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에 대하여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22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낭만주의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서거를 슬퍼하는 이들을 다룬 앙리 팡탱-라투흐의 역사화. [1]



3장 8
(1851-1856)



마네 가족이 늘 자랑하는 여름휴가는 연례행사처럼 예년과 같은 방식으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들이 자주 이용하는 불로뉴 쉬흐 메흐에 위치한 오팔 해안의 바닷가 집 한 채를 빌렸다. 해변 인근에는 마을도 자리 잡고 있어서 수잔은 아이를 데리고 조그마한 호텔에 유숙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대부’가 찾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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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서쪽 대서양가 오팔 해안(La Côte d'Opale)이라 불리는 불로뉴 쉬흐 메흐(Boulogne-sur-Mer) 백사장의 오늘과 어제.


아우 으젠과 모친은 에두아르의 하루 일과 중 비어있는 시간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부친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히 채워 넣었다. 수잔과 레옹이 네덜란드에 있을 때는 에두아르, 으젠 그리고 귀스타브 세 형제는 네덜란드까지 수잔을 찾아가서는 마치 견문 여행을 하는 식으로 이런저런 박물관들과 풍치 좋은 명소들을 찾아다니면서 소일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에 네덜란드로 가서 명성이 자자한 박물관들을 찾아다니는 식이었다. 또한 독일을 여행한 뒤,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 세 형제가 그처럼 열렬히 찾아다닌 성적 파트너들이 꼭 프랑스 본토박이 여자들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시대가 하도 천박하다 보니 그들은 겉으로만 얌전을 떨었을 따름이다. 에두아르는 작품을 모사하기 위해 피렌체에서 두 달가량 머문 적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밤새는 줄도 모르고 작품들을 모사하고 복제하고 또 복제했다. 그때 그가 모사한 그림들은 지오토 디 산타 크로체의 작품들이었다. 아눈시아타에서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작품을 베끼느라 여러 날을 보낸 적도 있다.


새로 이사한 몽 따보흐 거리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에두아르는 오스만이 생 라자흐 역 주변을 싹 밀어붙이고 새로운 건물들을 채워 넣고 있는 것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 새롭게 변신한 기차역 주변은 기존의 허름한 건물들을 다 허물어뜨리면서 새로운 석조건물들로 채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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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 La Place du Havre (1893) par Camille Pissarro, Art Institute of Chicago..jpg
1837년 파리에 최초로 들어선 기차역인 생 라자흐 역과 광장 주변의 석조 건물들. 오른편 그림은 피사로가 묘사한 르 아브르 광장.


‘유럽의 교차로’라 불리는 곳에서부터 그가 살고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비좁은 비탈길은 사라지고 뻥 뚫린 대로가 들어섰으며, 더군다나 길가에는 웅장하면서 위풍당당한 모습의 석조건물들이 늘어만 갔다. 건물 정면은 참으로 현대적이었으며 눈부실 정도로 번쩍거렸다.


또한 기찻길이 생겨나면서 멀리 시골까지 기차들이 오갔다. 기찻길은, 생 라자흐 역은 그처럼 신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새롭게 바뀔 세계의 청사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속도로 변화해 갈 것 또한 분명했다.


시간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될 판이었다. 어찌 되었든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바로 역 주변이었으며, 에두아르는 속내로 이를 환영하면서 더는 자신의 가족이 살던 세느 강 좌안 부호한 중산층 동네이자 관청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있는 파리에서도 가장 번들거리는 지역으로 되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으제니는 자식들에게 새로운 변화의 생성지로 이사 갈 것이라고 누차 이야기했다.


“내 판단엔 그곳보다 더 싸게 작업할 공간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그와 같은 말로 남편까지 설득했다.


1856년 여름 이른 아침 에두아르의 두 가족은 거대한 공사장 터로 바뀐 바티뇰 지역으로 달려가서 각각 500평방미터(160평)에 조금 못 미치는 신축 아파트 두 채를 장만했다. 스스로 대단히 유복한 집안이라고 자랑하는 마네 가족은 클리쉬 가 69번지에 자리 잡았고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던 린호프 가족은 생 루이 거리에 안착했다.


