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30화

by 오래된 타자기


5장 2
(1860-1862)



에드가 드가는 프랑스로 망명한 두 집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쪽 집안사람들은 가짜 귀족이긴 하였지만, 진짜로 은행가였던 사람들이다. 그런 에드가 드가는 팡탱과는 아주 판이한 인물이었다. 드가는 파리의 앙리 꺄트르(Henri IV)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온갖 수단을 다 발휘하여 화가가 되었다.


드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에 상당히 매료되어 개인 소장가들의 저택에서 사환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아버지가 찾아내어 일을 시키려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


드가의 취향으로 볼 때, 다른 어느 것보다도 소묘가 그의 적성에 맞았다. 선묘를 하는 손놀림의 근육을 더욱 발달시키기 위하여 드가는 보자르(파리 국립현대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를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싫증을 느꼈다. 학업을 작파한 그는 가족이 있는 이탈리아로 내뺐다.


이탈리아로 간 드가는 나폴리,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등지에서 이탈리아 예술을 두루 섭렵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눈으로 익힌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깨달은 그는 친척들의 집안일을 도우면서 말 타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드가의 숙모 한 명은 로마에 사는 벨레리 남작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나폴리에 사는 모르벨리 공작부인이었다. 그는 두 곳을 오가며 점차로 사교계 모임에 드나들면서 세속적 쾌락을 좇는 속물이 되어갔을 뿐만 아니라 교만한 태도 또한 몸에 배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드가는 귀스타브 모로를 알게 되었다. 모로는 키가 작았을 뿐 아니라 수염을 기른 모습에 약골이었다. 모로는 재능을 타고난 8살이 나 아래인 집안의 막내의 사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드가는 숨 쉬듯 그림을 그리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라파엘로가 그린 것보다 훨씬 라파엘로적인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모로는 드가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고 드가가 들라크루아나 앵그르에 눈 떠가도록 도움을 주었다.


드가는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동료들 모두와 대립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의 화폭에 그들이 이야기한 모든 것들을 총합하기만을 꿈꿨다. 그는 마침내 온갖 기법을 다 활용하고자 작정했다. 요컨대 자신만의 고유한 기법을 스스로 찾아낼 때까지는. 이러한 노력은 선묘의 대가로 인정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드가는 색채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덮어버렸다.


흥미롭게도 모로와의 인간관계가 삐끗거린 것은 이야기가 담긴 그림에 대한 의견 충돌 때문이었다. 기이한 생각에 골몰해 있던 귀스타브 모로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야기를 담은 그림만이 회화에 있어서 전적으로 으뜸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드가 드가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내 싫증을 느꼈다. 그리고 더는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그 역시 모색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모색의 시간을 가졌고 또한 그때마다 주저했다. 예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역시도 자기와 같은 부류에 속한 동료들처럼 여러 해에 걸쳐 그와 같은 암중모색의 기간을 거치면서 자기 형성 과정의 수순을 밟아갔다.


색채로 완전히 선회한 이후로 드가는 동작이나 몸짓, 표정에 생각이 꽂혔다. 심지어는 인물화에까지 이를 적용했다.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일상적인 풍경을 담은 그림이나 너무도 평범하여 진부하기까지 한 그림에 매달리기도 했다. 영웅주의에 입각한 그림에 대한 거부는 드가로 하여금 결국 팡탱과 마네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영속적인 죽음에 고취 받은 드가는 여성들을 위한 장신구를 제조하는 공방에서 예쁜 금발의 모자를 만들고자 시도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역시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이번에는 욕조 밖으로 막 나서는 아리따운 여성의 놀란 표정을 묘사하고자 애썼다.


Eugène Delacroix, La Mort de Sardanapale, 1827-1828, Paris, musée du Louvre.jpg 으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군주 사르다나팔의 죽음(La Mort de Sardanapale)」, 1827-1828,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드가는 사진 기술도 익혔다. 그리고 사물을 정확하게 그대로 재현하는 매력에 홀려 신들린 듯 사진을 찍어댔다. 화가이자 사진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탁월한 사진가가 된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음악과 춤에 빠져들었다. 음악과 춤은 그에게 어떻게 하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할 수 있는지를 터득하게 만들어주었다.


드가가 찍은 사진. 1872년부터 드가는 사진을 통해 회화 작품 안에서 공간 구성을 색다르게 하는 방법을 궁구하였다.


음악과 춤의 세계에 빠져 연주가들이 등장하는 인물화들을 제작하면서 한편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에 춤추는 무용수들을 곁들이는 새로운 화면들을 점층적으로 구현해 갔다. 회화 상의 오페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신랄한 혹평이 이어지자 그에 대해 구미가 당기던 것마저 싹 가셨다. 하지만 보다 생생한 표현을 획득하면서부터 자로 잰듯한 몸에 꼭 들어맞는 옷을 제작하기 위한 마치 가봉한 옷에 핀을 꽂듯이 작업을 이어나갔다. 이때가 무시무시한 전제군주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그는 무용수들이 두 발을 서로 마주치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앙트르샤를 하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 때아니게 아주 나른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는 불안정 상태에 동요하는 듯한 비약적인 묘사를 통해 생동감 어린 표현까지 획득했다.


