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71화
9장 6
(1867-1868)
1867년 봄, 프랑스는 이미 개최한 바 있는 만국박람회를 다시 한번 개최했다. 프랑스 국민 전체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규모로 기획된 세계 박람회였다. 조직위원회는 늘 하던 대로 박람회장 절반을 차지하는 9백 개에 달하는 부스들을 개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방침을 정했다.
이외의 공간은 다른 참가자들 역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맘껏 사용할 수 있도록 배분했다! 전년도에 관전에 입상한 바 있는 탁월한 작가들의 작품 모두를 한자리에 전시하려는 의도를 띤 조처였다. 따라서 마네의 작품이 그 자리에 걸릴 리는 만무했다.
마네는 1855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 전시장을 떠올렸다. 그가 꾸뛰흐 화실을 드나들 때였다. 미술 실기를 지도하던 꾸뛰흐는 마네를 전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전시회 조직위원회 건물 바로 전면에 쿠르베가 설치한 임시 막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쿠르베는 낙선작들을 한데 모두 모아 자가 전시할 목적으로 임시막사까지 설치한 것이었다.
조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할 수 없는 작품들을 전시한다는 건 말 그대로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짓이나 진배없었다. 만국박람회 축제에 공식적으로 초대받는다는 건 관전에서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는 것과 다름없기에 이미 앞서 성공한 선배들의 뒤를 착실히 밟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 마네로서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으로 쿠르베가 했듯이, 자신도 별도의 전시 부스를 마련하고자 시도했다.
마네는 드디어 형제들과 아내로부터 정신적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어머니의 입장에서 항상 귀여운 아들일 뿐인 모친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마네가 모친으로부터 빌린 돈은 18,305 프랑에 달하는 과분한 금액이었다. 그 돈이면 충분히 자신의 독립적인 작품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부스까지 설치할 수 있었다.
마네는 알마 대교와 몽테뉴 가가 만나는 지점에 아무런 설치물도 없는 정원을 눈여겨보고 그곳을 점찍어 두었다. 그 자리는 박람회장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업박람회장과도 가까운 장소였다. 그리고 자리를 빌리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자마자 바로 공사가 시작됐다.
1859년 이래로 마네는 작품을 전시하고자 꾸준히 시도했다. 이해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마네는 작품을 전시하는 일을 성공시켜야만 했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 뿐 아니라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였다. 만일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거나 다를 바 없을 것이고, 작품을 제대로 전시한다면, 그걸 본 사람들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서로 이웃한 법률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드주이와 귀스타브는 밤새워 마네가 서명한 계약서들이 합법한 지의 여부를 검토했지만, 계약서 상에는 공사를 빨리 진척시킬 만한 권리가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공사는 꾸물대고 있을 뿐, 시기상으로 완공이 너무 늦어버린 탓에 엄청난 공사비용만 충당되고 있었다.
마네는 그러나 확신했다. 모친과 아내도 마네를 확신했다.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만인에게 보여줄 것이며, 자신의 전 작품을 공개할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관람객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그는 땅을 힘차게 발로 차고 뛰어올라 자신이 바란 듯이, 자신이 선택한 듯이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는 만국박람회나 관전에 의한 미술전람회의 문을 예상했던 대로 활짝 열어젖힐 것이 틀림없었다.
마네는 졸라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작품들을 띄워줄 기사를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졸라는 쉽사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물론, 자신의 친구를 옹호하는 팸플릿을 제작할 때까지 처음 마네의 작품을 평한 기사들을 과장하여 부풀리기만 했다.
공사는 마냥 지체되기만 했다. 점점 늦어지는 탓에 절망적인 상황마저 곧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네로서는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술전람회나 만국박람회나 할 것 없이 오픈 날짜가 4월 1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문을 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공사장을 방불케 하는 전시 공간은 도저히 관람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마네에게 이쯤 해서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고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얼 고려할 필요도 없이 마네가 밀어 부칠 수밖에 없었던 건 막대한 공사비용을 이미 쏟아부었던 탓이었다.
마네는 매일 동이 트자마자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들마저 쥐어뜯을 것처럼 공사장을 향해 분주히 달려갔다. 그러고는 통렬히 욕설을 퍼붓고는 막대한 돈을 잃어버린 것에 통분했다. 마네는 기대감에 따른 확신마저 상실한 채, 기력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공사장에 주저앉아 멀거니 미술전람회장과 박람회장을 드나드는 어마어마한 관람객들을 지켜보며 숫자만 세어갔다.
마네는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 속을 비참하게 헤집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5월 24일 전에는 그만의 전시 공간인 개인 부스를 개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마네의 작품에 대한 흥미진진한 관심을 다시 증폭시킬 것이 분명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 돈을 날린 것보다 더 많은 걸 잃어버렸다. 그 가운데에서 제일 애통한 것은 시간이었다. 더 큰 절망감은 막대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 남자가 3개의 전시, 즉 자신이 기획한 개인전과 미술전람회 그리고 박람회가 동시에 개최되길 바란 것 자체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에 있었다.