레옹이 다니는 학교가 위치한 일명 바티뇰 가로 불리는 오텔 드 빌 거리와 등을 맞댄 놀레 거리는 이미 오스만 세느 도지사의 주도하에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해 있었다.


오스만은 파리 도처에 길을 만들었다. 새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이미 나있는 기존의 거리들을 정비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파리에 숨통을 틔게 만들어 신선한 공기를 쐬게 만들어 줄 것이란 환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특히 바티뇰 지역이 그러했다. 이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로막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단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몽마르트르 마을은 1860년에 파리에 병합되었다.


어찌 되었든 두 집안이 한 구역에 사는 바람에 밤마다 에두아르는 용이하게 두 집을 오갈 수 있었으며, 수잔이 은밀하게 마네의 모친에게 레옹을 보여주는 일도 가능해졌다. 으제니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렇긴 해도 마네의 모친은 온통 금발의 머리카락에다 우스꽝스럽게 길쭉한 귀를 한 어린애를 마네 가문에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아이의 할머니가 되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렇게 할 권리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에게 부과된 도덕적 규범까지 위반하면서 아이를 집안에 들일 권한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따라야 했던 종교적 규범이 그러했다. 그녀 또한 스스로 자제했다. 그녀는 저항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이 자명했다.


레옹은 친할머니라 할 수 있는 으제니를 가리켜 마니라 불렀다. 이 마니란 호칭은 레옹이 스스로 생각해 낸 호칭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외할머니인 오마와 구별하기 위해 파리 친할머니 격인 으제니를 줄여서 부르는 호칭이었다.


으제니는 아이에게 자신의 온정을 고백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에게 그런 마음이 조금만 더 강력했더라도 레옹을 자신의 정상적인 친손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몽소 공원에서 아이는 그렇듯 자애로운 자신의 마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따금씩 우연한 일도 벌어졌다.


아니 실제 상황에서 으제니가 우연히 창문을 내다보고 있을 때마다 수잔이 귀여운 어린애를 모래밭으로 데리고 가는 게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렇다. 조금만 더 그녀의 감정이 동요했더라면, 모든 게 정상적인 분위기로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건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네는 부모의 날에 항상 모습을 나타내야만 했다. 그는 늘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기회만 있으면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따금씩 그는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한 번은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주 거만한 변호사협회 회장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자리에 모여있던 이들이 집안의 아들이 가슴에 온갖 훈장을 다 달고 있는 법리사에게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당신께서는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적이 감돌면서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방으로 조용히 돌려보냈다. 그러고 난 뒤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 아버지는 아들을 몹시 꾸짖었다.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질문에 네가 그렇게 대답한 것은 무례하면서도 불손한 짓이다. 법관이 되기 위해선 재능 따위는 필요 없어. 하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선 당연히 재능이 있어야만 하는 거다. 만일 네가 법학만 공부했더라면, 그게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너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 법관들은 최소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들이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막무가내로 에두아르는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그건 그의 제2의 천성이었다. 모든 것을 전복시키고 만 제2 제정 하에 그 역시도 비천하게 전락하고 말 운명과도 같았다.


친구들한테도 에두아르는 빈정대기를 좋아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애 아빠가 된 탓인지는 몰라도 모든 것에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노는 데 일가견이 있고, 환상에 가득 찬 짓에 골몰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태도를 지닌 이들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동반자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전혀 태깔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점점 더 시대적 관습과 규약에 스스로 굴복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고통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관학풍의 행태에 스스로 항거하면서 에두아르는 머릿속에 자신이 생각하는 회화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애정을 갖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보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루브르에서, 꾸뛰흐 화실에서 그리고 들라크루아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요리할지를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조리법만큼은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르익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요리를 할만한 몇몇 음식 재료들이 부족했다. 그는 고심하여 구상했다. 그리고 요리했다. 하지만 그릇이 넘칠 만큼 너무 많은 걸 그릇 하나에 담으려 했다. 그는 온전히 홀로 무언가를 갈구하면서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를 스스로 되물었다.


