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80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베르트 모리소, 「발코니(Le Balcon)」, 1872.



10장 4
(1869-1870)



벨기에 태생의 화가 스테방은 나폴레옹 3세에 의한 제2제정 시기 붐을 이루던 ‘파리 여인’을 다룬 그림만 그렸다.


베르트는 스테방이 마네에게 그녀의 얼굴을 담은 초상화를 그리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망연자실했다. 마네는 그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심지어 아틀리에에까지 걸어놓을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프레드 스테방을 좋아했다. 스테방은 미술전람회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하고 있었으며, ‘파리 여인(La Parisienne)’이란 그림을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런 유의 그림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줄곧 파리 여자들만 그렸는데, 이런 유형의 여자는 나폴레옹에 의한 제2제정 하에서 단연 자랑거리였다.


Alfred Stevens La Parisienne 1880.jpg 알프레드 스테방(Alfred Stevens)이 그린 「파리 여인(La Parisienne)」, 1880.


하지만 이 경우에는 스테방이 너무 지나쳤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알고 지내는 베르트를 마네에게 소개한 이가 스테방 아니던가? 더군다나 그녀를 극구 칭찬해 마지않았는가 말이다.


스테방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마네는 스테방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를 만났을 뿐 아니라 매일 아니 매 순간을 그녀와 함께 지냈다. 베르트는 마네를 알면 알수록 더욱 심적으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베르트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이를 인정했다. 왜냐면 그 둘이 서로 만나 일주일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마네는 그림을 그리려 하니 한 번 포즈를 취해달라고 베르트에게 부탁했다.


드디어 마네는 기요 가의 아틀리에에 그녀를 초대했다. 처음으로 두 사람 간의 회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베르트의 모친인 꼬흐넬리가 딸과 동행했음은 당연하다. 마네가 그녀 혼자만을 부른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요 가에 위치한 마네의 화실에는 화니 클로스도 있었다. 수잔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녀는 화가인 프랭이 쉬지 않고 사랑을 애걸하고 있는 아주 젊디젊은 아가씨였다. 또한 그 자리에는 역시 화가인 앙투안 기유메도 끼어 있었다.


앙투안은 늘 마네와 형제애를 나누는 사이였으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말소리도 컸을 뿐만 아니라 괴짜이면서도 재미있는 친구였다. 게다가 앙투안은 좁은 공간 안에 한데 모여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화가와 모델이 조마조마할 정도로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온갖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마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틀리에에 모여있는 이들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자 베르트의 모친인 꼬흐넬리는 낡고 오래된 기다란 소파에서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그림 속 모델로 초대받지 못한 에드마는 골이 났다. 에드마는 동생과 화가 간에 사랑이 싹트는 자리까지 쫓아가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거나 간섭하고 나설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애당초 처음에 두 자매가 동시에 속내로 마네를 좋아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베르트는 마네가 자신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싹트게 하였다는 걸 참지 못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를 당사자인 마네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이후로 그림을 수정하면서 마네는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레옹까지 집어넣었다. 뜻밖에 대부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이야기가 있어서 아틀리에에 들른 아이를 마네는 그림 속에 끼워 넣은 것이다. 레옹이 마네를 찾아간 이유는 어머니인 수잔이 남편에게 전할 말이 있다 해서였다. 수잔은 기요 가에 위치한 마네의 아틀리에를 찾은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무언가 긴급하게 전할 말이 생겼던 모양이다.


이러한 정황 속에 마네가 그린 「발코니」는 참으로 독특하기만 하다. 구성에 있어서 고야의 그림을 참조한 것이 역력하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 거리와 곧장 면해있는 창문이 꽉 차도록 등장인물들을 배치했다는 점이다. 꼬흐넬리 모리소의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잔소리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긴장한 듯한 표정이다.


1868-1869, Le Balcon.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발코니(Le Balcon)」, 1868-1869.


9월의 화창한 날, 즐겁고 상쾌한 이날은 베르트가 처음 화가 앞에 포즈를 취한 날이다. 그녀는 그에 걸맞게 화가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모슬린 천으로 짠 드레스를 입고 있다. 거기까지. 마네는 그녀에게 더 이상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마네는 마음속으로 벌써 그림을 어떻게 완성할지를 결정한 상태다.


마네 앞에서 베르트가 포즈를 취하는 시간이 곱절로 늘어감에 따라 냉기만이 감돌던 아틀리에는 자연 뜨겁게 달궈져 갔다. 모델로 자세를 취해야만 했던 베르트는 화가의 요구에 따라 여름에 입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야만 했던 탓이다.