반면에 네 번째 전시가 시작될 찰나였다. 마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사각형의 전시 공간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꾸미고 우아하게 작품들을 내걸면서 화려한 조명까지 설치하는 동안 쿠르베가 미술전람회와 동시에 개최될 자신만의 전시 공간을 막 오픈했다.
설마 하는 일이 벌어졌다. 거대한 식인귀 같은 쿠르베야말로 1855년에 또다시 튀는 작품을 만인에게 공개하려는 시도를 감행하고자 치밀한 준비를 벌써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출품한 네 작품 모두 관전을 통과했다. “말 그대로 외국인 고객들을 끌어들인 것이 나로서는 작품 판매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쿠르베는 우쭐댔다.
쿠르베는 개인전을 겨우 이틀간만을 개최했다. 나폴레옹 3세에 의한 제2제정 하의 경찰들이 전시장 내 출입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보려는 인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번에 쿠르베가 전시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는 아주 작은 크기로 그린 「세상의 기원」[1]이란 제목이 붙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었다. 그걸 보려고 쿠르베 전시장에 모여든 인파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났다.
쿠르베는 「세상의 기원」에서 단지 반쯤 벌린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여자의 성기를 보란 듯이 화면에 꽉 차게 묘사했다. 이를 지켜본 관람객들은 자지러질 듯한 충격에 휩싸였고, 이를 본 마네의 동료들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에 질투심을 느낀 식인귀가 두 번씩이나 마네를 조롱한 셈이 되었다. 그가 아무리 지능적으로 예술이란 이름으로 과도한 표현까지 시도함으로써 마네를 넘어서려 했지만, 결국 좌초한 것처럼 그가 파놓은 세련되지 못한, 아니 저질이기까지 한 예술작품의 함정에 스스로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무리 사실주의 화가란 한정적 범위 내에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성기를 그렸다는 것 자체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바란 것은 차치하고 마치 도박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경솔하고도 서투른 짓을 벌인 꼴이란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부게로의 표현을 빌자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작품을 논할 계제가 아니었다.
물론 전혀 반응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림을 접한 몇몇 관람객들은 쿠르베의 예술 세계가 그 같이 폭넓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소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쿠르베는 마네에 필적할 만했다.
비참한 심정으로 혼자 멍하니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던 마네는 드디어 개인전 전시홀 개막 날짜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대했던 관람객의 쇄도는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관전의 흥행은 만국박람회의 경우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모든 게 끝나버렸다. 볼 장 다 본 셈이라고나 할까?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마네는 그저 멍하니 애처롭게 허공만 쳐다보았다.
마네의 개인전은 입장료를 받았다. 그리 비싸지 않은 단지 40센트에 불과했던 관계로 관람객 모두가 개의치 않고 전시장을 찾았다. 마네는 50여 점에 달하는 유화작품과 함께 3점의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을 모사한 복제화와 역시 3점의 에칭 동판화 작품을 내걸었다. 그가 내건 작품들이 정사각형 전시 공간의 세 군데 벽을 온통 도배했다. 마네의 삶, 그의 영혼이 내걸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샹흘뢰리는 놀라울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네의 작품들이 잘 정돈된 채 걸려있는 건 물론이고, 서로 일관성을 갖추고 있음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차례차례 작품 한 점씩 유심히 살펴보던 샹흘뢰리는 마네가 탁월한 화가임이 명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엄청난 혁신성이 온통 벽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한 작품씩 따져보지 않아도 전시장에 내걸린 작품들은 마네가 그간 10년간의 자신의 예술세계를 한데 조명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굳이 졸라가 마네의 예술세계를 조명한답시고 아주 인상적인 말들을 떠벌렸을지라도 마네는 스스로 겸허한 마음으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어떠한 말이나 글도 삼갔다.
“모두가 그들이 원하는 예술가가 나타나기만을 고대했다 할지라도 대체 뭘 고대했다는 말인가? 그는 관전 심사위원회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 작가가 아닌가? 그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관객과 정면으로 담판 짓기를 더 원한 것 같다.”
그렇다. 하지만 5월 24일에는 단 한 명의 관람객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오직 그를 비웃고자 작정한 이들과 이미 마네의 실패를 예견한 동료들만이 남아있었을 따름이다. 늘 불안한 눈초리로 친구를 염려하던 프루스트는 마네의 전시장을 찾아 둘러보고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마네의 예술에 도취되어 눈부신 듯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관람객들도 많지 않을뿐더러 그마저도 데리고 온 아이들과 함께 마네를 비웃으며 빈정거리듯 깔깔깔 웃고 난리도 아니었다.”
마치 정신 착란 상태에 빠진 땅딸보들의 음악회를 방불케 했다. 마네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상황에 직면한 경우에조차 늘 만사를 제쳐두고 ‘바티뇰 화가들’을 지지하고 지켜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론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마네와 바티뇰 화가들을 괴상망측한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커처까지 동원하여 예수와 그를 둘러싼 ‘제자들’로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온전히 실패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몰락 그리고 실패.
[1] 파리 오르세 미술관 측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1866)을 기증받아 1995년부터 영구 소장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