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32화
5장 4
(1860-1862)
마네는 또한 늘 수잔에 빠져 살았다. 처음 그녀를 사랑할 때의 마음은 여전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내 마네는 그녀의 모습을 그리기까지 했다. 루벤스는 자기 방식대로 조각처럼 아름다운 네덜란드 여인을 화폭에 담았다.
벌거벗은 채 미소 띤 얼굴로 수잔은 포즈를 취했다. 이건 매번 마네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려는 의사 표명과도 같았다. 마네는 수잔 곁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림은 수잔이 결혼의 대가로 요구한 것이었다. 거기까지가 마네가 루벤스를 베낀 부분이다. 한 쌍의 남녀 주위로는 무지개가 둘러싸고 있으며 사냥개가 자리하고 있다. 이 한 쌍의 남녀는 당연히 마네와 수잔이다. 둘 다 18세기의 플랑드르 지방 전통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그림에다가 「낚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목처럼 그림 속 저 멀리로 강이 보이면서 레옹이 낚시질을 하고 있다. 레옹 옆으로 누구보다도 레옹의 말을 잘 따르는 개 한 마리가 아이 곁을 지키고 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참으로 생경한 장면을 담은 그림. 이는 회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이 그림을 그린 것일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물의 요정을 그린 그림은 루벤스의 작품 「목욕하는 수산나」란 작품에서 그림의 모티프를 취한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수산나가 바로 물의 요정임을 알 수 있다. 물의 요정은 바로 마네가 사랑한 수잔이다. 자신의 연인을 묘사하기 위하여 그는 늘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마네가 스케치한 「개를 데리고 노는 아이」란 그림은 자신의 아들과 다툰 끝에 마음이 상했는지 완성하기를 포기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다. 아이가 자신 때문에 겪고 있는 정신적 혼란을 포착한 탓이다.
아틀리에에 홀로 있는 것만이 마음 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몇 달씩 화실을 비워둔 채, 가족들이 있는 아파트에서 지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마네는 가족들로부터 착상을 얻은 그림들을 그리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제까지 아틀리에와 아파트를 오간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파트에서만 지내야만 하는 강요된 구속이 빚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새로운 아틀리에에서 마네는 고통스러워했다.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는 목매달고 죽은 어린아이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너무도 조급하게 아틀리에를 벗어날 것만을 선택한 참혹한 결과였다.
두 가족이 각기 살고 있는 아파트들 가운데 한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작된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여러 번에 걸쳐 그렸을 뿐 아니라, 아내 역시 여러 번 그림으로 완성했다. 마침내는 자신의 부모까지도 대형 화폭에 담았다.
「칼을 들고 있는 아이」라는 또 다른 작품에서는 레옹을 다시 한번 묘사했다. 이는 끊임없이 그를 억누르는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담아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자 그린 그림이 확실했다. 레옹은 자신이 무언가를 집중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틀리에에서 모델이 되어 가만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걸 좋아했다.
‘대부’가 자신을 그리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레옹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부가 왠지 좋아졌다. 그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던 탓이다. 또한 그럼으로써 그와 자신이 다르다는 걸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부모의 초상」에서 마네는 정치한 붓놀림을 통해 부모의 특징적인 모습을 선취하고 있다. 그림 속의 아버지는 중풍에 걸린 모습이다. 자리에 몸져누워있는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다. 곁의 아내는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사직서를 남편 대신 쓰고 있다.
노신사는 겨우 몇 마디 말을 내뱉고 있을 뿐이다. 뭔가 주저하는 눈빛에 말을 더듬는가 하면, 전혀 다른 헛소리를 늘어놓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간혹 아주 이따금씩 참으로 공손한 태도로 무슨 이야긴가를 꺼내기도 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주 상스럽고도 추잡한 용어를 섞어가면서.
아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탓에 으제니는 혼자서 남편의 온갖 시중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은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팔과 손도 못쓰는 처지였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아픈 아이처럼 돌봤다. 남편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운동 실조증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형제 중에 아버님이라 부른 아버지를 어느 누구 한 사람 이제 더는 두려운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중풍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동정하고 나섰다. 아버지는 오직 눈으로만 말할 뿐이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눈빛을 마네는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온전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아버지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 그가 땅에 묻던 아이의 눈빛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는 까닭 모를 돌연한 공포와 절망과 증오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를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그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감정을 누그러뜨린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의자에 꼼짝 못 하게 앉혀놓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감을 도저히 감추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자 그는 벙어리처럼 말을 잊은 채 울부짖었다. 무슨 까닭에 이렇게 일찍? 아무런 수식조차 붙을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였다. 고통스러워하는 눈빛……. 마네는 그런 아버지를 일부러 모르는 체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과 영원한 삶을 갈구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수잔과 레옹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전혀 모르는 채일까?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태다. 에두아르 역시 아버지의 심중을 더는 알 길이 없었다.
모친 또한 집안의 음울한 분위기 탓인지 두 눈빛이 슬픈 표정이기만 하다. 자식으로서 마네는 암담함에 겨운 그와 같은 눈빛을 그리지 않고는 도저히 스스로 배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자는 비밀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지켜가고 있었다. 그림 속의 어머니의 눈빛은 그래서 감정을 애써 누그러뜨린 표정이다.
화가가 자신의 부모를 그린 그림이 이 한 점밖에 없다는 게 놀라울 뿐이지만, 화가가 더는 이러한 시선을 다룬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랍기만 하다. 그림에서 유일하게 명랑해 보이는 바탕에 인물과 잘 어울리는 색조로 옷들이 담긴 광주리를 배치했다.
이 같은 묘사는 완벽한 정물화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나 거의 유일하게 작품을 생기 있게 만드는 요인으로까지 작용한다. 바탕을 장식하고 있는 묵직한 마호가니 가구의 적갈색 톤과 공화주의자 중산층 가정임을 여실히 증거하는 분위기는 서로 구색을 맞추고 있다.
암울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마네는 자신의 그림 안에 오직 자신이 기억하는 부분만을 담은 것인가? 어린 시절에 대한 중압감과 젊은 시절의 침울한 분위기만을? 벌거벗은 수잔을 그린 그림은 자신의 사랑을 난관에 부딪히게 만든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이었다.
사랑은 과거가 완전히 잊힐 때까지 마네를 계속 감싸고돈다. 레옹을 그림으로써 그는 자신의 회한을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었다. 이는 둘이 서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복선으로 암시한 것이다.
다시 여유를 되찾은 마네는 스페인 버전의 작품을 그리던 시기로 회귀하여 「기타 치는 사내」와 같은 작품을 완성한다. 스페인은 「스페인 가수」를 그린 그림이 호평을 받은 덕에 충분히 유행을 탈만한 소재였다. 그런 이유로 마네는 「스페인 가수」를 「부모의 초상」과 함께 관전인 미술전람회에 출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