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24화
[대문 사진]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세느 도지사. [1]
4장 2
(1857-1859)
아틀리에에는 뜻이 서로 통하는 동료가 한 명 있었다. 아주 잘못된 길로 들어선 화가였다. 마네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부유했으며 귀족이었으나 촌스러웠고 적극적으로 예술을 애호하는 이였다.
말을 타고 사냥개를 동원하여 사냥을 하는 그림만 그리는 화가였다. 매번 관전에 입상하는 경력도 다채로운 그는 외눈박이 안경을 쓴 채 한껏 맵시를 부린 모습이었다. 붓을 다루는 솜씨만큼 이름도 허풍으로 가득 차 알베르 드 발르루아란 이름으로 불렸다.
아틀리에에서 한바탕 격렬한 소동이 있은 뒤로 마네는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기 전까지 낮에는 아틀리에에 들르는 법이 없었다. 무공을 세운 것처럼 자랑스럽게 보였는지 알베르 드 발르루아는 이 반항아적 기질을 소유한 마네에게 자신의 화실 한쪽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엄청난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가 사용하게 될 작업실은 마들렌느 지구 근처였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안뜰에 면한 드넓은 건물의 지상층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마네는 그와 함께 일종의 동호회 성격을 띤 대단히 개방적인 귀족-멋쟁이 사교계 모임을 구성할 수도 있었다.
마들렌느 지구는 거대한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연일 망치질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면서 놀라운 일마저 벌어졌다. 오스만은 마들렌느 지구를 무차별적으로 쓸어버렸다. 공포의 대명사로 불렸던 오스만은 4년간을 세느 도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도심을 확장한다는 구실로 파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고대의 유적과 르네상스 문화유산을 간직한 로마에서는 이런 뻔뻔하고도 대담한 도시 개조가 단 한차례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역사 유적과 옛 시가지가 그대로 남아있는 수도 파리의 도심을 새롭게 뜯어고치겠다는 발상은 도시를 혁신적이고도 실용적이며 생활에 편리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한 명목으로 자행된 공사는 지상의 외부 공사로 만 그치지 않고 도심 전역에 걸쳐 지하 하부구조 공사로 이어졌다. 지하에 새로 짓는 모든 건물에 수돗물을 공급할 상수도를 설치하고 철저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기존 건물들에게 상수도관을 연결하였다.
한 편으로 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세느 강 위로 새롭게 교량들이 들어서는 가운데 도심 한복판에 화장실 수세 장치 설비까지 갖추었다. 오스만은 가난한 신분 – 위험한 계급에 속한 시민들을 변두리로 추방시킬 계획도 잊지 않았다.
또한 파리 사방 몇 리외(거리의 단위. 1리외에 약 4킬로미터에 달함)에 걸쳐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번잡한 길들을 체계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밤에는 환하게 불을 밝혔다. 이로 말미암아 파리 외곽에 이르기까지 달빛 환한 밤에, 바람 부는 저녁에조차 가로등들이 거리를 환하게 불을 밝혔다!
가로등 덕에 갑자기 야간에도 일반 시민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지면서 이에 대한 욕구 또한 비등해져만 갔다. 이러한 욕구는 피곤한 삶에 기분 전환을 꿈꾸던 중산층 계급에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났다.
조르주 으젠 오스만 남작은 무질서하게 뻗어있는, 늘 공공 위생에 문제가 되고 있다고 판단한 5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골목길들을 정비하는 가운데 130킬로미터에 달하는 넓고 곧고 앞이 탁 트인 대로들을 건설하였다. 이는 또한 하층 계급에 속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시에 이들을 향해 아주 용이하게 대포를 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1848년 촉발된 파리 바리케이드 민중봉기의 불길은 아직도 여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다시 활활 타오르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황제는 파리에 대한 도시 계획을 변경할 것을 지시하였다. 민중이 봉기했을 시에 재빨리 군대를 투입하여 이들을 진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황제는 인심이 후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하여 파리지앵들에게 새로이 오페라 건물을 기증했다. 그뿐만 아니라 휘황찬란하면서 번화한 대로들을 잇달아 건설하면서 동시에 새로 지은 공연장들을 지었다.
파리 거리는 완전히 새롭게 혁신되어 갔다. 대체로 파리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밀어붙이고 새로 지은 건물들로 채워 넣었다. 결국 총 12,000여 채의 건물들을 싹 쓸어버린 셈이었다.
루브르는 튈르리 궁전과 연결되었다. 새롭게 조성된 거리에는 수많은 갤러리들이 들어섰다. 일반 시민들이 오가는 이탈리아인들의 대로는 최신 유행을 좇는 속물들로 바글거렸으며, 이 밖에도 몽마르트르 대로, 카푸친 대로, 본 누벨 대로 등은 현대적인 혁신으로 완전히 무장한 변화의 물결은 라피트 거리에까지 스며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라프트 거리에 자리 잡은 서로 제일을 자랑하는 사립 갤러리들은 저명한 화가들의 혁신적인 현대성을 띤 작품들을 전시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루브르를 새로이 증축했을 때에 파리 성곽 내 거주하는 시민들은 1백만 명 이상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때에 옛 성곽들이 부서지고 새로운 파리 경계가 설정되는 걸 시민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에 제일 먼저 기만을 당한 하층 계급에 속한 시민들 모두가 무더기로 밀려들면서 그 숫자가 10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다. 파리와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몽마르트르와 바티뇰 같은 마을들은 파리에 병합되었다. 이들 마을들은 예술가들을 비롯하여 강도나 도둑, 불량배들이 피난처로 삼은 곳들이었다.
한 가지 더 오스만 덕분으로 파리에 전염병이 도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1849년에 발생한 콜레라로 16,000명이 사망한 사건은 아직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폭동이나 봉기는 금지되었고 범죄 행위 또한 금기시되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남작은 자신의 방식대로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기조 재상은 백만장자라는 새로운 신분 계층을 만들어냈다. 이 신흥 신분 계층은 ‘돈이 돈을 번다는 신조를 철저히 따르는 부르주아들’이었다.
한편으로 무주택자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강이나 숲 기슭에 임시로 움막을 치고 기거하던 집 없는 사람들은 현저히 눈에 띌 정도로 부자들과 서민들 간에 깊은 골이 나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궁핍한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 천연두가 급속도로 퍼져 마침내 유럽 전체를 유린하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원을 짓고 교량을 건설하고 기찻길을 새로이 닦으면서 기차역을 새로 짓는 공헌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짧은 시기 동안 동시에 마구잡이로 파리를 건설 현장으로 변모시켰지만, 파리의 모든 지역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1] 1860년 역사화가 아돌프 이본(Adolphe Yvon)이 묘사한 나폴레옹 3세가 파리를 포함하여 수도권을 관장하는 세느 도지사인 오스만 남작에게 파리 교외의 코뮌들(오퇴유, 파시, 바티뇰, 몽마르트르, 라 샤펠, 라 빌레트, 벨빌, 샤론, 베르시, 보지라르, 그르넬)을 파리에 합병하는 법령을 하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