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노릇과 화가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21화

by 오래된 타자기


3장 7
(1851-1856)



마네는 언뜻 보기에 기법상으로 바르비종 파 화가들의 작품 경향에 훨씬 근접해 있었다. 그렇듯 마네는 감상주의에 젖어 짤막한 일화를 다룬 그림들을 즐겨 그렸다. 마네의 눈에는 오로지 코로만이 자유분방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가 주관한 관전은 고의적으로 그를 거부했다. 심사위원의 눈에 비친 그가 그린 온전한 풍경에는 ‘흥미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Jean Baptiste Camille Corot, La Cathédrale de Chartres, 1830, Musée du Louvre.jpg 장 밥티스트 까미유 코로(Corot), 「샤르트르 대성당(La Cathédrale de Chartres)」, 1830, 파리 루브르 박물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도시를 사랑한 화가 지망생인 마네는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그는 가장 주도적인 작품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역사화를 시의적절하게 비난하면서 배척했다.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한 이들은 마네의 역사화에 대한 그와 같은 짓밟아 뭉개기를 그저 지켜만 봤을 따름이다.


늘 화제의 대상이 되면서 또한 대단한 장르를 차지하고 있던 역사화는 오로지 한 물 간 주제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테오필 고티에에 따르면 역사화는 폐기되어야 할 식상한 주제에 직면해 있었다. 보들레르 또한 그에 대한 예언자적인 발언을 시사한 바 있었다.



위대하다 여긴 전통이란 것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에 걸맞은 새로운 것 또한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 샤를 보들레르



꾸뛰흐 화실은 라발 거리의 커다란 건물 맨 아래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네의 사부는 건물 위층에 살았다. 스승은 일주일에 두 번 이외에는 학생들을 보러 아틀리에로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화실로 내려올 때마다 그는 학생들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을 건성건성 훑어보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작품들을 투덜대며 대충 수정해 주는 식이었다.


기성 체계에 강력히 항의해 버릇하던 마네로서는 이처럼 희끄무레한 불빛 아래 어설픈 경험에 따른 지도를 받으면서 작업에 정진한다는 것이 영 달갑지가 않았다. 특히나 탄탄한 기교를 전수받는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석고상 복제품들을 반복하여 주조해 낼 뿐인 이런 짓이 과연 온당하다는 말인가? 그것도 저 고대의 청동 조각상들을 본떠 만든 ‘영웅들의’ 포즈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한심한 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마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나 태도를 원했다. 그가 늘 탐구했던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포즈였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다 가짜다.
무덤 속에 있는 것처럼
이 꺼져가는 불빛으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에두아르 마네



레옹은 조용히 커갔다. 혼자 잘 놀았지만, 어디 다치거나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일조차 없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집 앞 길 건너 정면에 위치한 초등학교 놀이반에 들어갔다. 밖에서는 7살이어서 반 기숙생인 탓에 매주 저녁마다 기숙해야만 했다.


아이는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원망을 쏟아놓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3세대에 걸친 린호프 집안에서 아이를 혼자 내버려둔 적은 없었다.


아이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얌전하게 굴어야 하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아 했다. 아이는 점점 더 총명해져만 갔다. 아이의 대부인 에두아르가 아이에게 했던 것과 대조해 보면 차원이 한참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귀엽기만 한 아이는 이처럼 낯섦과 부드러운 조화 사이를 오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 나는 젖니의 통증과 피곤함으로 점철된, 마치 레이스를 짜듯이 낮에는 화업에 정진하고 밤에는 사랑을 불태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1853년, 1854년, 1855년…….


꾸뛰르 화실에서의 수업은 매 학년마다 순차적으로 이어졌다. 종교 제의와 상당히 유사해 보이는 제식에 따라 학기가 나뉘었고, 그 마디에 각운을 맞추듯이 정기적으로 여름방학이 주어졌다. 이에 따라 에두아르 역시 점차적으로 스승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스승의 가르침이 그리 못마땅할 것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아틀리에에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또한 댄디의 모습을 지닌 실신 들린 듯한 표정으로 악착스레 학업에 정진했다.


그에게 새로운 친구들도 생겨났다. 토흐토니에서 점심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었다. 루브르로 달려가기 전에 또 다른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스위스 아카데미에서는 이와는 다른 친구들과 질펀하게 놀았다. 이곳저곳 새로 생긴 카페들을 전전하면서 홀짝이는 것이 전보다 훨씬 늘어만 갔다. 이 모든 순례를 마치면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들면서 착한 아들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그걸로 하루의 일정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카바레에서 사귄 친구들을 만나지 않을 시에는 수잔을 껴안아주기 위해 줄달음쳤다. 비록 밤새도록 함께 하지는 못할망정 그는 그녀와 함께 있고자 했다. 이미 가족 구성원들로 가득 찬 아파트는 밤마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인구과잉을 초래할 지경이었다.


마네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바랐다. 한때는 마네 가족의 요람과도 같은 쥬느빌리에흐가 유일하게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피처와도 같았다. 하지만 수잔이 없는 곳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처음 외삼촌 에드몽이 사는 집을 찾았을 때, 이곳이야말로 안전하면서도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재빨리 눈치챘다.


그런 연유로 마네는 외삼촌댁으로 네덜란드인들을 데리고 갔다. 외삼촌은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매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외삼촌은 짓궂은 장난을 하거나 유쾌하게 허풍을 떠는 데 한가락 했다.


속죄양이라 할 수 있는 에두아르와 조카와 내연관계에 있는 젊은 여자, 그리고 그녀의 씨족 집안사람들의 숙식을 기꺼이 제공해 주었다. 외삼촌은 외국인을 거의 혐오하다시피 한 오귀스트 마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요컨대 공화주의자였던 외삼촌은 왕정주의자들보다 훨씬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이 에두아르를 늘 놀라게 만들었다. 혹시 이 둘은 본성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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