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43화

by 오래된 타자기


6장 1
(1863)



패배를 당했다 해서 굴욕을 당한 건 아니다.

추방되었다 해서 죽은 목숨이라 생각할 이유 또한 없다.


- 폴 베를렌느



거부! 1863년에 개최된 관전은 마네를 거부한다. 그가 출품한 그림들 가운데 유일하게 작품 하나만 거부된 것이다! 처음으로 관전을 통과한 건 물론 관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뒤로 2년간을 오로지 작업에만 매달려 다시 한번 수상을 거머쥘 것을 꿈꾸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건만, 온갖 열정을 기울인 작품은 보기 좋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이번에야말로 꼭 입상하리라 믿었던 작품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게 무너지는 듯했다.


낙선! 하지만 마네 혼자만 낙선한 건 아니다! 관전에 출품한 이들 가운데 낙선한 이는 부지기수였다. 마네로서는 충분히 위안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낙선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다.


관전에서의 낙선은 자존심을 흠집 내고 들뜬 마음을 여지없이 산산조각 냈으며, 야망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나마 잔존해 있던 조국에 대한 열정과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한 애정과 공화국에 대한 정통성마저 부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관전에서 낙선한 이들은 부지기수였으며, 분격한 이들은 노발대발 관전을 향한 무시 못할 분노마저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들의 분노는 국가수반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회의를 개최해야 할 정도로 극렬한 불협화음을 야기시켰다.


마네의 작품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날, 이를 곧바로 이행할 것을 추인하는 청원서가 심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전격적으로 통과되었다.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불만은 나폴레옹 3세에게로 향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황제! 자신들을 위한 단체나 모임조차 결성할 줄 모르는 속칭 개인주의자들이었던 그들은 각자 황제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탄원하고자 애썼다. 단지 맨발로 뛸 뿐인, 사회 하층계급에 속한 예술가들 주제에 아카데미의 견고한 상아탑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기까지 한 그들은 결국 심한 불평불만만 터뜨린 꼴이었다.


관전은 매 2년마다 개최되었다. 각자 조직위원회에서 심사받을 수 있는 작품 개수는 규칙상 작품 3개로 한정되었다. 심사위원들에는 예술가 출신 공무원들이 위촉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그들이 관전에 출품된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과 낮은 평점을 받아 출품자체가 거부된 작품들의 여부를 결정했다.


매 2년마다 출품된 작품들의 숫자는 점차로 감소하고 있었다. 하여간 올바르고 정당한 심사를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까마득한 일이었다! 도합 5천 점 이상을 제출한 3천 명의 예술가들 가운데 심사를 거쳐 2천 명을 추려내는 일이 어찌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전년 대비 1299명의 화가들만이 다시 통과되었다. 마네의 작품이 거부당한 1863년에는 988명의 화가만이 관전에 다시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도화된 공식 예술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창의성 있는 작품들을 솔선수범하여 제작할 뿐만 아니라 진취적 기상을 지닌 화가들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감정이 뒤섞인 적대감마저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들은 마흐티네 화랑 같은 곳이나 꺄다흐 갤러리에 전시한 화가들이었다. 동판화 작가 중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관전을 통과한 이가 없었다. 브라끄몽이나 그가 제작한 「홀바인에 따른 에라스무스」를 보고 어느 누구 한 사람 고전적이라 평한 사람은 없었다.


관전에서 낙선한 작품들 가운데에는 하르피니의 작품도 있었고, 종킨드의 작품도 있었다. 물론 관전에서 이미 입상한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네가 너무나도 고전적인 방법에 따라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작품들뿐 아니라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선점했다고 판단한 예술가들마저도 고배를 마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들 작품들 가운데 단 한 점만이 관전을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거부당하고 말았다. 오직 스테방의 작품들만이 온전히 관전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출품한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에게 아양이나 떠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마네는 관전에 출품된 작품들 대부분이 뛰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생각보다 하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그림들을 또다시 발견한 것에 상당히 실망했다.


관전의 심사 수준은 예술을 옹호하고 지켜준다기보다는 파벌만 조장하고 있었다. 선발된 작품은 그와 같이 기고만장한 중산 계급의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전시된 작품들은 그 이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혁혁한 중산 계급의 위상을 과시하고자 한 흔적 또한 역력했다.


관전은 바지유나 르누아르, 모네, 세잔과 같은 마네의 동료들의 재능을 인정할 능력이 애당초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마네는 동료 집단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떠들썩하게.


그들은 카페에 모여 관전을 비난하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소란은 금방 퍼져나가 온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화가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한 사람 감히 꿈꾸지 못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파리 제일의 스캔들이 터진 탓이었다.


흥분한 이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점잖았던 마네와 귀스타브 도레가 동료들을 대표하여 프랑스 행정청에 관전을 고발하는 고발장을 제출하기 위해 위임을 받았다. 그들은 격식을 갖춰 관전의 부당함을 알리는 고발장을 당시 조형예술부 장관으로 재직 중인 발레브스키 백작에게 제출했다.


