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90화
[대문 사진]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70년의 기억(Souvenir de 1870)」
11장 4
(1870-1871)
팡탱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화가들이자, 현대 작가들이며,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들 또는 바티뇰 화가들이라 불린 화가들 그룹 가운데에서도 오직 부유했던 드가와 마네만이 보불전쟁 동안 유일하게 자원입대했다는 건 여전히 의아하기만 한 일이다. 그 두 화가는 스스로 그런 식으로나마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고자 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 애국심에 찬 그 두 사람을 가리키는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았을까?
예술가들에게는 해를 거듭할수록 명성이 손상될 만큼 수준 낮은 별명만이 따라다녔다. 물론 예술가들은 그들에게 붙은 별명이 자신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붙은 별명이 초래할 문제점들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었다.
명성을 손상시킬 만큼 늘 별명이 따라붙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쿠르베와 들라크루아였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수식어와는 달리 두 사람은 각자 현실에 입각한 현대성(모더니티)을 나름대로 구현했다. 따라서 다른 어떤 이유가 그들에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피사로는 1830년에 태어났고, 마네는 1832년 태생이며, 드가는 1834년, 또한 그들의 뒤를 이어 다수의 화가들이 줄을 이었다. ‘약간 젊은’ 모네는 1840년생이며, 르누아르는 1841년생이고, 시슬레, 휘슬러, 스테방, 팡탱, 바지유는 똑같이 1841년생들이다. 이 탁월하고도 혁신적인 독창성을 지닌 화가 그룹에 베르트 모리소가 끼지 않은 이유는 또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결국 여자라는 이유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밖에는 달리 결론짓기가 어렵다!
게다가 조형예술 부서에 속해있던 아카데미와 관전 그리고 그 밖의 단체나 기관들은 위에 열거한 예술가들 모두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의 작품이 생경할 뿐만 아니라 그리다 만 그림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오로지 확고부동한 틀에 입각하여 관습에 따라 그린 관학풍의 그림들에서 보이는 한물간 낡고 진부한 주제들과 스타일을 적용한 작품들만을 용인한 탓에 새로운 화풍을 보여준 작품들은 내동댕이치기 일쑤였다. 이에 대한 예술가들의 저항은 집단적이었고, 그들 각자가 지극히 개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거부 또한 집단적으로 가해졌다.
전쟁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집단적으로 행동하게끔 만들었다. 가장 나이 많은 이들이 구시대를 무너뜨리자 제2공화국 역시 추락하고 말았다. 좀 더 젊은 층과 가난한 이들은 1870년 드디어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분연히 일어섰다. 그들은 단일대오를 형성하여 적에 대항했지만, 그들이 이룩한 국가, 애정을 갖고 있는 나라, 또한 실제 살아가고 있는 영토를 수호해야 할 군대는 무참히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 모두가 생각이 다르긴 했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만 한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게르부와 카페에 모인 화가들의 격렬한 논쟁은 점차 급진적으로 바뀌어갔다. 누구보다도 파리에 대한 애착이 가장 강했던 자가 마네였던지라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어느 날 갑자기 유머감각마저 잃고 말았다. 또한 격렬한 애국심에 불타 프랑스 군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이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프랑스 군대가 어느 날 느닷없이 벌어진 전쟁에 뛰어들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처럼 마네 역시도 나폴레옹 제국이 무너지기를 꿈꾼 건 맞지만, 프랑스 깃발이 짓밟히는 상황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귀스타브, 으젠 그리고 에두아르는 감베타의 정치 노선에 속해 있었다. 정치적 신념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마네는 애국심에 차 있었고 전쟁의 참상을 증언할 만큼 미몽에서 깨어나 있었으며, 실제 자원병으로 입대했음은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줬다.
비록 그가 피 흘리는 걸 지극히 혐오하긴 했으나, 전쟁의 참상에 눈 뜬 화가로서 손에 크레용을 쥔 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으젠과 에두아르는 31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건장한 남자들을 즉석에서 징집하여 편성한 국가 수비대에 입대했다. 국가 수비대 병력은 5십만 명에 달했다.
내일이면 공명정대한 공화국의 수장이 될 수도 있는 감베타를 돕기로 작정한 귀스타브는 나다르가 사용하고 있는 열기구를 빌려 감베타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다. 이 너무도 유명한 대형 열기구는 그때까지 나다르가 지도 제작을 위한 공중 촬영을 할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열기구가 파리 공격이 있는 동안에는 지속적으로 포로로 붙잡힌 이들과 병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그에 감동을 받은 마네는 나다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이자 전쟁의 영웅으로까지 치켜세웠다.
