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83화
10장 7
(1869-1870)
마네가 베르트를 화폭에 담은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여인네들이 질투심에 불타올랐지만, 베르트는 “40여 차례나 포즈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얼굴 부분이 지워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자신을 그린 인물화가 전혀 진척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에 쾌재를 불렀다.
마네는 베르트가 좀 더 유순하고 온순한 표정을 짓기를 바랐다. 마네는 그처럼 베르트에게 에바가 지은 표정을 제시해 보여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베르트의 모습을 담은 인물화는 화가인 마네에게 베르트 스스로가 요구한 대로 그려야 만이 진척될 수 있는 것이었다.
베르트는 자신에게 에바의 표정을 강요하는 마네의 요구에 펄쩍 뛰면서 대들었다. 그녀는 에바가 아니고 더하여 그의 제자와 같은 존재도 아니었다. 오라! 「발코니」의 인기스타가 이제는 자신의 인물화를 제작하고 있는 화가에게 기법 상으로 고려할 사항까지 충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똑같이 전업화가라는 점에서 평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이지 그 이외에는 어떠한 요구나 충고를 해서도 안 되는 입장이 당연한 것이었다. 단지 요리를 어떻게 하면 맛있게 조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 될 일이었다.
“여기 이 하얀색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강렬하게 채색했어요? 그리고 이 검은색들은 뭐예요? 이 부분은 잘 된 것 같은데 너무 차갑게 보이진 않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트는 젊은 예술가를 가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박박 대들었다. 마네 바로 곁에 붙어 앉아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그녀가 포즈를 잘못 취한 게 아니라 그녀에게 마치 애인이나 되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라고 강요한 마네의 실수 탓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마네에게 대들은 이유는 또 있었다. 베르트나 그녀의 모친이 마네에게 끊임없이 제기한 그림이 자신들 맘에 들지 않는다는 한결같은 욕구불만에 따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그림은 완성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것도 자연 성사되기 어려워 보였다.
작품 출품 기한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아카데미는 그가 그린 「막시밀리언의 처형」을 전시하는 걸 금지한다고 공표했다. 그러자 에밀 졸라가 나서서 노기등등한 태도로 마네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졸라가 휘두른 필력은 강인하고 꿋꿋하기만 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네의 그림은 전시 자체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품 자체마저 금지당했다. 영구히!
마네는 방향을 틀어 「아틀리에에서의 점심 식사」와 「발코니」그리고 5점의 동판화를 심사에 맡기기 위해 출품했다. 작품 모두가 관전 심사를 통과했다. 그러나 작품 전시는 전혀 딴판으로 취급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를 비난하는 소리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비록 마네가 스캔들이나 일으키는 작품을 연이어 출품하고 있다지만,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에게 이를 반박할 수 있는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법도 채택하지 않았다. 첫 번째 그의 귓가에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네의 작품에서 심각하게 잘못을 범한 부분은 「아틀리에에서의 점심 식사」에서 등장인물들을 정물로 죽은 듯이 (벌써?) 묘사하였다는 점이다.
마네는 처음 화업을 시작할 때부터 모든 것을 정물처럼 표현해 왔다. 그는 동적이든 정적이든 구별하지 않고 자신이 본 ‘그대로’ 묘사했다. 모두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임의대로 표현한 것과 같고, 인물과 상응하는 이야기적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네의 그림은 그와 같은 해석조차도 단 칼에 잘라버리는 표현을 성취하였을 따름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그처럼 화가의 의도를 적절히 반영한 표현을 선취하고 있었다. 작품이 관람객에게 ‘내적으로 감정의 붕괴’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긴 좀 혼란스럽다고나 할까?
두 번째로 심각하게 지적된 점 역시 타당한 논리에 기반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가 사용한 녹색이 문제였다! 오라! 아주 볼썽사나운 눈에 띄는 밝은 색조를 「발코니」에서 그림 양쪽에 마치 액자틀처럼 자리 잡은 덧문과 인물 바로 앞의 추락방지 베란다에까지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에?
왜냐면.
비평도 이제는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발코니나 녹색 덧문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파트 구조물이다. 파리에 오스만 스타일의 아파트가 새로이 들어서면서 생겨난 구조물에 대해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지적이란 말인가?
드가는 쾌재를 불렀다.
