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59화
8장 1
(1865)
명랑해 보이는 천사야말로 불안에 떨고 있다는 걸 당신은 알고나 있소?
- 샤를 보들레르
무슨 이유로 마네는 자신이 그린 비너스를 보여주는 걸 그처럼 두려워했을까? 하지만 콩쿠르에 출품할 작품은 커다란 크기로 작품을 구상한 것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관전에 출품하기 위한 작품으로 제작한 탓이다.
만일 심사위원들이 마네의 그림을 심사에서 떨어뜨리기로 작정했다면, 마네가 두려워한 것 이상으로 강렬한 그 무언가가 심사위원들에게는 아주 못마땅한 것이어야만 했다.
관전의 심사를 통과할 만큼 수준 있는 작품을 제작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미술전람회 심사 결과에 따른 수치심 말고도 두 번째로 개최될 낙선 전람회에 자신의 작품이 또 한차례 불명예스럽게 내걸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다시 한번 마네를 괴롭혔다. 두려움은 당연히 애초에 작품이 지닌 양면성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입증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1965년의 미술전람회는 「올랭피아(Olympia)」가 공식적으로 출품된 첫 번째 전람회에 해당한다. 누구나가 다 마네가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새로운 그림에 착수해서 제작을 완료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작품을 다시 출품하기까지에는 단지 2년밖에 소요되지 않았던 정황도 그와 같은 생각을 부추겼다.
올랭피아란 이름은 실상 아스트뤼크가 벨라스케즈를 기리기 위해 쓴 시구에서 따왔다. 벨라스케즈가 1649년에 그린 창녀에게 붙인 이름이 올랭피아였고 이 이름은 바로 교황 이노첸트 10세의 애첩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다.
작품이 걸리기 몇 주 전에 마네는 이미 완성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적갈색의 작은 고양이를 빅토린느의 발치에 잠들어있는 검은 고양이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판단하에 자신과 관람객을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로 변모시켰다.
그림 속의 고양이가 마네가 기르는 고양이임이 확실하지만, 누가 그걸 알고 있겠는가? 고양이를 작품 안에다가 그려 넣은 것이 그렇듯 기묘할 수도 있지만, 마네는 사실 고양이를 애지중지했다.
마네는 세상을 향한 의문부호처럼 고양이를 그려 넣었다. 또한 고양이를 가리켜 “어이! 이봐!”라고 부르곤 했다. 왜냐면 고양이란 동물은 부르면 달아나고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자기를 쓰다듬어달라고 온갖 애교를 떠는 선천적 본능을 타고난 짐승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움츠린 자세를 취할 뿐, 전혀 순종하지 않는 짐승이다. 마네는 예술가로서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마네는 늘 자신이 생각하는 고양이 같은 태도를 취했다. 작품 속에 세 번씩이나 모습을 나타낸 고양이는 마네가 늘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하는 전조였을까? 마네는 고양이가 상징하고 있는 에로틱한 의미를 간과하지 않았지만, 세상의 온갖 혼란스러움을 고양이에다가 다 담아내는 것이 부적절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아무것이나 다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버릇이 있었던 탓이다.
마찬가지로 마네는 스스로 기꺼운 마음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포즈를 취한 빅토린느의 알몸이 야기할 불경함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일으킬 소동을 일찍부터 예견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올랭피아」는 「목욕」이란 작품이 야기한 관중의 쇄도와 이전투구의 난장판과도 같은 참극이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혁명이었던 셈이다. 미술계뿐 아니라 마네 자신이 속한 세계와 전쟁을 한 판 치르고자 하는 기상나팔이기도 했다.
마네는 태어나면서부터 날마다 모든 것이 해괴한 짓을 넘어서 온갖 난장판으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그 거대한 난장판의 세계를 반드시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고심했던 것이다.
전람회장에 걸려있는 빅토린느의 알몸을 담은 그림이 불러일으킬 온갖 구설과 억측을 잠재울 목적으로 마네는 아스트뤼크의 시구에서 그림에 대한 발상을 구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마네는 아스트뤼크의 시처럼 운율이 있는 시를 지은 것이며, 알렉상드렝을 꿈꿨다고 주장한다.
이 사악한 시를 제작하는 것을 재빨리 해치우겠다고 작정했지만, 마네는 2년씩이나 허비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시가 친구의 선물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마네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정에 따른 일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마네는 전시회 작품 도록에다가 다음과 같은 시의 첫 행을 수록하기까지 했다.
그때, 꿈꾸는 것마저 지쳐 올랭피아가 잠에서 깨어나는 때
온순한 표정의 검은 피부를 띤 심부름꾼 두 팔 사이 봄은 화창하고
달콤한 대낮에 사랑을 꽃피우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져 밤새 노예가 되었구나.
