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주제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51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마네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 1865



7장 2
(1864-1865)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친구들 가운데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이가 위렐 신부였다. 사제 위렐이 사치스럽고 소란스러운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마들렌느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부터 화가와 천주교 사제, 이 두 사람 사이는 더욱 친밀해져 갔다.


마들렌느 지구는 한때 마네가 작업하던 아틀리에가 있던 곳으로 마네는 오가다가 위렐 신부가 주임 사제로 있는 본당엘 들르곤 했다. 신부와는 15년 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마네는 위렐 신부를 카페 같은 곳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전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사제복인 수단을 입은 천주교 사제가 카페를 드나들 일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마네가 자신의 작품을 기꺼이 사줄 사람이 없는 것을 개탄하자 위렐 신부는 마네에게 종교적 주제에 입각한 작품을 한 번 그려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러면 세간의 비난도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종교적 주제에 입각한 작품에 관한 대화를 꽤 오랜 세월 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마네가 그린 「목욕」이 스캔들에 휘말리자 마네는 얼이 빠져 거의 작업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자꾸만 작품 제작을 미뤘다. 그런 탓에 다음번 미술전람회에는 늘 마음에 차지 않을 뿐인 「투우」나 출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Bain ou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1865-1866, Combat de taureau.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투우(Combat de taureau)」, 1865.


투우 장면을 다룬 그림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채, 여전히 수정을 가하려고 화실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맘에 차지 않았지만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제출 기일은 긴박하게 다가오고 화실 한쪽 구석에 잠자고 있는 「비너스」를 출품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위렐 신부의 조언대로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급한 마음에 서둘러 화필로 그려갔다.


1864, Le Christ mort et les anges.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예수 그리스도(Christ mort avec des anges)」, 1864.


같은 시기에 마네는 팡탱-라투흐 아틀리에에서 등장인물의 포즈를 취하면서 친구가 그림 그리는 걸 도왔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 간의 우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고, 극진한 사이로까지 발전해 갔다.


앙리 팡탱 라투흐는 외향적인 성격을 지닌 마네하고는 달리 말 수가 적었다. 더군다나 팡탱은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인 마네보다도 훨씬 더 쉽게 우울증에 빠지는 편이었다. 팡탱의 아틀리에에서 모델이 되어 자세를 취하고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두 사람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서로 친밀해져 갔다. 행운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었다.


팡탱은 생 라자르 가 79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요 몇 년 동안 거의 모든 환쟁이들이 물가가 싼 이 지역 가까이로 몰려들었다. 또한 이 구역에 급작스레 흘러든 거지 떼들과 강도, 도둑, 불량배들이 거리마다 득실거렸고 예술가들 또한 우글댔다.


친구인 팡탱을 웃게 만들고 미소 짓게 하는 일은 온전히 마네의 몫이었다. 또한 팡탱으로 하여금 여자들이 있는 곳을 기웃거리게끔 뻔뻔스러우면서도 방약무인한 태도를 고취시켜 준 사람 역시 마네였다.


팡탱은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팡탱은 마네를 좋아하는 걸 넘어서서 내심 그를 존경하는 마음까지 내 비쳤다. 팡탱은 “골루와 족의 머리를 지닌” 사내와의 우정을 남들에게 과시하는 걸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들라크루아를 추모함」을 다룬 작품에서 마네를 영광의 순간 한복판에 자리하도록 의도하기까지 한 것이다.


Delacroix.jpg 앙리 팡탱 라투흐(Henri Fantin-Latour), 「들라크루아를 기리며(Hommage à Delacroix)」, 1864,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마네가 출품한 2개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와 「투우」는 항상 그렇듯이 형편없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관전은 통과할 수 있었다. “마네를 멀리하자고? 아니야. 다른 이들보다는 차라리 그가 나아. 어떤 경우에도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그가 상식에서 벗어난 좀 괴상한 성격을 지니긴 했어도 우리 낙선한 작품들을 알리고 또한 성공하게끔 만들어준 사람이잖아. 그가 또다시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없고.”


1865, Corrida la mort du taureau.jpg 마네는 투우 장면을 담은 그림을 계속 미루다가 1865년에 와서야 완성한다.


더군다나 마네가 그린 「기타 치는 사람」은 왼손잡이로 잘못 그렸는가 하면, 가톨릭 교리를 통하여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는 무시한 채, 그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까지 남겨놓았다.


이러한 묘사는 위렐 신부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게 아니라, 마네로 하여금 성서적 해석을 비켜가게 하려고 의도한, 편집광적으로 역사적 정확성을 따지기 좋아한 보들레르 탓이 컸다. “벌어진 상처를 그리기 전에 상처 난 곳부터 다른 곳으로 바꾸시오. 아니면 적의를 품은 이들로 하여금 웃음거리가 되게 만들던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마네의 그림은 아무런 표현상의 변화도 없을 것이다. 마네가 하고 있는 일은 회화지 역사가 아니다!



마네의 그림은 회화지 역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보들레르는 마네나 팡탱 할 것 없이 친구들 가까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네의 그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팡탱의 작품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작품에 대한 우호적인 비평마저 쏟아냈다.


마네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말싸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에 의한 상처에 해당하는 옆구리에 난 상처에 대한 논쟁 이후에 보들레르는 마치 구원을 받고 싶어 한 듯이 프랑스를 떠나고 말았다. 그간에 진 빚을 이미 갚을 수 없는 불능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또다시 1,500프랑에 해당하는 상당한 돈을 빌리기 위해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또 얼마를 빌렸을까? 보들레르는 다시는 책이 출간되는 일도 없을뿐더러 그를 갉아먹고 있는 불행에 짓눌려 심적으로 괴로움과 고통만을 느낄 뿐인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을 따름이다.


보들레르는 간헐적으로 이따금 쓰던 글도 그만두었다. 이제 나이 43세에 불과했지만, 너무 때 이르게 일찍 늙어버린 시인은 얼굴빛이 온통 잿빛에다가 항상 침울한 표정이었으며, 온갖 고초를 겪은 모습이었다. 보들레르는 생애의 마지막을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자 작정했다. 시인이 선택한 곳은 프랑스와 붙어있는 벨기에였다.


1865, Charles Baudelaire.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65.


6년 가까이를 함께 붙어살다시피 한 보들레르였기에 시인의 도주는 마네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마네는 보들레르야말로 자신을 변함없이 지지해 주고 자신의 작품을 옹호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기는 하나 시인은 이제껏 마네의 작품을 위하여 단 한 줄의 평도 쓴 적이 없었다. 오직 그의 편향된 시각만을 지적해 주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시인을 좋아한 이유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였다. 그의 기발하고 특출한 지혜와 함께 예리한 시각은 항상 그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마네는 보들레르가 한시바삐 프랑스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보들레르가 회화 비평에 관한 글을 쓰지 않은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보들레르는 더 이상 미술전람회에 관한 평을 쓰지 않고 있었다. 시인의 눈에는 마네가 너무 유명세를 치르려고 하는 듯이 비쳤다.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젊은 패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를 패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62년 마지막으로 발표한 동판화 작가들에 관한 관전평에서 보들레르는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작가로서 오직 마네와 로그로 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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