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41화

by 오래된 타자기


5장 13
(1860-1862)



빅토린느가 일상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회화 작품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 마네는 주목했다. 그것만으로도 마네가 빅토린느를 좋아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거리의 여가수는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의 여주인공이 되고, 투우할 때 사용하는 검을 휘두르는 「투우사 복장을 한 여인」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매번 마네가 빅토린느를 그릴 때마다 비난이 쏟아지고 그녀가 그를 상대로 가르랑대는 소리를 감춘 항의가 빗발쳤다. 관전에 선보이기도 전에 마네가 그린 「목욕」은 온갖 충격적인 뜬소문을 불러일으켰다. 빅토린느는 자신이 모델이란 직업에 그렇게 빨리 그것도 열렬히 빠져들게 만든 마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녀는 유명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될 것이며, 붓질 한 번만으로도 스캔들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상당히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매일 아침마다 기요 가에 위치한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빅토린느는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 탓으로 전날 취했던 포즈와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을 화폭에 담을 화가를 감동시키곤 했다.


그런 그는 오직 그녀만을 그렸다. 「목욕」을 완성한 이후로 그녀의 알몸에 꽂혀 그녀의 누드만을 화폭에 담았다. 그녀는 알몸 상태일 때가 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그렇게 꾸밈없이 만들어진 듯한 몸이었다.


에두아르는 외설적이고도 음란한 그림들을 그려가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빅토린느의 알몸을 계속 다룸으로써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비루하고 추잡하기까지 한 그림들을 그리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관능적 쾌락을 향한 그의 음탕함이 한 번 그림에 빠져들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계속되어 온 아틀리에를 차고 넘치게 만들었다.


만일 아버지의 운명이 조금만 더 늦춰졌더라면, 예컨대 수잔은 마네와 결혼할 수도 있었을까? 가톨릭 신자인 마네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온갖 추문을 떨쳐버리지 않고는 결코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녀로서는 기쁜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그것도 자신의 가족과 함께 결혼식을 치른다는 기쁨,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편견들을 다 물리칠 수 있다는 기쁨이 그녀를 에워쌌을 것이 분명했다.


합법적으로 볼 때, 초상을 치러야만 하는 기일은 늦춰질 수 없으며, 그전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수잔에게 약속했다. 해가 다하기 전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아버지가 명을 달리 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마네는 관전에서 낙선한 동료들의 작업을 격려하고 지지하고 나섰다. 어느 순간 마네는 동료들로부터 피사로와 함께 연장자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피사로가 마네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 동료 집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마네는 자연스레 권위마저 갖추게 되었다.


마네를 둘러싼 동료 집단에 속한 화가는 휘슬러, 브라끄몽, 종킨드, 피사로, 스테방, 팡탱-라투흐, 르누아르, 모네, 드가 등이었다. 마네는 아주 지혜롭고도 총명한 방법으로 동료들의 작업과 자신이 이제껏 해온 작업을 서로 비교 분석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모색해 갔다.


마네는 자신이 상탄해 마지않는 것 앞에서만큼은 늘 하던 버릇대로 거의 반사작용과 같이 혀를 내둘렀다. 바다를 바라볼 때나 빅토린느의 얼굴과 몸을 번갈아 쳐다볼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순간 감동의 물살이 밀물져 차오른 탓에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건 말 그대로 감탄이었고 탄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감동하는 순간 어떻게 말로 표현할지, 특히 어떠한 색조로 표현할지를 궁구했다. 동료들의 작업을 지켜보는 순간에도 마네는 항상 동료들이 무엇 때문에 심각할 정도로 쓸데없는 것에 빠져있는지,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나 솜씨가 어떤 면에서 혁신적인지를 판별해 내려고 애썼다.


이젠 더 이상 아버님이라 부를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애타게 갈구하던 완전한 자유가 온전히 주어졌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놀라게 할 이유조차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바처럼. 이제 더는 중압감에 시달릴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마네는 아무런 간섭이나 제약 없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에 자신마저 놀랐다. 다가오는 관전에 과감하게 맞설 작품으로 이번에는 어떤 작품을 준비할 것인가? 빅토린느는 항상 마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는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와 더불어 다른 욕망도…….