“자네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저능한 것들. 그들이 과연 회화 작품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댈 수나 있다는 건가? 자네가 사용한 밝은 녹색을 갖고 자네를 비난한 건 그들이 단지 비계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시인하는 것이자 자인하는 꼴이지. 자네의 화법을 그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생경하다는 점 때문에 피곤하다는 거겠지. 독창적인 예술가는 항상 그들에겐 어리둥절한 존재일 뿐이야. 그러니 걱정 말고 계속 정진하게나. 전진만이 있을 따름이라네. 그림은 놀이와 같은 것이지만, 자넨 그렇지가 않아. 자넨 모든 이들에게 전통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화가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어! 자네의 붓질은 하나하나가 그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찾아낸 방법들을 구사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어. 자넨 그들이 아마포로 만든 화폭에다가 물감들을 서로 섞어 칠한 것을 단지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거나 다름없네. 자넨 그렇듯 지오토로부터 시작된 현대 미술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토대마저 완전히 전복시켰다네. 자네가 원근법을 폐기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신세를 완전히 망쳐놓은 건 물론, 그들을 파멸로 이끈 셈이지. 그리고 그것만이 아냐.”
실제로 마네가 사용한 녹색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면에서는 마네가 건물에 색칠을 하는 페인트공들과 경쟁하는 모양새로까지 비쳤다! 이처럼 생경하면서 기상천외한 것으로 여겨진 녹색은 발코니 쪽으로 젖혀진 덧문에만 칠해진 것이 아니라 화니가 들고 있는 우산도 같은 계열의 색조이며, 베르트가 목에 두른 리본조차도 녹색이었던 탓에 있었다.
하지만 올랭피아가 목에 두른 띠도 녹색이지 않았던가? 녹색은 누리끼리한 색조처럼 여기저기서 작품의 전체적인 톤을 깨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히스테리컬 한 반응까지 일으킬 정도로 눈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게 어떻게 스캔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소란을 일으킨 요인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비스듬히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는 베르트 모리소의 시선이다. 이는 마네가 정면으로 쏘아보는 그녀의 눈길을 더는 감내할 자신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탓에 마네는 임의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이처럼 「발코니」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게 사용한 색조는 생경하기만 한 상큼한 아몬드 빛깔이다.
언론은 이 녹색의 사용이 스캔들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 예의 주시했다. 목젖을 뜨겁게 달구는 기사들을 쏟아내기 위해서였다. 언론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작품은 마네의 것이 분명했다. 마네의 그림이란 것 때문에 문제로 삼을 수 있었다. 일부러 스캔들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스캔들을 일으킨 또 다른 요인들은 등장인물들에게도 있었다. 초록색 이외에도 비판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요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화폭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정면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유대 관계가 붕괴되었음을 적나라하게 예증해주고 있다. 그들 서로 간에 인간관계마저 없다는 건 너무도 명백해 보인다!
사회적 유대 관계가 이미 붕괴되었다고 본 작가의 발상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더군다나 인물들의 머리 스타일은 서로 다른 계층 간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화폭 한가운데에 서로 다른 3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 건 상당히 그럴듯한 분위기를 확신케 해주는 요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서로 간에 어떠한 대화도 나눌 이유가 없는 오직 고민에 빠진 제각기 서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다.
이 역시도 작품에 비난이 쏟아지게 만든 요인이다. 화가가 그들의 얼굴에 어떠한 표현성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건 다시 말해 충분히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분위기상으로 그들이 서로 거북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니가 간교한 인물의 전형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마네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그녀는 소심했을 뿐만 아니라 수줍음을 잘 타고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마다 늘 자신이 연주한 음악을 들어줘서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곤 했다. 이는 자신이 너무 어린 탓에 연주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겸손의 표시였다.
가련한 기유메는 전혀 인간미가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기유메를 당시 파리 화류계 여성들을 들끓게 만들었던 매춘부의 정부인 아르튀르로 착각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괜히 뽐내고 으스대는 선 멋쟁이라 생각한 것이다.
오직 베르트만을 너그럽게 봐주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트가 언니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남의 일 참견하길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파멸로 이끄는 여인(femme fatale)으로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눈 속에 불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파멸로 이끌만한 여인이 아니다.
거의 어느 누구나 마네의 작품이 고야의 「발코니가 있는 집」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간파하지 못했다. 녹색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전혀 엉뚱한 것들에게 관심을 집중한 탓이다. 아니면 그럴 만한 지적 수준의 결핍이라고나 해야 할까?
베르트와 드가는 검은색의 사용에 유의했다. 검은색은 점점 농도를 더하고 있으며, 마네의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기까지 하다. 고야나 마네나 할 것 없이 이 두 화가의 작품은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검은색을 거의 비슷한 수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네의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검은색의 사용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가까운 동료들 사이에서 마네가 사용한 검은색은 기이하게도 신비한 것으로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