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보들레르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25화

by 오래된 타자기


4장 3
(1857-1859)



마네는 오랫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드는 걸 즐겼다. ‘유럽의 교차로’라 불리는 거리에서부터 바티뇰에 이르는, 몽마르트르에서 마들렌느에 이르는, 이탈리아인들의 대로에서 포부르그 몽마르트르에 이르는……. 그는 오스만 스타일의 현대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그의 삶 역시 현대적인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민, 시민은 바로 잔해더미에서 새로이 출현한 그와 같은 신인류를 가리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동시에 과거의 인습에 물들어있으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퇴폐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란 이중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했다.


요컨대 보들레르의 생각이 그러했다. 반은 일시적이며 덧없을 뿐만 아니라 충동적인 인간이면서 나머지 반은 영원하고도 불변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


나이 20에서 30에 이르는 시기에 마네의 모습은 광적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도 늘 우수에 차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쾌활한 모습은 여전했다. 마네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이 풍속이나 취향은 물론이고 윤리의식에 이르기까지 전통의 토대나 원리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전통에 따르는 모든 기법까지도 전복되기에 이르렀다.


1857년 마침내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처음 출간되자 전위 문학예술 운동을 전혀 도외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마네는 오히려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진정 이 시인과 여러 면에서 생각이 일치함을 느꼈다. 마네 역시 보들레르와 같은 분노를 체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질의 비애감까지도 느끼고 있었다.


Charles Baudelaire, Les Fleur du Mal avec une illustration de Manet.jpeg
Charles Baudelaire, Les Fleurs du Mal, 1945.jpg
마네가 그린 초상화가 수록된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


마네는 보들레르를 만나는 걸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외모와는 딴판으로 거침없는 말투나 태도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그런 심사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또한 분위기상으로 그런 심사를 털어놔야만 할 상황임에도 스스로 피해 갔다.


모친의 거실에서 정중한 표현으로 황제 경호부대장인 르조슨느는 으스댔다. 그는 붓같이 생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턱수염을 흉내 낸 것이었다. 황제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중 앞에서 망신만 당했다. 그의 생김생김이 황제와 너무 닮았다는 점이 그 주된 이유였다.


군인이 공화주의자라니! 그의 우상은 빅토르 위고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본래의 모습을 띠지 않은 것은 간혹 위험할 수도 있었다. 시를 애호하는 열정에 못 이겨 너무도 진지하게 모든 시인들을 다 받아들인 탓이었다.


투뤼댄느 거리에 있는 거실에서 르조슨느는 도둑같이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자신의 당질에게 마네를 소개했다. 조카는 화가를 만나기 위하여 몽펠리에에서 막 올라온 참이었다. 잘못된 건 아니지만 조카는 자신에게 타고난 재주가 있다는 걸 결코 믿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 젊은 친구는 프레데릭 바지유였다.


프레데릭 바지유는 일찍이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글레레 문하에서 미술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는 르조슨느의 집을 비롯하여 발르루와 백작, 바흐베 도레빌리, 나다르 그리고 브라끄몽, 꽁스탕탱 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정치적 망명을 고려 중인 위고의 절친인 폴 뫼리스 집에도 나타났다.


마네가 보들레르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와 같은 저녁 모임에서였다. 보들레르는 항상 눈에 띌 만큼 늘 모임에 참석하면서 전통 추종주의자들과는 다른 예술가들 사이에 끼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행색이나 차림 또한 눈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매끈하게 면도한 얼굴에다가 양 입술은 침울한 표정을 띠었으며 새카만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하고 심지어 에테르와 아편에 중독되기까지 한 샤를 보들레르는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르조슨느 경호대장 저택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길로 잘못 들어선 여인처럼 얼굴에는 분칠을 하고 작은 손톱마다 매니큐어를 바른 채 금색 단추가 달린 헐렁한 파란색 옷차림에 커다란 깃이 달린 셔츠를 입고 그 위에다가 검은색 넥타이를 맨 마치 단두대에 끌려가는 듯한 복장을 한……. 시인의 모습은 마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Charles-Baudelaire en robe bleu.jpg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시인과 화가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는지 두 사람은 서로 금방 어울렸다. 시인은 37살이었고 마네는 26살이었다. 그들은 거의 형제처럼 서로를 대했다. 그들은 똑같이 도시에 사는 걸 즐겼으며, 불순한 쾌락에 물들어있었던 탓에 마치 견습 선원처럼 들뜬 마음으로 대양을 꿈꾸면서 그들의 삶에 무언가를 찾아 나서겠다고 작정하지 않았던가?


