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뛰흐 화실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1화

by 오래된 타자기


2장 6
(1848-1851)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이후로 틀어진 아버지와 외삼촌 간의 관계는 계속 벌어져만 갔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말 한마디 주고받는 일조차 없었다. 우스꽝스럽게도 공화국 우두머리에 루이 나폴레옹이 선출된 것이 영 두 사람 맘에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파멸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외삼촌 에드몽이 파리를 떠나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외삼촌은 에두아르도 잘 알고 있는 파리 근교 일 드 프랑스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조카들은 그 멀리에까지 외삼촌을 보러 가지는 않았다. 오직 으제니만이 자신의 친 형제를 보러 그것도 아이들에게 아버님이라 불리는 남편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오갔을 뿐이다.


비록 에두아르가 외삼촌과 더는 만나지 않았을지라도 외삼촌은 마네에게 여전히 자유의 이상적 모델로 남아있었다. 정치적 견해를 제외하고는 에두아르는 늘 외삼촌과 생각이 일치했다.


드디어 외가 쪽과 연결된 모든 끈이 다 끊어질 순간이 도래했다. 세 아이들은 속으로 외삼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린애다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입관식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따라서 세 아이는 그나마 외삼촌의 시신을 매장하는 걸 지켜볼 수조차 없었다.


외삼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애도의 순간이 지나자 으제니는 자신의 친오빠의 부재에 따른 죽음을 슬퍼하는 정도가 더 심해졌다. 그녀는 심적으로 더욱 팍팍해지면서 아무것에나 기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집은 이를 잊기 위한 수단으로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는 아들들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아들들 역시 그녀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나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두 번이나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화요일에는 남편의 친구들인 공직에서 쫓겨난 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목요일에는 음악회를 열었다.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경박하고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인간들까지 모두 모이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훗날 장남의 예술가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될 판이었다.


그녀는 자식들에게 예술을 가르친다는 구실 삼아 피아노 교습 선생을 고용했다. 특히나 목요일에는 모여있는 이들 앞에 피아노 교습 선생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녀는 청중들 앞에서 피아노 소리에 맞춰 아리아를 열창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고 난 연후에 에두아르는 아틀리에에 소속되기로 맘먹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1850년 1월 토마 꾸뛰흐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이를 용인했다.


선생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런저런 악평들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한 건 토마 꾸뛰흐는 아카데미 파에 속한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작품만큼은 마치 관학풍에 젖은 작품들 같이 보였다. 하지만 꾸뛰흐는 그가 드나드는 공화주의자들의 사교모임에서만큼은 모든 이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총아였다.


토마 꾸뛰흐(Thomas Couture)와 그의 대표작인 「타락한 이탈리아인들(Les Romains de la décadence)」, 1847,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아버님이라 불린 아버지는 아들과 초보적 관점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갖고 격론을 벌이다 아들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하자 돌연 아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아들이 용기 있는 것 이상으로 생각이 고매하면서 지적이라는 데 동조하면서부터였다. 지금부터라도 아들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아들에게 있을지도 모를 천부적 재능 아니 적어도 예술적 능력을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에두아르가 예술을 연마하고 있으니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로 맘먹기까지 한 것이다.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도 아버지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기질로 볼 때 반대만 하던 입장을 바꾸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정당화하면서 합리적인 판단을 유도하여 그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예술은 더디었다. 수련생활은 길었고 꺼칠꺼칠한 가시밭길이었으며, 험난하기만 했다. 심적으로도 괴롭고 착잡한 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면서 선물로 보여주려고 그린 그림들은 스스로의 판단에도 그리 탁월한 재능을 뽐낼만한 작품들이 아니었다.


에두아르는 실의에 빠졌다. 실의에 빠진 것은 그 자신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역시 실망했다. 그는 단 한 마디의 평가도 받지 못한 작품들을 모두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없애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아버지와 아들, 이 두 사람은 아들의 실력이 좀 더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에두아르는 아버지보다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여 그렇게 나쁘지 않은 그림마저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애버렸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없애고 또 지우면서 이제까지 그린 그림을 다 싹 지우고는 다시 그렸다. 그는 아버지가 놀랄만한 동시에 자신마저 놀랄 수밖에 없는 그림을 완성하고만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작품에 실망하는 것보다 상투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나쁜 짓이란 걸 깨달았다. 작품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까다로워지면서 상대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요구 조건도 상승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만이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 까닭에 앞으로 그는 전혀 낯부끄럽지 않은 자신만이 떠올린 회화 예술의 개념에 입각한 작품만 그릴 작정이란 말인가?


회화 예술에 대한 그처럼 대단하고 단단하기까지 한 개념은 대체 어디에서 생성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는 그처럼 높은 수준에서 스스로 경계를 치고 아직은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 없다고 자각한 것일까? 어떻게 세련된 선 멋쟁이 젊은이에게서 그와 같은 과격하고도 극단적인 예술적 자각이 싹트고 점차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을까? 병행하여 대체 예술에 대한 애착이 어떻게 그러한 가정에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모든 게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영혼 저 깊숙이 도배된 것만큼은 자명했다. 이를 증거하는 것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학교로 다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스승과 예술적 견해를 두고 늘 의견이 갈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스승 곁을 떠나지 않은 것만 봐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는 늘 가족들과 한 지붕 아래 살았다. 얼핏 봐서는 세 아이 중에서 가장 영민한 아이처럼 보였다. 비록 독립적인 사고를 지닌 젊은이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한밤중에 그것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방탕한 기질까지 지니고 있었다.


