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33화
[대문 사진] 마네와 일군의 화가들이 드나들던 게르부아 카페 [1]
5장 5
(1860-1862)
마네는 바티뇰 가에 위치한 수잔과 레옹이 살고 있는 발코니가 딸린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생활 반경이 거의 클리쉬 광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 세 개는 각기 거실과 부부 침실 그리고 식당으로 나뉘었다.
거실엔 수잔이 친구들로부터 기증받은 커다란 피아노가 놓였고, 그 옆으로는 밤마다 레옹이 잠자기 위해 접이식 침대를 펼쳐놓았다. 마네의 부모와 형제들은 거리 위쪽에 살았다. 클리쉬 대로 9번지에 게르부아라는 카페가 생기면서 마네는 그곳에 드나들었다. 마네와 함께 뜻을 같이하는 행복한 그림쟁이들 집단은 쌍수를 들고 이를 반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인들의 대로에 위치한 호화로운 카페들을 찾아다니지 않은 건 아니다.
예술인들의 모임을 다시 결성한 그들은 매일 저녁 게르부아 카페에 모여들었다. 게르부아는 아직도 근교의 전형적인 주점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원과 가끔씩 결혼식이 열리는 정자와 제국 문양이 새겨진 빙글빙글 도는 구식 회전의자들을 갖추고 있었다.
안쪽 깊숙이 자리한 커다란 공간은 정원과 연결되었고 당구대들도 놓여있어 흡사 당구장을 방불케 했다. 천장은 유리로 덮여있어 천장 아래로 햇살이 한껏 쏟아져 들어왔다.
마네는 유리창 앞을 선호했다. 그가 늘 앉아있는 곳은 입구에 자리 잡은 흰 벽에 장식을 한 홀이었다. 벽은 온통 거울들로 뒤덮여있어 불빛마저 환하게 비췄다. 그곳이 그만의 자리였다. 드가, 시슬레 그리고 팡탱이 매일 저녁마다 카페로 마네를 찾아왔다.
금요일 저녁에는 지방에 살고 있는 이들까지 몰려온 탓에 항상 만원을 이뤘다. 다소간에 모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던 이들은 변함없이 항상 자리를 지켰다. 나다르라 불린 투흐나숑, 데부탱, 꺄바네흐가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실크 셔츠를 입은 가난뱅이 뒤랑티는 자신이 메리메의 자식이라 주장하는 걸 한 번도 굽힌 적이 없었다.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모습을 한 샤를 크로, 자칭 화가라 생각하는 가셰 박사는 파리 북역 철도청 소속 의사였다.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었으나 단 한 번도 술값을 계산한 적이 없었다.
쿠르베가 가끔씩 느닷없이 들이닥쳐 험악한 목소리로 모여있는 이들에게 훈수를 둔다고 소동을 피웠다. 마네는 그걸 말리자니 한계를 느꼈다. 혹시나 하는 요행을 바라고 모임에 끼어든 이들도 있었다. 피사로, 스테방, 제르베, 휘슬러, 기유메 등은 낡은 수법을 버리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었으나 술집에서만큼은 진한 동지애를 느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모두가 마네 주위에 몰려든 이들이었다.
카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다양한 색조의 아름다운 도자기들을 파는 가게 아래쪽에 가게가 또 하나 잇따라 붙어있었다. 세느 강 우안에서 제일가는 미술용품들을 판매하는 에느깽이란 상호가 붙은 상점이었다. 화가들 모두가 이곳에서 물감을 사다 썼다.
색채를 더욱 강하게 하거나, 덧칠하거나, 아주 근사할 정도로 투명한 상태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혼합물을 섞어 제조한 특이한 안료들을 화가들은 그곳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제품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꾸뛰흐의 영향 하에 놓여있던 마네에게 꾸뛰흐는 이들 안료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파리가 새롭게 변모하면서 미술 실기를 지도하는 화가 양성소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화가 지망생들 또한 도처에서 쇄도했다. 에느깽은 이들 화가들에게 물감을 대주는 주요한 공급처였다. 할부 판매까지 하였던 까닭에 마네 주위로 모여들던 화가들도 항상 이곳에서 물감을 사서 쓰곤 했다.