이미 소문을 들어 진상을 파악하고 있던 발레브스키 장관은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상냥한 태도로 그들이 제출한 고발장을 접수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보다 훨씬 덜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요청을 무시한 채 내쫓기 전에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3세. 사회주의 이념에 사로잡혀있던 쿠르베와 마찬가지로 공화주의자적인 태도를 지닌 마네는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를 극도로 혐오하면서 불신했다.


황제는 과격분자들의 불평불만을 담은 탄원서가 어떤 내용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발레브스키 장관과 함께 당시 박물관장으로 있던 뇌이유베르케르크 백작을 소환했다. 두 사람의 변명은 궁여지책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것에 불과했다. 만일 모든 작품들을 다 전시해야 한다면 어디다 그걸 전시할 수 있는가?


약간은 예술에 대한 애호가인 척 행동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훨씬 정치적인 수완을 타고난 나폴레옹 3세는 이 과격 예술가 집단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황제는 자신이 공화국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상 자유주의는 이상 없다는 걸 자부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예술의 자유를 훼손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관전에 다시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2년씩이나 허비해야 함을 그들 스스로 도저히 감내하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들은 황제는 막료들의 조언에 따라 산업박람회 궁전을 활용하여 그곳에 거부된 작품이나 통과된 작품이나 할 것 없이 한 장소에 빽빽이 전시하여 단 한 걸음에 둘러볼 수 있도록 조처했다.


황제 또한 관전을 방문하고는 번잡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정신없이 몇 작품만 훑어본 채, 바로 자리를 떴다. 전시장에 작품을 전시한 작가들은 정기적으로 관전을 통과하고 있는 작가들로서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더군다나 늘 관전에 입상하는 작가들의 작품 이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새로운 변화가 없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떤 작품들이 정기적으로 관전에서 수상하여 전시장에 내걸린 경우에 해당하는가? 또한 그걸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대체 뭐란 말인가? 뒤죽박죽 아수라장이 된 전시장에서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역시도 늘 하던 방식대로 작품을 전시하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시된 작품 모두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란 말인가? 아니라면?


나폴레옹 3세 치정 하에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산업박람회 궁전은 낙선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렇다.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은 공식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옆쪽에 따로 전시한다고 통보받았다. 황제는 낙선작가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심사위원회 방침을 뜯어고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망연자실한 채, 분개하여 들고일어난 심사위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전시 기간을 서로 달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낙선작가들의 전람회가 이로써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악의적으로 그와 같이 명명한 것보다는 한층 수위가 낮은 표현이 고작 황제의 전람회였다. 어찌 되었든 전람회는 같은 날 열리질 못하고 같은 달 다른 날짜에 개최되었다. 전시 규정은 양쪽이 다 똑같았다. 이제 판단은 이를 관람하는 대중에게 맡겨진 셈이다.


퇴짜 맞은 이들을 구제했다고 간주한 황제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치정을 공공연하게 반대해 온 주된 온상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학회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긴 것이다! 아틀리에를 가득 메운 환희에 넘친 승리의 함성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웃고, 울고, 서로 부둥켜안고……. 어떤 이들은 갑자기 불안해지기도 했다. ‘낙선한’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 자체가 조롱 섞인 혹평을 초래하는 건 아닌가? 관객에게 비웃음을 살만한 빌미를 제공하는 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작품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탈락시킨 심사위원들에게 그들의 논리에 타당성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데는 다 같이 의견이 일치했다. 당시 <가제트>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이러한 정황을 여실히 증거 해주고 있다.


“예술가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5월 7일 이전까지 산업박람회장으로 쓰이고 있는 궁전에 전시된 작품들을 되돌려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없었다. 전시 기간만 과거와 달리 변경되었을 뿐, 작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시되었다.”


낙선자들에 관한 공식적인 논평은 “무가치한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논조였다. 몇 십 명만이 늦은 시간에 은근슬쩍 작품을 되찾아갔을 뿐이고, 몇 백 명은 남몰래 아주 이른 시간에 그들의 작품들을 회수해 갔다. 그들의 앞날에 명예가 손상되거나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또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한 위험인물들과 뒤섞이지 않으려 노력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말 그대로 ‘독립작가(앙데팡당)’라 이름한 역사에 기록된 사건뿐이었다.


마네는 그들의 일탈을 비웃었다. 예술가란 자고로 작품을 보여주고 전시하고 스스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는 이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만이 가장 값진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선한 2,800명 가운데 1,200명만이 스스로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관학풍의 예술가들과 대결하고자 위험까지도 불사했다. 샤르팡티에 아틀리에에서 처음 발생한 뒤로 끊이질 않던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항상 좋은 평가를 받기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원 합치에 따른 최고의 결과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의심하지 않았다. 관전의 표적이 된 건 너무도 부당한 처사였을 따름이다. 따라서 복수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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