꾸뛰흐 아틀리에는 삐걀에 있었다. 몽마르트르의 풍차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파리 경계 밖이었다. 정도를 벗어난 짓을 하거나 몰래 수업을 빼먹어도 어느 누구 한 사람 이를 제지할 길이 없었다. 만일 그가 아틀리에에 없다 해도 누가 그가 있는 곳을 알기나 할 것인가?


그는 매일 밖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멀리까지 운행하는 기차를 타고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밤마다 또다시 외출했다. 새로 유행하는 옷만 골라 사 입었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지출했다. 넥타이가 옷과 잘 어울리는지, 불편한 다리에 찰 각반 또한 옷차림과 잘 어울리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옷도 옷감이 제일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천만을 골라 입었다.


세련된 멋쟁이 댄디의 사려 깊은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옷감 역시 그가 손에 쥐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걸맞은 것을 요구하였을 따름이다.


1미터 70의 키에다 날씬하면서도 근육질의 몸매를 한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긴 얼굴에 잘생긴 용모였다. 걸음걸이도 고양이처럼 민첩했고 유연했다. 앙토냉 프루스트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엉덩이를 빼고 걸어가는 그를 볼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리처럼 궁둥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걷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게 친구를 조롱하면서 던지는 농담이었다.


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는 건 그의 삶에 있어서도 앞으로 계속될 몸짓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그게 단지 멋지게 보이려 취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그러한 몸짓에는 저 열대지방에서 발을 다친 사연이 담겨있으며, 또한 그 아픔이 계속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걸?


오라! 상처는 치유되고 아무는 법이지만, 때만 되면 여기저기 덧나 다시 고통을 주는 것이 또한 상처다. 그것마저도 괜찮다. 이제 나이 열여덟이 되었으니 건강은 확신해도 좋다. 죽을 염려는 붙들어 매어놨다.


약간 쉰듯한 목소리는 전형적인 파리지앵의 목소리이면서 억양은 명쾌하고 분명한 어조를 띤 대화체 구문 또한 상당한 교육을 받은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다에서 파리로 귀환하자마자 가능한 최대한 길게 수염과 머리를 기르기로 작정했다.


머리카락은 금발에서 적갈색으로 바뀌었고 어머니를 닮아 푸른 회색에 가까운 초록빛에 회색이 약간 섞인 동공이 반짝거리는 맑은 눈빛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탈모가 시작되어 명백하게 드러난 대머리를 더는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50살이 될 때까지 대머리로 살아가야 할 팔자였다.


상당히 쾌활한 성격으로 익살스럽고 잘 웃었으며 매력적으로 인간미가 넘쳐흘렀다. 대화를 나눌 때에는 신랄한 어조로 이야기하면서 가끔씩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기이한 성격을 지닌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야수와 같은 잔인한 면도 없지 않아서 인정머리 없는 것 이상으로 더 심한 면도 곧잘 드러냈다.


남을 비웃고 몰아세워버릇하는 성격인지라 그에게 한 번 걸리면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경멸과는 차원이 다른 익살맞은 농담을 좋아한 탓에 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으며, 근본적으로 사람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우아한 태도에 새로운 유행을 좇는 댄디이긴 했으나 속물은 아니었다.


워낙 얼굴 생김새에 관심이 많은 탓에 전 사회적으로 어떠한 신분에 속해있던지 사람의 생김새는 항상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사람에게 한 번 꽂히면,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해서 생김새에 꽂히면 그 사람이 비록 그와 격이 달라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꾸뛰흐 화실은 일반 대중을 위한 미술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과제가 엄청났다. 지도를 맡은 화가 토마 꾸뛰흐가 학생들이 교양을 갖출 것을 지속적으로 주문한 탓이었다. 그는 화실에서 학생들과의 대화 수준을 높이고자 의도했다. 그런 까닭에 학생들은 실기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책들도 읽어야만 했다.



흡입하라!
호메로스는 저 고대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비르길리우스는 리듬을,
셰익스피어는 열정을,
몰리에르는 아름다운 언어를 들려주었다
그대들은 젊다
모든 걸 쉽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 토마 꾸뛰흐(Thomas Couture)



꾸뛰흐 화실을 6년간 드나들면서 마네는 학교에서는 대충대충 넘어가던 문화 전반에 관한 지식을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오전엔 이곳저곳 카페에서 시간을 죽치고 오후에도 역시 카페에서 예술가들과 교우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음악 홀, 소극장, 카바레를 전전하거나 나쁜 짓을 했다. 새벽부터 꾸뛰흐 화실에서 작업할 때는 오후가 되면 루브르로 달려가고 어쩌다가 해가 질 무렵에 르 스위스 아틀리에에 들르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아틀리에는 많은 그림쟁이들이 공짜로 그림을 지도하는 바람에 늘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집에서 잠을 자는 시간은 인색할 정도로 짧았다.


이 시기에 그의 내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증거하는 것이 리오에서 돌아온 뒤에 앙토냉 프루스트를 다시 만나게 된 일이다. 그는 부유하면서 더군다나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은 친구에게 뭐라 정확하게 단정할 만한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꾸뛰흐 아틀리에로 데리고 가고 싶다고 설득했을 따름이다. 이후로 그는 마네의 생애에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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