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아 성스러운 외설 2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60화

by 오래된 타자기


8장 2
(1865)



미술전람회 전시장 한쪽에는 마네의 얼굴이 화폭 한가운데 위치한 팡탱-라투흐가 그린 「진실에 붙여 이를 기리다(Hommage à la vérité)」가 걸렸다. 팡탱은 이 작품을 가리켜 축배(le Toast)라 불렀다. 팡탱은 자신의 친구를 아주 선량한 젊은 남자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의 복장을 한 모습으로 표현했고, 마네의 두 눈이 부드럽지만 모든 걸 조롱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렸으나 전혀 무례하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했으며, 군중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는 전혀 없었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마네의 작품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효과를 주기 위하여 마네의 그림 바로 옆에 전시하였다.


그림 속의 마네는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란 보금자리에서 벌거벗은 여인을 둘러싸고 술잔을 높이 쳐든 상태로 축배를 들고 있다. 이는 마네를 우상화한 조각상과도 같은 작품인가 아니면 일종의 알레고리인가? 어찌 되었든 그 둘 모두에 작품의 진실이 담겨있다.


이 그림에서 상당히 매혹적인 부분은 친구들 모두가 벌거벗은 여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바라보는 관람자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직 팡탱만이 예술가인양 관망자의 자세를 취한 채 청중을 바라보고 있다.


4분의 3 가까이 거의 등을 돌린 마네는 은연중에 실크해트 모자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미술전람회가 거의 끝나갈 즈음 팡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받기에 이르렀고 결국 분노심과 비참함을 견딜 수 없었던 팡탱은 작품을 흔적조차 없이 없애버렸다.


Henri Fantin -Latour, Hommage a la verite, 1864.jpg 앙리 팡탱 라투흐(Henri Fantin -Latour), 「진실을 기리다(Hommage à la vérité)」 습작. 1864.


마네 역시 같은 처지에 몰렸다. 이유는 「올랭피아」에 있었다. 일반 청중들은 마네 역시 팡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진실을 보여준답시고 서로 작당하였다고 판단했다. 그 두 사람가운데 마네가 더 추잡하고 더러울 뿐인 진실을 외친답시고, 소리친답시고, 아우성을 떤답시고, 야단법석을 떤 꼴이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미술전람회가 개최된 다음날 프랑스 인이면 누구나가 다 마네의 이름을 알 정도로 마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치욕의 나날을 살아가야만 했다. 「올랭피아」는 온갖 우려를 넘어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목욕」이 폭탄과도 같은 효력을 발휘했다면, 「올랭피아」는 그보다 수천 배나 더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것이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Bain ou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올랭피아(Olympia)」, 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더 이상 아무런 평가나 설명도 붙지 않은 여인의 누드화는 집요하고도 끈질긴 악평을 초래하기만 했다. 일반 대중의 증오나 혐오는 회화작품과는 무관한 것임이 이미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단순한 생각에 오랜 밤들을 지새우면서 마네는 몇몇 썩 좋지 않은 시구들과 구색을 맞춰보겠다는 심산으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지만, 시구와 같은 확실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올랭피아」가 지닌 폭발력은 강력하기만 했고 국가를 전복시킬 만한 국왕에 대한 암살기도와 같은 수준의 테러 행위와 비교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분노의 외침, 소란스러운 웅성거림, 정신착란과도 같은 광분상태는 지속되었다.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군중의 온갖 비난과 멸시에 찬 소동을 잠재우기 위한, 진창을 방불케 하는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만이 급선무였다.


마네의 나이가 이제 서른셋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였다. 십자가의 수난을 당한 건 둘 다 똑같았다. 더군다나 작품을 출품한 지도 어언 네 번째였다.


수없이 쏟아진 비난 가운데 주목을 끄는 몇몇 기사만을 발췌해 보자. 5월 21일 <그랑 쥬르날(Grand Journal)>에 기고한 아메데 깡틀루브의 기사는 신랄하다 못해 거칠기까지 했다.