charles baudelaire et édouard manet.jpeg 시인과 화가


그렇듯 그들은 똑 같이 바다에 일렁이는 거친 파도를 저어가겠노라는 드넓은 대양을 꿈꾸는 향수에 젖어 서로가 서로를 이끄는 가운데 파도의 물보라에 취해갈 수 있었다.


“천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렇게 화장할 수가 있나!” 프루스트가 저녁 모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시인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뭐라도 하나 재능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을 맞받아친 마네의 수사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시인은 라부와지에흐 거리에서 그 예리한 눈으로 마네가 더욱 급진적인 모더니티(예술에 있어서의 현대성)를 추구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을 거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저속하지 않으면서도 늘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명석한 작품과 인간 모두를 좋아했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우아한 옷차림은 상대방을 신임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작용했다. 그는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아니 이리저리 떠도는 유랑인의 삶을 사는 보헤미안을 꺼려 했으며, 그런 이들과 가까이 있으면 그들에게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궁핍함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대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술 취한 인간들의 저속하고도 야비한 말과 행동을 몹시도 싫어한 탓에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술 취한 인간들은 한 번 말을 내뱉으면 지칠 줄 모르고 계속 같은 말을 지껄여댔다.


보들레르는 마네가 없애지 않은 몇 작품들을 통해 그의 감성을 파악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네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새롭게 시도하고자 옛 탁월한 거장들의 작품들을 열심히 복사해 갔다.


보들레르는 그러한 흔적들을 마네의 초기 작품들에서 가까스로 발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보들레르는 마네를 가족처럼 대했다. 참으로 낭만적 기질을 지닌 시인다운 처사였다! 이는 삶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마다할 서로 간의 진한 우정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죽을 때까지 이 우정은 계속될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신을 파괴해 버릇한 탓에 자신의 운명 또한 급격히 기울어져 갔다. 더군다나 중간중간 자신이 바라던 것들에 열광하는 생기마저 끊어진 탓에 점점 시들어갔다.


마네는 그런 그에게 아무 사심 없이 전폭적으로 손을 내밀고 그를 북돋아 주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그에게 도움을 주려 애썼다. 보들레르는 자주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시인은 파리에서 사는 동안 내내 목이 마를 때마다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네를 찾아가곤 했다. 두 사람은 만나서 그들이 애호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대로에 위치한 카페들인 토르토니 카페나 바드 카페를 전전했다. 날씨 좋은 날에는 튈르리 공원 안에 있는 간이주점들을 찾아가 햇빛을 즐기곤 했다.


이 간이주점들에서 열리는 최신 유행의 사교모임은 그들의 왕래를 기꺼이 환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황제의 궁정 안에 자리 잡은 온갖 싸구려 풍의 너절함에 경련을 일으켰다.


새로운 풍속도에 따른 시설들은 우후죽순 모든 공원에 들어섰으며 점점 그 수를 늘려가는 추세였다. 정자 스타일의 가건물인 키오스크들은 음악인들이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었다. 공원을 찾은 일반 시민들은 맑은 공기 속에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를 즐길 수 있었던 이유로 공원마다 키오스크들 또한 급속도로 늘어만 갔다.


Le kiosque.jpg 파리의 공원마다 들어선 키오스크(Le kios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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