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언의 처형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75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막시밀리언(사진 오른쪽 인물)의 사형 순간을 담은 사진.



9장 10
(1867-1868)



마네는 마침내 「막시밀리언의 처형」을 완성했다. 관전에 의한 미술전람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하기 위한 의도를 품은 작품이었다. 그는 여러 버전들을 한데 응축했다. 제각기 달리 그린 그림들 역시 한 작품으로 합쳤다. 이 그림이 ‘위대한 장르’에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바로 역사화였다. 작품 크기도 엄청나서 마네가 그린 작품 가운데 제일 큰 크기였다.


1867, L'Exécution de Maximilien 2.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막시밀리언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 1867-1868. [1]


1867, L'Exécution de Maximilien 1.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막시밀리언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 1867-1868.


매일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사진술 덕분에 마네는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자유로이 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솔한 표현을 획득하기 위한 고민 끝에 마네는 르조슨느 대장에게 막시밀리언을 처형하는 살인마들에게 입힐 군복을 구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마네는 자신이 그린 그 어느 작품보다 이번에 그린 그림에 맘이 끌렸다. 심지어는 사건과 관련된 자들에게 노골적으로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까지 생겼다. 소문은 돌고 돌아 황제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검열, 이 새로 등장한 용어는 예술품이나 출판물 따위에 대한 조사, 삭제, 배포 금지를 의미하는 또 다른 명칭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단두대의 칼로 사정없이 작품을 내리치는 것을 가리켰다. 당연히 국가는 작품 전시를 금지하는 도리밖에는 달리 취할 방법이 없었다. 처형당한 황제는 곧 군사기밀이면서 동시에 국가기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전시를 금지한 명령에 정당성을 부여할 이유로 정부기관이 내린 결론은 마네의 그림에서 황제를 총으로 쏴 죽이는 병사들의 옷차림이 프랑스 군대 복장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굳이 마네를 옹호하지 않아도 마네가 그처럼 프랑스 군대 복장을 한 병사들을 살인마로 규정한 것은 사건의 진실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일이었다.


마네야말로 진실에 입각해서 그림을 그리고자 애썼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그런데 뭔 놈의 빈정거림! 그럼으로써 프랑스가 막시밀리언을 두 번씩이나 처형하고 있다는 걸 그들만 모른다는 건가?


일반 대중에게 혼란을 부추기지 않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정치적인 유사성을 띤 사건, 즉 고야가 그린 「마요의 학살」을 마네가 적절히 참조했음은 명확하다. 바로 이 점이 마네의 그림이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을 금지한 주된 사유였다.


Francisco de Goya, El Tres de Mayo, 1814, Museo de Prado, Madrid..jpg 프란치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마요의 학살(Tres de Mayo)」, 1814.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마네의 대형 작품인 역사화는 현재진행형인 사건을 다룬 것이기에 당연히 관전의 성격을 띤 미술전람회에 출품 자체가 금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조차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작품을 다시 제작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 경찰은 석판화까지도 금지한 탓으로 가차 없이 판형들까지 산산조각 내버렸다.


졸라가 자신을 옹호하고 지지한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만을 마네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마네는 반드시 졸라의 연대기적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생각해 왔지만, 늘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뜸하던 졸라가 새로 그리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극화하는 동안 자주 작업실에 들르곤 했기 때문이다.


마네는 주저하지 않고 즉각 졸라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 속의 졸라는 늘 그가 그리고자 시도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마네는 초상화 속의 분위기조차 적절히 활기를 띠게 각색했다.


1868, Emile Zola.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에밀 졸라(Émile Zola)」, 1868.


졸라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글을 쓰려고 막 앉은 모습이다. 벽에는 마네의 「올랭피아」가 압정으로 붙어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젊은 삼류 문사를 향해 바라본다. 연대기적 초상화 속의 분위기는 마네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워져 있다. 또한 일본 미술 애호가답게 마네를 사로잡은 이국 취향이 적절히 반영되어 있다.


더군다나 한편에는 마네가 새롭게 눈뜬 판화 역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일본 미술은 자신의 그림에서 원근감을 축소시키는 기법을 고민하게까지 만들었을 만큼 그를 고무시켰다.


굳이 일본 작품들의 경향을 그대로 따르지 않은 채, 자신이 개발한 고유한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원근감의 축소 기법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만든 셈이다. 「피리 부는 소년」에서 보이는 그림자조차 없는 평탄한 인물의 형태나 배경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졸라의 초상화와 같은 시기에 마네가 완성한 테오도르 뒤레의 초상화는 뒤레가 막 미술 비평에 뛰어든 탓에 오만불손한 모습으로 각색한 것이다. 마네 자신에게까지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 정도로 교활하고 영리하다는 것이 마네가 뒤레에게서 받은 인상이었다.