드가는 삶 속에 감춰진 비밀마저도 들춰내고자 시도했다. 그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기법상으로 또한 개념상으로 이를 작품으로 구현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는 예술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동작과 같이 우발적인 사건을 일으킬만한 것이 없다는 걸 납득했다.


싸늘하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마저 캐기 좋아하는 냉랭하기만 한 드가의 태도는 그처럼 익살맞기까지 했다! 드가 덕분에 마네 또한 이중의 의미를 띤 해학으로 가득 찬 표현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유주의적 태도와 잔인할 정도로 심한 익살적 표현들을 두 사람은 서로 경쟁하듯 이어갔다. 이따금씩 경멸에 찬 표현을 구사하면서 두 화가는 빈정거림을 통해 익살과 풍자적 표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을 두 사람은 지속해 갔다. 기존의 작품들의 경향으로 선행하기도 하고 그것을 넘어서기도 하면서 이 둘을 적절히 구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일언지하에 그만두기조차 어려웠던 신랄한 표현들은 두 사람에게 되레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외려 그러한 표현을 점차로 늘려갔다.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 탐욕스러운 입술, 에드가 드가야말로 탁월한 화가라고 마네는 판단했다. 마네 역시 모든 면에서 드가와 같은 모습이었다. 문화를 애호하는 태도나 온건주의자적인 태도, 우아함, 해학 심지어는 재능에 이르기까지,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한 진지한 의문들로 말미암아 서로 같은 입장임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물들어 있던 드가는 현대성에 입각한 사실적 표현(리얼리티)을 획득하고자 자신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마네만큼이나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무언가를 찾아 헤매 다녔다. 비범한 지성, 표면상의 아름다움을 좇는 감수성, 색채나 붓질 솜씨 등과는 대조적으로 드가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히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갔다.


드가의 모친은 그가 14살 때 사망했다. 그때 이후로 이성과 섹스할 때마다 어려움이 따랐다는 걸 떠올렸다. 드가는 마네가 말하는 바를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을 그 역시 똑같이 해보라고 권하는 친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여자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과 새로운 친구가 이야기하는 시선, 즉 오직 여자들을 유혹하고자 바라볼 뿐인 시선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그는 통절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는 이가 없는 루브르에서만큼은 서로 뜻이 통했고 의견이 일치할 때에는 모든 게 가능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자마자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물론 마네가 친구로 삼은 새로운 유행만 좇는 댄디가 세상과 예술을 개혁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 망명자들로 들끓던 카페에서 이목을 끌었음은 당연하다.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드러낼 줄 모르던 팡탱은 카페를 드나드는 모든 이들과 어울려 술만 들이켰다. 드가는 그들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췄다. 주위에 있던 그들 모두가 마네의 절친의 말 한 마디마디에 귀를 쫑긋거리며 소름 끼치는 감동을 느꼈다.


마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친구 없이는 절대 혼자 점심을 들거나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 도취될 만한 애정을 지닌 것이 아무것도 없던 샤를 보들레르만이 오직 아편을 피우며 세기말에 욕설을 퍼부어댈 뿐이었다.


마네와 드가 이 두 사람은 그와 같은 급진적인 태도를 참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는 배겨 날 수 없는 관계였기에 보들레르는 두 사람에게 자신의 나이 든 정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보들레르는 아무 보잘것없는 이 혼혈 백인 여자에 대해 자잘하게 속내의 마음을 털어놓듯이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자신의 동거녀를 ‘두 엉덩이를 맞댄 동료’쯤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는 그녀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를 입증하듯 보들레르는 너무도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인 투흐나숑이 찍은 그녀의 사진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투흐나숑은 일명 나다르라 불렸다. 나다르가 찍은 사진 속의 그녀는 아름다웠을까? 아니다. 그녀는 너무도 괴상망측한 여자였다.


보들레르의 입에서 나다르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에드가 드가는 자리에 더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만사를 제쳐놓고 나다르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사진에 대한 강박관념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회화 작품을 위해서라도 사진 찍는 기술을 더 향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들레르가 나다르의 작업실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나다르의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너무도 술에 절어있었다. 그때 보들레르가 질투 섞인 말을 꺼냈다. 대단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Atelier de Nadar (1).jpg 파리 카퓌신느 대로변 35번지에 소재한 나다르의 아틀리에. 1874년 이곳에서 저 역사적인 인상주의 첫 전시회가 개최된다.


“지성으로 번쩍번쩍 빛나며 쾌활하고 명랑해 보이는 자네의 두 눈을 보면 내 눈은 이미 먼 것 같아. 마치 병든 눈처럼 불타지만 생기가 없는 눈 말이야. 뭐든지 꿰뚫어 보듯이 살아있는 눈빛이어야 하지만 내 두 눈은 이미 흐릿해지고 말았어.”


나다르와 마찬가지로 드가 역시 시인이 시를 읊듯 심중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중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넨 행복하게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야. 난 불행하게도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고. 자넨, 자네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지 않나……. 자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지 않나 말일세. 난 이제 머리카락마저 다 빠져버리고 앙상하고 초췌해졌을 뿐이야. 마치 새장에 갇힌 새 같은 꼴이라네.” 보들레르는 침울한 어조로 탄식에 젖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들 모두는 법적으로 독신이었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일 필요가 있지.” 드가가 잘라 말했다.


마네의 더 없는 친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한 사람 수잔과 레옹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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