올랭피아야말로 암컷 고릴라를 방불케 하며, 흑인 하녀가 시중을 들고 있는 고무로 만든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인간 모형만을 연상케 해 줄 뿐이다. (···) 추잡하고도 음란한 생각에 빠져 손마저 흥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면서 오므라든 상태다. (···) 이 여자들이 기혼여성이나 젊은 처자라 여기기에는 그녀들은 너무 용의주도하여 어서 한시바삐 이 광경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폴 드 생 피에르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군중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이 상스럽고도 끔찍할 뿐인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 앞으로, 마네가 그린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상(Ecce homo) 앞으로 쇄도하고 있다. 저 밑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한 예술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조차 이제는 더 이상 무용한 일일 따름이다. 비르길리우스가 단테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지옥의 구렁텅이 속을 통과할 때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지나치면 될 일이다.” (···) “마치 그림 속의 여인을 조롱하고 멸시하려는 듯이 군중이 끝없이 밀려드는 반면, 이를 막기 위한 경호원들 또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다.”


1865, Tête de Christ.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Ecce homo)」, 1865.


가장 가증스러운 일은 마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은근히 그가 침몰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짓일 터이다. 미국식 표현을 빌자면, 희생물로 삼아 린치를 가하는 식이다. 관람객들은 오로지 노골적인 비웃음 속에 야유를 퍼붓고자 그룹을 지어 검은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 앞으로 몰려갔다. 그러고는 올랭피아 앞에 멈춰 서서는 다 함께 낄낄거리면서 목젖이 터져라 웃음을 터뜨리고는 마치 앙갚음을 하려는 사람들처럼 비웃음을 쏟아내면서 참으로 개탄할 수준이라는 둥 분노를 표출한 채 비웃고 떠들어대는 식이었다.


In front of Mr. Manet's painting, Croquis pris au Salon par Daumier.jpeg
Scandale du Salon en 1865 (4).jpg
Scandale du Salon en 1865 (3).jpg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의 삽화.



올해도 비너스 타령이야...
맨 비너스 천지구먼!...
대체 여자들이 뭘 어쨌다구
개나 걸이나 다 비너스를 그린대!...

- 프랑스 일간지 만평



그림 앞에서 난동을 피우질 않나, 그림에 대한 해석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위험한 행동까지 표출함으로써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질겁하게 만드는 소란을 피우질 않나 극히 위험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기만 했다.


모두가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그림이 다른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모든 작품들을 능가할 만한 수준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한 소동은 계속될 참이었다.


마네는 스캔들을 일으킬만한 소지가 충분한 풋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단한 소질을 타고났으며, 모든 걸 전복시킬만한 역량을 갖춘 화가였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그와 같은 소동이나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도 한 예술가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는 없다. 소동은 불행하게도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압살 바로 그것이었다. 거리에서 아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는 꼴이었다.


신문기사들과 팡탱이 그린 초상화 덕분에, 르그로와 나다르가 찍은 사진 덕분에 사람들이 마네의 얼굴을 다 알아보는 촌극이 펼쳐졌다. <피가로> 신문에 실린 온갖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기사 덕분에 마네의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것이다. 가장 최근에 문을 연 식당에서 갓 일하기 시작한 종업원조차도 이 소란을 일으킨 주모자가 누군지 다 알 정도였다. 마네를 알아본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쑥덕거렸다.


하지만 마네는 극렬히 반발했다. “어떤 근거에서 내가 그린 그림이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보다도, 고야가 그린 벌거벗은 마야 부인보다도, 앵그르가 그린 오달리스크보다도 더 저속하고 상스럽다는 것인가? 무슨 이유로 옷을 입은 흑인 여자를 덧붙여 그려 넣었느냐고? 그것 역시 나티에르가 이미 그러하지 않았던가? 클레흐몽 역시 마찬가지로 흑인 여성을 그리지 않았던가?” 무엇이 미덕이란 말인가? 분노와 증오는 그에 대한 타당한 논리가 실종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53-2 Francisco de Goya, Maja desnuda, 1790-1800, Museo del Prado.jpg
43-1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La Grande Odalisque, 1814, Musée du Louvre.jpg
53-1 Tiziano, Venus von Urbino, La Vénus d'Urbin, 1538 Musée des Offices, Florence.jpg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부인」(1790-1800), 앵그르가 완성한 「오달리스크」(1814),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마네는 잠자코 있었다. 입을 다무는 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들이 그린 어느 모델 한 사람조차도 빅토린느처럼 자유로운 여성은 없었다. 너무도 자유분방하게 보헤미안의 연인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도전적인 시선을 던진 모델은 이제까진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너무도 태연한 외설적인 태도가 다시 한번 도마에 오른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다. 리얼리티의 과잉에 관한 문제제기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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