9월 19일 프러시아 군대는 파리를 공략하기 위해 베르사유에 집결했다.
베르트의 동생인 티뷔흐스는 자신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심풀이 삼아 전쟁에 뛰어들고자 군대에 입대했던 탓으로 전선에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바지유는 온 힘을 다해 알제리 보병 지원부대를 하나로 통합했다.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 바지유는 오로지 프라고나와 샤흐댕의 프랑스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피사로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다누와 데장티유는 그저 평범한 유태인에 불과했지만 도망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네는 그의 스승이나 다를 바 없는 도비니를 따라 프랑스를 떠났다. 아내와 아이들은 트루빌에 남겨둔 채였다. 농사를 짓고 있던 소작인들이 모네의 가족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을 보살폈다.
모네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자신으로서도 가족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막연했다. 너무도 청천벽력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쟁이 발발하면서 파리 포위 공격이 있는 동안 그의 삶은 완전히 파탄 나기에 이르렀다.
팡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전쟁의 공포가 너무나 무서워 몸서리쳐질 뿐이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절망감에다 먹을 것조차 없어 파리에서 함께 살던 누이들만 멀리 피신시켰다. 병과 굶주림 속에 그는 오직 집에 웅크리고만 있었다. 무서워서 집 바깥으로는 감히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조차 없었다.
세잔은 일찌감치 가족이 있는 액상 프로방스로 내려가 있던 참이라 에스타끄로 가서 숨어 지냈다. 징집영장이 잘못 발부되었다고 생각한 부친은 아들을 대신하여 군대에 갈 사람을 돈 주고 샀다. 하지만 이 같은 파렴치한 수법은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는 전혀 통할 리가 만무했다.
세잔이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처럼 법에 저촉된 결과에 따라 군경인 장다흠이 계속 그의 행방을 쫓고 있었던 탓이었다. 스당에서의 프랑스 군대의 굴욕적인 패배 이후에도 세잔은 여전히 에스타끄에서 숨어 지내면서 어떻게 살아갈지, 그림은 또 어떻게 그려야 할지 심각히 고민만 했다.
마네는 총을 들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파리와 프랑스를 방어하고 그가 생각한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을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베르트가 파시로 도망치려는 생각을 그에게 털어놓는 순간 마네는 그녀를 몹시 꾸짖었다.
“당신네들이 파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다리에 총을 맞고 거꾸로 나자빠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요컨대 아니다. 마네는 그녀를 나무라고 싶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도피는 호사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마네는 너무도 명백히 잘 알고 있었다. 베르트가 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그는 이 모든 정황과 전쟁, 광기가 하루빨리 종식되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전쟁이 종식되기만을 베르트 역시 고대하는 상황에서 남보다 애국의 충정이 결코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집 안에 갇혀있는 상황이 너무도 끔찍스럽고 갑갑하기만 했다. 그녀는 슬프고 너무나 한탄스러운 나머지 아버지와의 사이마저 점점 소원해져만 갔다.
오랫동안, 너무도 긴긴 세월을 남편에게 복종만 하고 살았던 베르트의 모친은 자선을 베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는 일체 일언반구도 없이. 아! 베르트가 만일 결혼만 했더라면!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자유. 그녀의 회화. 그녀의 예술. 그녀의 삶. 그녀의 육체! 모든 게 덧없어 보였다.
베르트 모리소는 이제 더는 홀로 고립되어 그림만 그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파리 방어에 투입된 용병들은 그녀의 아틀리에마저 징발했다. 난방조차 되지 않는 방에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맞대고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녀는 드가에게 선물을 하려고 부채에다 수채화로 그림을 그렸다. 이제 더는 마네에게 빠져있을 수만은 없을뿐더러 드가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강제로 집안에 틀어박혀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무 말없이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짐에 따라 넋을 잃고 허공만 바라보던 베르트는 마네가 찾아오기만을 한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마네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리소 집안의 거실에는 늘 그렇듯이 마네를 비롯하여 스테방, 퓌비, 드가, 게다가 베를렌느까지 모습을 나타냈다. 무언가가 그녀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모리소 집안사람들도 생존을 위해 먹고사는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