마네는 제일 먼저 화니를 재빨리 그려 넣었다. 왠고 하니 그녀가 서있는 자세로 계속 포즈를 취해야 한 탓이다. 포즈를 취하다 보면 금방 지쳐서 오래 서있지 못할 게 틀림없으니까. 마네는 이 자리에 참으로 이상야릇하게도 앙투안 기유메를 끌어들였다. 앙투안은 예전에 르 스위스 아틀리에를 드나들 때 사귄 ‘내 개인적인 샤프롱’이라 부른 인물이다.


마네가 앙투안 기유메를 불러들인 이유는 그를 위협적으로 쏘아보듯 바라보는 베르트의 비수와 같은 시선을 매정하게 꺾어버릴 필요성을 느꼈던 탓이다. 몇 주간 동안, 그것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인내심만으로 꽤 오랜 시간을 포즈를 취하다 보니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백열등처럼 뜨겁게 달구어져만 갔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져만 갈수록 그들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아틀리에에는 긴장감마저 감지될 정도였다. 맘에 차지 않을 때마다 마네는 모델들에게 다시 자세를 취하라고 강요한 탓에 그들은 이제 더는 전과 같이 오랜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할 수 없다고 버텼다. 오직 베르트만이 피곤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에 넋을 잃은 표정으로 화가의 시선만 좇고 있었다.


앉은 자세로 두 손은 얌전히 포갠 상태에서 베르트는 마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마치 그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싶은 모양새다. 마네는 그녀가 속내에 담긴 이야기들을 다 쏟아놓을 것만 같은 뜨거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저 감내하는 분위기다.


자신의 모친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아직은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그녀는 마네에게 오직 눈으로만 말하고 있다. 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그를 만나기 전에는 애써 지워버리려 했던 이야기들까지도.


마네는 그림이 영 맘에 차지 않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그처럼 만족스럽지 않았을뿐더러 기대에도 어긋난 것이었다.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전날 그린 그림을 마네는 다음날 아침이 되면 지워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되풀이했다.


마네는 늘 본 대로 그렸다. 작품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그가 바라본 모습 그대로였다. 베르트는 그림 속의 자신을 ‘못생겼다기보다는 아주 이상한 생김새’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화니는 맘에 들지 않았다. 마네가 그리는 그림마다 놀라움을 표시하기 바빴던 앙투안은 마네가 자신을 그려준 것에 몹시 흡족해했다.


레옹에 대해서는 마네가 무슨 맘으로 아이를 그렸는지, 또한 그림 속에 아이를 집어넣을 생각을 애당초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기만 하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는 마네의 화폭 속에 빈번히 등장하였을 뿐 아니라 아틀리에와 모친이 살고 있는 집을 자연히 오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마네의 이 그림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녔으며 어떤 판단을 하였을까? 오라! 미술전람회는 아직도 멀었다. 팡탱이 모리소 자매를 마네에게 소개한 뒤부터 시간이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 무언가가 끊어진 상태였다. 자신이 앉아있는 정면에 포즈를 취한 흰옷을 입은 여인에게 푹 빠져 마네는 그녀가 화가란 사실도 잊은 상태다.


사랑은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마네의 낯짝마저 두껍게 만들어서 이제는 그만이 외쳐댄 삶보다도 예술이 먼저라는 가치관마저 무색해지고 말았다. 허나 그건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랑은, 이 미쳐버릴 정도로 격렬한 심장의 박동은 마침내 그가 존중하던 모든 평범한 것들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였던 그가 지금 사랑 타령이나 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녀를 처음 바라봤을 때, 그는 숨이 막혀오고 목이 메었다. 그녀를 다시 바라봤을 때 자신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 사랑은 불가능할 뿐이란 걸 자각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얼마나 대단한 화가이며, 또한 얼마나 탁월한 화가인가? 그녀는 그가 꺄다흐 화랑에서, 미술전람회에서,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상탄해 마지않던 화가가 아니던가? 마네는 그 같은 사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작품이 여성 화가들 가운데 최고임을 증명해 보여줬음에도 말이다.


아니 그녀는 수많은 남자 화가들과 견주어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뿐더러 그가 일군 화업과 비교해 봐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마네는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가 그와 대등한 실력을 갖춘 화가란 사실을, 그녀가 자신의 동료 화가이자 누이와 같은 존재란 사실을.


그는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녀에게 빠져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화가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하나의 아이콘, 마돈나 같은 존재였다. 그가 감히 그녀를 그려야만 한다면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려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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