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미술전람회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7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미술전람회 풍경을 담은 삽화.



9장 11
(1867-1868)



한 해가 혹독하기만 했다. 마네와 동료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거의 미친 짓처럼 여겨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치 유황을 뿌린 것처럼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동아리를 형성한 탓에 연이은 미술전람회와 만국박람회에서 그들 모두를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불굴의 작업에 임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사랑했던 시인이 운명한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인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이 젊은 화가 집단이 놀라운 작품들을 쏟아내도록 그들을 격려해 주고, 고무해 주고, 부추겨주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1868년 관전 심사위원회는 마네가 출품한 두 작품을 통과시켰다. 「졸라의 초상화」와 「분홍빛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마네의 동료들도 다수가 관전을 통과했다. 엄청난 기쁨이었던 것이 그들 모두가 거의 통과한 거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네의 작품은 동료들 사이에서 빛을 발할 참이었다.


마네의 그림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동료들의 작품들 한복판에 마네의 그림이 내걸릴 판이었다. 바지유, 피사로, 시슬레, 모리소, 종킨드, 모네, 르누아르, 부댕, 드가, 그들 모두의 조상 격인 코로 주변의 화가들, 하지만 세잔은 아니었다. 세잔은 마네처럼 온갖 술책을 다해 집요하게 성공을 거머쥐려 하는 관학풍의 그림이나 그리는 환쟁이들과는 근본이 다른 화가였다.


그림에 약간 정통해 있는 이들은 전람회장에 걸려있는 작품이 누가 그린 작품인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같은 그룹에 속해있을 뿐 아니라 같은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똑같은 모험을 시도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이었다. 그들 또한 서로의 작품을 감상했다. 쿠르베와 코로를 제외하면 모두가 다 젊은 화가들이었다.


1868년의 미술전람회는 한층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네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수 있기를 기대했다. 또한 이제까지 그늘에서 남모르게 활동하던 것을 넘어서서 만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관전에 의한 미술전람회는 여전히 사실주의 화가들을 인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정받지 못한 그들은 졸라가 소외된 화가들이란 명칭을 부여한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들 스스로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한 이들은 그들을 가리켜 현대 화가들이라 불렀고, 그들을 중상모략하는 이들은 마네 주변에 몰려든 화가 집단이라 규정하였다.


1866년과 1867년 두 해 동안 마네가 도움을 청했을 때, 그의 둘도 없는 지지자이자 조력자였던 졸라가 이성적 판단을 잃을 정도로 갈팡질팡하던 것과는 달리, 마네가 그린 「졸라의 초상」은 이전의 실패를 딛고 성공을 거머쥐었다.


1868, Emile Zola.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에밀 졸라(Émile Zola)」, 1868.


졸라 역시도 몇 달이 지나 고대하던 「테레즈 라깽(Thérèse Raquin)」을 마침내 출간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그는 입신출세를 노리고 「올랭피아」를 스캔들 화해서 물고 늘어지거나 화가의 어깨를 타고 기어오르는 짓거리나 벌이는 초보 풋내기 비평가 티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세간의 평이 졸라의 명성에 찬란한 햇볕을 쏟아부은 것은 마네를 옹호하고 지지했다 해서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졸라는 스스로 다른 책무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곤란한 처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지지하고 옹호하던 화가에게 약간의 돈이나마 빌려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먹고 살 돈이 완전히 바닥이 난 탓이다.


마네는 늘 그렇듯이 졸라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마네는 오죽하면 돈을 빌리겠는가 싶어 초라하고 궁핍한 살림살이에 처한 친구를 가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해 오던 차였다.


당치 않게 승승장구하고 있는 젊은 작가를 헐뜯으려 안달이 난 저간의 속 사정에는 그가 옹호한 마네가 그린 기다란 분홍빛 외투를 걸친 여인을 그린 그림도 한몫했다.


그림 속의 여인은 누구나가 다 아는 인물이었다. 이해에 마네가 완성한 그림 속의 빅토린느는 저 벌거벗은 몸을 하고 관객을 노려보듯 쳐다보던 빅토린느와는 달리, 발끝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기다란 외투를 걸치고 있다.


1866, La Dame en rose.jpg 에두아르 마네가 「올랭피아」의 주인공 빅토린느 뫼랑(Victorine Meurent)을 모델로 삼아 그린 「분홍빛 옷을 걸친 여인(La Dame en rose)」, 1866.


이번에는 앵무새가 가증스러운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사방으로 확산될 만큼 발화성을 지닌 앵무새에 성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떠들어대는 모든 말들을 아예 무시하고 나섰다! 그 바람에 전혀 다른 의미들이 그림에 따라붙게 되어 앵무새가 증폭시킨 이중의 불온한 의미들이 더해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기혼여성의 자태로 마네의 그림 속에 다시 등장한 빅토린느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공공연하게 추문에 휩싸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마네의 생각이 옳았던 것은 그 증거로 미술전람회 심사위원회나 그보다 더 상투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이 오직 그를 중상모략하기 위해 그림 속의 앵무새까지 동원하여 온갖 비방에 찬 모욕적인 언사를 부풀렸다는 점에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하지만 아무런 선입견 없이 마네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작가를 존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네가 그린 그림을 기분 좋게 감상할 수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상주의 그림이 최초로 태동한 르 아브르 바닷가 도시에서 발생했다. 마네가 그린 「사망한 자」가 최초로 수상 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1864-1865, L'homme mort.jpg 에두아르 마네, 「사망한 자(L’Homme mort)」, 1864-1865에서 보는 검은빛과 흰빛의 대조는 벨라스케즈나 그레코 혹은 고야의 검은빛을 연상시킨다.


이는 그 자신에게는 열심히 작업에 매진한 덕분에 얻은 영광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에게는 그를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는 계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오팔 해안으로 떠난 네덜란드 형제들과 처남들까지도 포함하여.


진정한 그림을 향해 쉼 없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가면서, 또한 다시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그에 앞서 빛을 그러모으면서 마네는 이제야말로 보들레르 없이 다시 작업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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