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20화
3장 6
(1851-1856)
점차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삶에 이끌리면서 마네는 상당히 쾌활해졌고 주위의 시선을 끌 정도로 유머까지 갖춰갔다. 다면적인 혼란한 성격에 의한 충동적인 행동도 스스로 삼갔다. 완벽한 아들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아파트에 기거하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삶을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랑이 충만한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듯 보였다.
아틀리에에서, 루브르에서, 현란한 실내 분위기를 뽐내는 카페들에서, 공연장들에서, 식도락가들이 즐겨 찾는 레스토랑들에서 또한 수상쩍은 주점들에서 그는 고상한 예술가로 행세했고 잘 차려입은 옷만 아니라면 불평불만 가득한 영혼의 소유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밖에서 하는 행동이나 말은 늘 거칠었으며, 그의 겉모습 또한 본래의 모습과 상반될 정도로 전혀 다른 양상을 띠어갔다. 철저히 가면을 쓰고 앞에 나서 버릇하는 태도 또한 화제가 될만한 이야기에 스스로 정통해 있음을 입증하고자 고심하고 있다는 듯이 상당히 기교적이면서 현란한 말솜씨를 뽐냈다.
1852년 여름이 다가오자 에두아르는 으젠에게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자고 졸라댔다. 에두아르는 회화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를 원했으며, 여기저기 정처 없이 유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혁혁한 작품들을 완성한 거장들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그들을 단순히 모방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한번 스스로 모사해서 그려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아들의 여행을 위하여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는 통장을 헐고는 조금씩 모아둔 적지 않은 돈을 두 자식에게 건넸다. 여행지에서 잘 먹고 다니라고 준 여행 경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는 항상 엄격하고 고지식한 탓에 아주 인색한 인물로 여겨졌을 따름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이탈리아에서 한 번 살아볼 것도 자상하게 권유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됨됨이를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인가?
그 해 여름 수잔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네덜란드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아이를 보여줄 심산이었다. 레옹은 아직 젖먹이여서 수잔의 모친과 할머니와 나이 어린 동생인 로돌프가 아직 결혼을 안 한 아이 엄마와 고향까지 동반했다.
아버지의 완고함을 누그러뜨리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보금자리로 돌아온 망가진 처녀……. 자신에게 엄격한 개신교 신자였던 수잔 친정아버지는 에두아르 부친보다는 훨씬 너그러운 편이었다. 이미 눈앞에 벌어진 기정사실 앞에서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아는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수잔 위로 나이 많은 두 자매는 그런 아버지를 가리켜 오파라 불렀다. 두 자매 역시 프랑스 태생의 화가와 조각가와 결혼했다. 수잔이 두 팔에 아이를 안고 나타나자 아버지는 가장 나이 어린 가문의 상속자인 그녀가 낳은 아기를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를 성서에 비유해 돌아온 탕자로 여겼다.
한편 으젠과 어렸을 적 두 친구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에두아르는 모험에 찬 삶에 뛰어들면서 상탄을 금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예술품들로 가득한 이탈리아에서 날마다 이를 발견하는 아름다움에 푹 빠져 진정한 예술에 대한 애호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자유로움을 훨씬 더 만끽한 이는 에두아르였다. 여행의 세 동반자들은 아직 미혼이었던 이유도 작용했다. 회화의 거장들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이탈리아 여인들을 실제 거리에서 직접 바라보니 그림 속 여인들만큼이나 아름답기만 했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와서는 여행에서 재발견한 것들을 곰곰이 되짚어보자 자신의 현실이 너무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불운과 역경으로부터 거리를 띄운 채 멀리 떨어져서 오직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만 보고 다닌 탓이었다.
에두아르와 수잔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늘 서로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에게 다행스러운 변화가 있다면, 수잔의 모친인 오마가 두 아들을 데리고 파리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두 아들들은 레옹보다 먼저 태어난 두 형제로 간주되었다. 로돌프와 페르디낭은 예술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서로 사랑하는 형제였던 두 사람은 자주 파리를 벗어나 퐁텐블로 숲에서 며칠씩을 보내곤 했다. 마네가 찾아간 퐁텐블로 숲은 예술가들이 작품의 모티프를 구하기 위해 숲 바로 인근에 위치한 바르비종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마네 역시 이곳에서 1849년 파리에 번진 콜레라에 걸려 가난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전염병을 피해 바르비종으로 몰려든 작가들처럼 자신의 피난처를 구했다.
로돌프와 페르디낭은 그곳에서 예술가들이 파리와는 완연히 다른 맑은 공기를 흡입하면서 서로 공유하는 예술적 삶을 실천하고 있는, 더하여 품격을 갖춘 숙소들과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은 풍경들에 그들 역시 도취되어 갔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네는 그들 곁에서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노트를 하고 스케치를 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마네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예술적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자신에게 충실했던 예술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꾸뛰흐와의 끊임없는 불화와 반목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늘 꾸뛰흐의 영향 하에 놓여있었기는 하지만, 남달랐던 점은 예술적 자양으로 삼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끝까지 파고들었다.
마네는 예술을 사랑했다. 하지만 열정적인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바로 그와 같은 고민이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꾸뛰흐는 마네의 다른 동료들에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에게도 예술을 할 건지 삶을 택할 건지 양자 간의 선택을 강요했다. 서로 양립할 뿐인, 도저히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예술과 삶,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니!
이때 마네는 시의적절하게도 화풍과 삶의 화해로운 조화를 추구했다. 마네는 그가 실제 바라보고 있는 사물들과 사람들만 그리고자 고집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가해지고 있는 과거 거장들의 예술적 구속을 통한 압제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앵그르는, 나이가 칠십이 다 된 이 노인네는 화단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영광의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으며, 화단의 나머지는 나이 오십을 막 지난 들라크루아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추긴 경쟁심이야말로 화단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예술가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가장 주된 갈등의 원인이 아니었던가? 하기는 스스로 화려한 명성을 갖추기만 한다면, 굳이 어느 유파에 속할 필요까진 없을 터였다.
도미에는 타락한 정치판에 대한 풍자와 사회상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식으로 작품 활동을 펼친 끝에 온갖 작품 경향이 난무하는 예술 판에 캐리커처란 장르를 굳건히 바로 세우는 중이었다. 도미에가 제작한 4천 점이 넘는 석판화들은 아쉽게도 그가 완성한 회화 작품들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만들 정도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오노레 도미에는 진정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아틀리에에서 열심히 미술 수업을 닦고 있는 처지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느낌이었다. 모두들 도미에를 세상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대는 송곳쯤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거론되는 쿠르베는 도시 화가라기보다는 농민 화가에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마네는 쿠르베와는 다르게 누구보다도 더 도시적이었다. 더군다나 마네는 순박한 시골뜨기를 달갑게 여기 지도 않았다. 꾸뛰흐만 보더라도 점점 더 관학풍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