정념에 불타 밤을 꼬박 새운 싱싱하리만큼 젊은 아가씨…….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이 시구가 아마도 실제 올랭피아를 부인하는데 이바지했을 수도 있다. 일반 관람객들은 산업박람회장에서 개최된 전람회에 손에 작품 도록을 들고 마네의 그림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닐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매번 작품 앞에서 이를 확인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네가 그걸 원하였든, 원치 않았든 간에 이 텍스트는 올랭피아에 관한 것이며, 또한 올랭피아 자체이기도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 누드화가 사실주의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납득하게 되었다. 그림이 너무 설명적인 탓이었다. 순진무구한 젊은 처자를 노래한 아스트뤼크의 시구에도 불구하고 일반 관객들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피부를 지닌, 왼손을 나팔처럼 성기에다 갖다 댄, 손님이 떠난 뒤 다음 손님을 맞기 전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창녀만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값비싼 꽃다발은 온갖 이들로 몸을 더럽힌 매춘부에 대한 한 남자의 사모의 정을 여전히 눈에 띄게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상류층 고객만이 그와 같은 꽃다발을 선물할 수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암시한다. 아랫배에 감사하면서. 그 고객은 지금도 전람회장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에는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목에는 리본을 두른 모습은 그녀의 성행위를 확증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풀어헤쳐진 모습에다가 간발의 차이로 젊은 여자의 작업 연장에 끼워 넣으려 했던 찰나를 다룬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녀가 알몸인 채로 있는 건, 그녀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곳이 정확하게 어딘지를 명시해 주고 있다.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태곳적부터 암흑의 세상에 군림해 온 고양이는 여러 차례 마네의 작품에 등장하였듯이, 지금도 이 그림에서 가장 야릇한 요인으로 등장한 채 오가고 있다.
이 얼마나 가장 타락한 악마의 형상인가! 두 발을 높이 쳐들고 노려보는 어린 고양이를 그리는 데까지 나아간 화가의 심적 상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검은 고양이를 그리기까지 했다. 고양이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고양이야말로 진정 마네이지 않은가? 참으로 음탕하기 짝이 없는.
이상야릇한 분위기는 당당하기 이를 데가 없는 흑인 여자의 영혼 안에 들어찬 음란함과 마찬가지로 고양잇과의 짐승적인 본능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흑인 여성이야말로 하녀이면서 이교도의 신을 섬기는 여자가 아니던가?
마네가 바로 지난해에 그린 「모욕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란 작품과 비교해 보면, 그림 속에 표현된 모든 것이 다 눈에 거슬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그림은 「올랭피아」를 완성하기 바로 전 해에 르낭이 그린 그림의 주제와 가장 근접한 죽음으로부터 최소한의 용서를 빌고자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다뤄진 마네만의 방법 또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평면에 모든 걸 다 집어넣으려 했던 건 그림에서 그 모두가 다 중요하게 다뤄져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얼마나 상궤를 벗어난 짓인가? “만일 세상 모든 것이 다 멋질 뿐이라면, 어느 것 하나 탁월한 것은 존재할 수조차 없을 수도 있다.”라고 디드로는 <르 느뷰>에서 토로하고 있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이 무지몽매한 심사위원들은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면, 가치 없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이 제시한 카테고리나 장르, 등급, 관점 등이 하찮은 것일 수 없었기에 작가가 아무거나 그릴 권리는 애당초 있을 수 없었다.
마네는 무엇이든지 똑같이 중요성을 부여했다. 심지어는 모델이 신고 있는 굽 높은 실내화나 – 웬 놈의 모델에 이르기까지! –, 꽃다발이나, 고양이 – 웬 놈의 고양이! –에도 중요성을 부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스캔들을 일으키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번 미술전람회에서는 최소한의 회화적 논거를 토대로 하여 이를 구실 삼아 마네의 작품을 부정한 것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지독할 정도로 증오에 찬 악평은 오히려 상대방의 재능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꽃다발을 만든 이의 재능까지도!
꽃다발은 그처럼 눈부실 정도로 황홀했으며 기막혔다. 정물화에 대한 평가가 점점 신장되어 가는 중이었기는 하나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평가절하된 장르에 불과할 뿐이어서 정물화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네가 생각한 고상한 장르에 상반되는 장르로서 누드화와 인척 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만일 마네가 고대 미술에서 누드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이는 신화적인 주제에 입각한 것이어야만 했다.
마네는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모든 장르화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장르라는 개념 자체도 우롱하고 야유를 던졌다. 그가 그린 「모욕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종교화뿐만 아니라 역사화, 신화를 주제로 한 회화 상의 장르를 심각하게 훼손한 작품이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한 참으로 대단한 회화 장르란 어떠한 것이란 말인가?
가장 지독하게 성미가 까다롭다고 여겨진 심사위원들은 꺄바넬, 제롬 또한 보나였다. 보나는 드가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화가로서 원로 격인 앵그르 씨와 공통된 예술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나이 많은 소년에게 벌써부터 미스터(Monsieur)란 존칭을 붙여 이름을 호명할 정도였다.
보나는 지나칠 정도로 기존의 예술작품에 빠져있었던 관계로 그의 탁월한 판단조차도 현대적인 작품을 인정하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훈장을 수여받고 메달을 목에 건 이 화가야말로 모든 작가들에게 각을 세우고 가증스러운 적대감을 표출하기 일쑤였던 그야말로 지금이나 나중에나 여전히 똑같은 모습일 제2제정 하의 제국 공식 화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작가들의 숭배의 대상(토템)이기도 했다.
[1] 그림 속 여인은 마네의 부인 수잔 린호프(Suzanne Leenhoff)이다. 마네는 이 그림에서 짐작되듯 죽는 날까지 고양이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