인가? 군대는 그림에 관해 아무것도 가르쳐 준 게 없었다. 항해를 하는 동안 마네는 데생 실기 지도를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게 되자마자 금방 이름이 알려지면서 장교들과 교관들이 자신들의 캐리커처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는 새해 선물 대신에 그들의 주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원래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자 다시 우울해졌다.


에두아르는 단지 데생을 지도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화가로서의 첫 성공을 거둔 사례에 해당했다. 하지만 이때 해양 훈련을 받는 중에 마네가 그린 초상화들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오직 퐁티용의 초상화에 해당하는 비틀대는 피에로뿐이다.


고향으로 되돌아간 뒤에 무얼 할 건지에 대해 에두아르는 고민에 빠졌다. 리오를 떠나기 직전에 프랑스 본국에서 발생한 정치적 돌발 상황은 그를 완전히 낙담하게 만들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걱정과 불안이 저 근저에 자리 잡아갔다.


루이 필리프 하의 프랑스 경제는 추락할 대로 추락하여 이미 피폐화된 상태였다. 루이 필리프가 벌인 새로운 사업들은 엄청난 궁핍만 야기할 따름이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3천1백만 명이었으나 이들 가운데 26퍼센트가 하루에 겨우 55센트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 돈은 어림잡아 젊은 부자 한 사람이 빵 한 덩어리를 살 수 있는 금액에 불과했다.


루이 필리프는 인민을 죽음에 빠뜨린 주범이었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필리프는 인민을 오히려 사냥했다. 이로 말미암아 성난 군중들이 다시 봉기한 탓에 그는 영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권위가 다 실추될 대로 실추된 군주가 마네에게 다시 다가왔던 건 오직 루이 필리프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스페인 회화 작품들을 대중에게 돌려주었다는 점 그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마네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기조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호소 “부자 되세요!”라는 말만큼이나 공허했을 것이다.


이후로 에두아르는 루이 나폴레옹이 1848년 12월 16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 반면 1849년 2월에 마네는 리오의 유흥가를 전전하고 있거나 아니면 뱀에 물려 죽을 고비를 넘기는 중이었다.


파리는 거리마다 온통 일제히 들어 올린 붉은 깃발로 넘쳐났다. 과도정부는 일련의 대담한 사회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그러자 이윽고 민중 봉기가 잦아들었다. 곧이어 납세자들만이 유권자 자격을 지닌 선거가 치러지고 이로 인하여 보수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반쪽짜리 공화국이 생겨났다.


이 불안정한 정부는 실의에 빠진 파리 인민들의 봉기를 강제로 저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하여 6월 23일과 24일에 걸쳐 개최될 마네의 프랑스로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한 모임이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다. 사살하고 체포하고 구금하는 일이 비일비재로 벌어졌다.


공화국이란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 광장에서 딱 한 번 일어난 봉기를 군대가 진압하자 황족 출신의 공화국 대통령은 그에 상당히 안심했다. 이후로 모든 민주적 절차는 조용히 무시된 채 제거되었다. 이어 12월 2일 쿠데타가 발생하자 이에 놀란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다들 그렇게 되리라 여겼다는 분위기였다.


에두아르는 여러 서신에서 보나파르트의 탈을 쓰고 있는 루이 나폴레옹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규정했다. 이 제2의 보나파르트는 빅토르 위고가 꼬마 녀석이라 별명을 붙인 장본인과 같은 인물로 마네는 여러 차례 서로 다른 시기에 쓴 편지들에서 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불신을 표명하였다.


그때 마네는 단지 17살 어린 나이였고, 프랑스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하였던 셈이다. 이러한 굳건한 정치적 신념은 훗날 성인이 되어 그가 무슨 일을 벌일 건지를 증거해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적어도 소동과 소란의 도시 파리에서 그가 어떤 동요 속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가늠케 해주는 전조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 으젠에게 에두아르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여러 차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욕과 창피함을 이따금씩 바닷물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다. 리오 기항지에서는 그 모든 것을 싹 다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법학을 공부해야 하는 걸 때려치우고 난 연후에 어머니마저 확신을 갖게 된, 그가 획득한 또 다른 것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또 다른 것을 뭐라 규정하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성공과 자신의 입지를 굳힐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걸 오히려 방해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는 오로지 으젠에게만 해상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지루함과 욕구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적어도 이 둘만이 해양에서 생활하는 것을 끈기 있게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탓이다. 악천후와 매일 되풀이되는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잡역과도 같은 우발적인 것들이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음은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마침내 에두아르는 6월 중순에 해군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또한 그와 같은 결정이 늘 생각해 오던 것이었음을 깨닫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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