가게를 드나드는 화가들만큼이나 마네를 높이 평가하는 화가들 역시 점점 늘어만 갔다. 마네의 실력을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의 지갑만을 반긴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드가나 팡탱 그리고 보들레르처럼 세느 강 저 멀리에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걸 썩 내키지 않았던 마네이긴 하였으나 글레흐 아틀리에에서 작품 제작에 정진하던 르누아르라 불리는 새로운 얼굴과 르조슨느의 조카인 바지유를 낚시로 건져 올린 것은 다행 중 다행이었다.
이 두 사람은 마네라고 하는 인물의 매력에 빠진 것은 물론, 예술에 대한 그만의 기발한 생각에 감동하여 라 꽁다민느 거리에 위치한 커다란 화실을 빌려 지리적으로 마네와 가까워진 이들이다. 그 덕분에 빠른 시간 내에 마네는 르누아르와 시슬레와 교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을 알게 된 이후로 르 스위스 아틀리에에서 또 다른 새로운 얼굴을 알게 되었는데, 모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내였다. 모네라는 이름에 무척 민감한 반응을 보인 마네는 모네가 진짜 이름이라는 걸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그같이 자신의 이름을 변형시켰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 비슷한 예술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마네와 모네는 예술가들이 쉽게 빠져버리고 마는 함정과 계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서로 나누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 사람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가 집단 안에서 동지애를 느끼고 나아가 격렬한 투쟁을 거치면서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제도권 예술로부터 구속과 압제를 받는 신세에 처하게 되면서 훨씬 격렬한 동지애를 느끼게 되었다.
글레흐는 자신이 속한 장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작품의 틀을 가능한 한 재빨리 잡을 것과 야외에서 그림 그릴 것을 적극 권유한 거의 유일한 존재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모든 부분에 걸쳐 조롱과 야유를 받는데 이골이 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예술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있었기에 공동으로 그들만의 선구적 작품들을 완성해 갈 수 있었다. 그들 모두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공통 요소는 일부러 의도한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그렇듯 그들이 그린 그림들은 한결같이 야외 풍경을 담고 있으며, 작품상의 모델의 거부, 평범한 주제, 점점 밝아져 가는 색조, 속도감, 확실한 몸짓, 자유분방한 터치, 동작의 세세한 표현과 끝나지 않은 마감질 등은 그들의 작품에 공통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치 ‘유사한 것들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실험들을 계속해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동지애에 입각하여 붓이라는 무기를 든 채 말이다.
1861년 미술전람회 또한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위하여 한 장소에서만 작품을 전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화가에게 있어서 전람회에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은 화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작품이 팔린다는 것 또한 그것도 작품이 많이 팔린다는 건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관전을 계기로 마네는 다시 한번 극히 중대한 문제들을 스스로 제기했다. 그에게 있어서 작품이 전시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증명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동시대인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작품을 전시한다는 건 곧 작품이 팔린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야만이 먹고살 수 있고 밀린 작업실 임대료 또한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순간만을 고대하며 화가들은 자신이 속한 아틀리에에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문하에 많은 예술가들을 거느린 글레흐는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주로 큰 소리로 떠들듯 오직 작품의 소재들만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실기 지도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또한 모든 기법을 한꺼번에 구사하는 요령을 터득하라는 식이었다. 그가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그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없었다면, 차라리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나을 뻔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 간의 단단한 결속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늘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휴가도 함께 떠났다. 바르비종 화가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식이었다. 그들은 바르비종에서 적당한 가격에 숙식을 해결해 가면서 인근의 퐁텐블로 숲을 산책하는 호기를 누렸다.