예술의 원천이 될만한 모든 재료들을 다 다룰 수 있는지 또한 고민했다. 꾸뛰흐 화실에서 수업을 하는 동안 화가로서의 면모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마네는 적어도 앞으로 그가 해서는 안 될 모든 것을 보고 익힐 수밖에 없었다.


마네는 여전히 탐색을 해야만 했고, 그가 느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그건 자신만의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요컨대 화가가 된다는 건 화가로 태어나는 것이다. 먹잇감을 사냥할 줄 아는 호랑이처럼, 허공을 날 줄 아는 새처럼, 마네 역시 마네 다운 그림을 그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것으로 삼기를 계속해 가거나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루브르를 자주 드나들던 수많은 복사화가들 가운데 그는 새로운 동료를 알게 되었다. 키가 엄청나게 큰 젊은 친구는 삐쩍 마른 몸에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꿰뚫어 볼 정도로 파란 눈동자에 맑은 눈빛을 지니기까지 했다. 마네가 새로이 알게 된 앙리 팡탱–라투흐라 불린 친구 또한 에두아르처럼 인물화를 즐겨 그리는 화가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앵그르의 모든 작품들을 다 섭렵한 뒤에 마네가 막 쿠르베 작품에 대해 서두를 꺼내자 앙리는 에두아르에게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누군가가 쿠르베에게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과도 같이 화폭을 완성해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쿠르베는 그 말에 “나는 전능한 신과 같이 그림을 그릴 뿐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쿠르베의 행동에 있어서나 발언 심지어는 그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마네에게 있어서는 너무 극단적이기만 했다. 쿠르베는 확실히 재능을 타고난 이가 틀림없었으나 너무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일주일째 몽마르트르 기슭에 위치한 들라크루아란 나이 많은 거장의 아틀리에에 친구 프루스트와 함께 찾아가고자 공을 들인 마네는 “한 번 가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마침내 두 청년이 늙수그레한 대가의 아틀리에 문을 두드리자 두 청년에게 있어서 들라크루아는 너무 노쇠한 거장의 모습으로만 비쳤다. 그의 56살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힘이 넘쳤고 신경질을 잘 내는 성격에다가 음흉하기까지 했으며, 눈동자나 머리카락 색깔이 온통 검을뿐만 아니라 작고 마른 체격이었다.


예술가 무리들과는 동떨어진 채 냉랭하면서도 기품 있는 이 고독한 인간은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을뿐더러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갈망하던 스승도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한눈에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루벤스의 작품 세계를 일러주었다.


한 번은 마네가 「단테의 작은 배」를 복제하는 것을 작가가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이를 기꺼이 허락했다. 그러자마자 두 청년은 그의 그림을 복사하는 것에 갑자기 이상하게도 흥미를 못 느꼈다. 작품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마네는 낭만주의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마네는 들라크루아를 대단한 인물로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마네의 기대를 저버렸다. 마네는 들라크루아에 대해 냉랭해져만 갔다. 아주 못마땅한 심정까지 들었다.


프루스트가 마네의 태도에 대해 증언하기를, “요컨대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5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인간을 묘사할 능력조차 없는 화가는 대단하면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을 결코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나쁘진 않지만, 그건 모두가 이야기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특히 낭만주의에 대하여.”


1854-1858, Copie de La Barque de Dante de Delacroix.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들라크루아가 그린 단테의 거룻배 복사화」, 1854-1858.








[1] 앙리 팡탱-라투흐(Henri Fantin-Latour), 「들라크루아를 추모함(Hommage à Delacroix)」, 1864,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그림 속의 인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맨 앞 착석하고 있는 이들로 루이 에드몽 뒤랑티(Louis Edmond Duranty), 앙리 팡탱-라투흐(Henri Fantin-Latour ; 이 그림을 직접 그린 화가), 쥘 샹흘뢰리(Jules Champfleury),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보이고, 서있는 이들로 루이 꼬흐디에(Louis Cordier), 알퐁스 르그호(Alphonse Legros), 잠므 위슬레흐(James Whistler),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휄릭스 브라끄몽(Félix Bracquemond), 알베르 드 발르화(Albert de Balleroy)가 보이며, 정중앙에는 으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자화상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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