자! 이젠 결정되었다. 「남녀 짝을 지은 두 쌍」만 완성하면 된다. 마네는 귀스타브와 페르디낭을 질펀한 여흥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페르디낭은 수잔의 동생으로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각기 고유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두 사내는 화가의 능란한 솜씨로 절묘하게 배치되었다. 두 사내가 즐거운 연회에 참석한 것처럼 표현하고자 일부러 우아한 옷차림을 한 모습으로까지 묘사했다.


빅토린느는 화면 맨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로 피크닉을 즐기려고 준비한 물품들이 어질러져 있다. 또한 그녀가 앉아있는 주위로 벗어던진 옷들이 널려있다. 벌거벗은 몸을 한 채, 그녀는 마네를 뚫어지듯 훑어본다. 마네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치환된다.


그런 탓에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 교차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멀리 원경으로 보이는 숲속의 빈터엔 빛이 가득하다. 때가 봄이라는 걸 일러주듯 온통 초록빛이며 푸르기만 하다. 또 한 명의 여인은 반쯤 옷을 벗은 채, 물속에 막 들어갈 태세다. 그게 아니라면 막 물 밖으로 나서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제기랄! 그는 남녀 두 쌍을 너무 작은 화면에 가둬놓았다!


Le Bain ou Le Déjeuner sur l'herbe.JPG 에두아르 마네,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위한 습작」, 1863, 애슈몰린 뮤지엄 소장, 옥스퍼드, 영국.


화급히 좀 더 큰 화폭에 그들을 다시 끌어들인다. 엄청난 크기다. 가로 2.14미터에 세로 2.10미터! 이제까지 이렇게 큰 화면은 다뤄본 적이 없다. 두려움마저 든다. 하지만 맘에 든다. 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이 같은 크기의 캔버스를 준비한 이는 없을 것이다.


이 그림이 진짜 혁신적인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너무도 평범한 인물들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은 크기의 그림은 이제까지 성서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종교화나 신화적 주제를 다룬 그림에서나 가능했을 따름이다. 화폭에다가 인물을 실물 크기로 그린다는 건 적어도 이 그림이 로마풍을 따라 하고 있다는 증거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Bain ou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아틀리에에 마네와 빅토린느 둘만이 있게 되면서 그녀의 누드 포즈가 차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대담한 자세로까지 한껏 변화한 것이다. 그녀는 정말 자신이 마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기대 이상으로 마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돕고자 노력했다.


또한 마네로 하여금 관전에 출품된 작품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과거의 진부한 방식과 무르고 싱거울 만큼 지나치게 꼼꼼히 묘사해 버릇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인위적으로 내세운 등장인물들과 일화적이면서 너절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을 그림에서 과감하게 척결할 것을 부추겼다.


이런 점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4명의 인물들은 화가가 엄밀하게 아무 뜻 없이 그리고자 작정하고 그린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온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해야 할 이유는 그처럼 단순하다. 다른 이유는 전혀 게재하지 않는다.


색채에 의한 나무랄 데 없는 화면 구성으로 등장인물들은 그들 간에 서로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이, 또한 바라보는 관객과 어떠한 대화마저도 필요치 않은 화면 한가운데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창조가 이뤄지는 순간의 저 입마저 얼어붙은 침묵의 심연 속으로 진입하는 중이다. 자연의 저 깊고도 엄청난 고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이건 단지 그림일 뿐인가? 덧붙일 필요조차 없이 단지 한 폭의 그림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림다운 그림이다. 무슨 이야긴가를 들려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따른 의도를 표출한 그림이거나 짐짓 격식을 차린 그림이 아니다.


진실을 담은 회화란 과연 어떤 것인가? 진실에 입각해서 완성한 회화 작품 말이다. 정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