그들은 즉석에서 예술 축제를 열기도 했다. 보자르의 거칠고도 조악한 조롱과 야유를 조금도 개의치 않아도 될 만큼 그들만의 축제의 예술 한마당이었다. 매달 그들은 무도회를 개최했다. 그들 스스로가 주인공인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가장무도회였다. 바지유는 「네슬르의 탑」을 공연했다. 보들레르와 샹흘뢰리, 뒤랑티, 그리고 그들의 동료 문필가들은 「맥베드」 공연에 참석하여 즐겁게 여흥을 즐기고 있는 환쟁이들과 웃고 떠들고 소리 지르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연일 쾌청하고도 맑은 날씨가 이어지자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가능한 한 늘 오가는 파리의 거리들로부터 또한 늘 지나치는 분수들로부터 멀리 벗어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파리와 생 제르맹 간 철도가 부설되면서 파리와 가까운 인근 지역의 전원생활이 가능해지기 시작하던 때와 맞물려 파리를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 또한 자연 비등해져만 갔다.
파리와 교외를 잇는 간선철도의 영향으로 화가들 역시 파리 근교의 세느 강변에서 여흥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 덕분이기도 했다. 화가들에게는 작품을 판 돈이 있었기에 야외에서 여흥을 즐길만한 충분한 여유가 생겼다.
당시까지만 해도 생 제르맹 지구는 적은 돈으로 거대한 아틀리에 건물을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한창 오스만의 도시 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던 파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이었다. 그런 까닭에 화가들은 그곳에서 충분히 여유만만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군다나 보자르의 입김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레흐 문하생들이 수시로 겪고 있는 동료들 간의 괴롭힘도 전무한 곳이었다.
아무것도 거칠게 없는 곳에서 그들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살아있는 모델을 앉혀두고 실기에 임할 수 있었다. 매달 3주간은 남자 모델들을, 마지막째 주에는 여자 누드모델들을 아틀리에로 불러들였다.
여자 누드모델이 등장하는 한 주일에는 희한하게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세잔과 기요맹 그리고 피사로가 별안간 들이닥치자 아틀리에 있던 이들은 그들을 카페나 축제로까지 끌어들였다.
그들은 행복하게도 서로의 속내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의기 투합하였다. 그들이 하는 작업에 관해서라든가 남보다 더 나은 표현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과 동시에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경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예를 들어 화구와 캔버스, 이젤, 물감, 물감을 희석하는 테레핀 유, 솔, 붓, 작업용 칼 등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단골 메뉴는 어린 매춘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를 차지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조리법까지 서로 일러주면서 성정마저 공유해 갔다.
모네는 항상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오직 르누아르만이 난처하고도 거북한 이야기를 꺼내 들며 입담을 과시했다. 르누아르는 전혀 어려운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르누아르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림을 그린다는 건 숨 쉬는 일과 같으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르누아르는 병마개 이론을 꺼내 들기도 했다. 바람이나 파도가 물결치는 대로 물살에 떠내려가게 내버려두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둥, 흐르는 물을 멈추고자 전혀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들 가운데에서 가장 점잖고 자상하기까지 한 이는 피사로였다. 낱말의 본래의 뜻에 따른 적확한 표현을 구사하는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들 가운데 피사로가 제일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술값을 내겠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남의 속 사정까지 헤아리는 세심함과 더불어 기품마저 갖춘 인간적인 태도는 피사로야말로 진정 참다운 사마리아 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불러일으켰다.
피사로는 그 자신 역시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잃어버린 개들을 한데 모아 기르는 대범함까지 지녔으며, 어머니와 형제들, 심지어는 6명의 아이들을 부양하면서 장 그라브가 발행인으로 있는 무정부주의자 신문인 <항거>에 대한 재정 지원마저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중·고등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길거리에 서는 시장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이들 예술가 집단에서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드가와 마네는 논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자신들의 견해로 예술가 집단을 주도해 나갔다.
오직 이 두 사람만이 통렬한 야유와 함께 추잡하고 외설스러운 말들을 쏟아냈으며, 반어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나미 떨어지는 표현이나 간교한 술책을 동원한 화법까지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간혹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대체로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상호 간에 충분히 이야기될 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동지애를 느끼는 입장에선 약간 사정이 달랐다. 누구보다도 맨 먼저 거론할 수 있는 이는 폴 세잔이었다. 그는 마네를 극도로 혐오했다. 마네가 스스로 터득한 파리지앵만의 우아함과 남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기품은 어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세잔은 단지 마네가 면전에서 불쑥 내뱉는 거칠고도 무례하며 상스럽고도 버릇없는 말투를 지적했을 따름이다.