1868, Portrait de Théodore Duret.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 1868. [2]


뒤레가 예술에 관해 너무도 무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마네는 그를 자신의 소중한 친구들에게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들과 한번 어울려보라는 것이 마네가 뒤레에게 바란 바였다. 뒤레, 이 스물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는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배우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마네는 뒤레에게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일러주었다. 그러고는 뒤레에게 한번 초상화를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그것도 커다란 크기의 인물화를!


뒤레는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림은 재빨리 완성되었다. 예술가는 모델이 기존의 관례를 따르는 태도를 전혀 굽히지 않을 듯한 아주 곤란한 상황을 그처럼 냉소를 띤 채 살짝 비켜갔다. 관례 추종주의와 겁먹은 모습, 이 두 모습이 그림에 탁월하게도 적절히 예시된 뒤레의 모습이다.


마네는 그림에 서명을 할 때도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름을 길게 쓰고 나서는 그걸 찢어발긴 뒤에 마치 물방울이 튀긴 것처럼 흔적만 남기듯 서명을 하곤 했다. 그런 서명을 이제 막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똑같이 해보라고 하니 뒤레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서명이 아닌 마네의 서명을 그것도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에다가!


요컨대 아주 교묘히 자신을 은폐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은 다음에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서명이란 것은 얼굴 한가운데 자리한 코처럼 눈에 확연히 띄어야 하며, 명확한 것이어야만 한다. 서명은 마치 바라보는 이에게 달려들 듯이 해야 한다. 관람자는 그림에서 서명부터 살펴보는 법이다. 그림 속에 자리한 서명을 보고 작가의 인물 됨됨이를 떠올리면서 화가에 대한 평가가 형편없는 경우에는 아예 작품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그림과 서명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즉 마네처럼 검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서명한 경우에는 일반 대중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 같은 걸 아예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작품이 뒤레 것이라 믿게 만드는 것이나, 고야의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것이나, 르노나 포르튀니 것이라 믿게 만드는 것은 단지 관람객을 속이기 위한 장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 그것을 적극 권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친구였다! 여러 차례 마네는 적수들에게 이 같은 수법을 써먹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뒤레는 자신의 집 벽에 친구의 이름이 적혀있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걸어놓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실제 자신의 집에 마네가 나타나게 되면 돌발스런 상황까지 벌어질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마네는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서명에 약간의 변화만 주었다. 그는 익살맞게도 서명의 방향을 틀었다. 그는 서명하지만 거꾸로 했다. 그것도 늘 화면에서 가장 밝은 곳을 골라 그 위에다가 서명을 하곤 했다. 익살맞고도 교묘한 그만의 방법으로 마네는 어리석은 중산층 부르주아 여인네들을 골탕 먹이곤 했던 것이다.


뒤레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오직 그가 본 그대로 했을 뿐이다.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고자 너무 공손했을 따름이다. 줏대 없는 세련된 멋쟁이인 댄디. 마네는 짐짓 부탁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를 끌어들여 온갖 현혹하는 말로 그를 완전히 발가벗긴 뒤에는 자신도 여전히 모색하고 있는 새로 유행하고 있는 판화를 제작하게 만들었다. 마네는 게다가 그에게 별명을 붙이기까지 했다. 최후의 댄디라고.








[1] 이 일련의 그림들은 원래 하나였으나, 마네가 조각조각 없애버리고자 한 것을 친구였던 드가가 겨우 수집하여 보관하던 그림들이다. 마네는 젊은 나이에 멕시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살해당한 막시밀리언을 마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대학살을 다룬 고야의 그림처럼 나폴레옹 군대가 황제를 학살했음을 풍자했다. 이 때문에 마네는 나폴레옹 3세 치정 하에서 요즘식으로 치자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반체제 예술가나 다를 바 없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2]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는 부친의 뒤를 이어 술(코냑) 도매상으로 인생을 시작하여 떠돌던 중 마네를 만난 뒤로 기자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작가이자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가 마네 사후에는 『마네의 삶과 작품(Histoire d’Édouard Manet et de son œuvre)』(샤르팡티에, 1902-1906)이란 책을 출판했다. 그가 펴낸 저술은 앞으로 마네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기초자료가 되었다. 히로시게의 목판화에 심취하여 프랑스에 자포니즘(Japonisme)을 확신시키는데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인도 등 아시아를 여행한 뒤 쓴 『아시아 기행(Voyage en Asie)』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Théodore Duret, Histoire d’Édouard Manet et de son œuvre.jpg 테오도르 뒤레가 마네 사후에 펴낸 『마네의 삶과 작품』(샤르팡티에, 1902-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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