게르부아 카페에 도착하여 먼저 와있던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중에도 세잔은 보란 듯이 마네의 악수 요청을 거절했다. “전 당신과 악수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8일간이나 손을 씻지 못했거든요. 당신에게는 불결함만 끼칠 것 같아서!”
마네가 최대한 상냥한 태도로 세잔에게 오늘 대화로 나눌 준비한 내용이 뭐냐고 묻자 세잔은 소리 지르듯 강경한 어조로 대답했다. “똥으로 가득 찬 항아리요.” 모임이 있고부터 마네는 원칙적으로 상대방에게 성질부리며 화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극도로 흥분하여 편집광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세잔과 인간관계에까지 이르는 일만 없었더라도 그를 대하는 태도에 그 어떤 변화도 생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네는 그가 그린 그림을 알아볼 때마다 “아! 바로 그 작자로군!” 하곤 되뇔 정도였다.
마네만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클로드 모네는 항상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배고픔 속에 잠을 청하곤 했다. 모네는 살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보아도 수중에는 돈 한 푼이 없었다. 그가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어쩌다가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은 그런 모네를 늘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을 타고난 덕분이었다! 마네 역시 모네를 따뜻하게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은밀히,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비밀리에,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장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그 역시도 자기로 된 식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또한 생존을 위해 햇볕가리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까지 했다.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는 정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햇볕가리개에 꽃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하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카페 간판 장식 일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만일 르누아르가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삶을 영위할 수만 있었다면, 그에게는 예술 따위조차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르누아르는 식품점 주인이 자신의 아내 초상화를 그려준 대가로 준 완두콩 한 포대로 연명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는 꽤 긴 세월을 밥벌이를 위해 운수 좋게 초상화가로 일했다. 비록 그가 그리는 초상화가 점점 조금씩 식료 잡화점 주인 여자에서 상류층 여인네들로 바뀌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드가의 결코 양보하지 않는 비타협적인 태도는 논쟁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논란까지 부추겼다. 마네와 함께 드가는 남이야 신경 쓰든 말든 두 사람 좋을 대로 여인네들의 옷차림이라든가 여자들이 애용하는 모자 형태에 관한 원색적이고도 쓰잘데없는 이야기들에 심취해 둘이 소곤대며 시시덕 거리는 짓을 즐겨 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별것 아닌 것에도 벌컥 화를 내곤 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화해했다. 마네는 드가를 가리켜 드가가 매번 강력하게 말발을 세운다는 점에서 곧잘 드가를 지휘관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서로 둘도 없는 친구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마네가 무엇보다도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마네가 카페에 앉아있을 때 앞을 지나가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이건, 섣부르게 설익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여자이건 간에 마네는 정말 여자들을 좋아했다. 아마도 마네의 뇌리 속에 보들레르의 시 「앞을 스쳐가는 이름마저 모르는 여인에게(À une passante)」가 선명히 새겨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그대여! 내 사랑했던 여인이여. 오! 그대여! 내 그대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던 여인이여.”
젊은 예술가 집단에 대한 미술전람회(Le Salon)의 일방적인 거부는 그들의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카데미의 일방적인 배척(ostracisme : 옛날 그리스에서 위험한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 따위에 써서 투표하여 국외로 추방하던 제도) 또한 역설적으로 젊은 예술가 집단으로 하여금 그들이 바라던 바를 실천하게 만들었으며, 단단한 결속을 통해 그들 모두가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전람회가 그들의 실력을 형편없다고 판단하면 할수록, 또한 그들의 태도가 지나치게 도전적이라 여길수록 그들의 유대감은 더욱 단단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참담한 결과를 바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관전의 배척은 그들이 열렬히 열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무시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탓으로 그들은 현실적으로 몹시 배고플 수밖에 없었다.
[1]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석판화. 일명 ‘마네의 카페’라 불리던 「게르부와 카페(Café Guerbois)」, 1869, 크기 26,3 × 33,4 cm, 워싱턴 D.C.,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