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95화
[대문 사진] 베르트 모리소를 모델로 한 에두아르 마네의 「휴식(Le Repos)」, 1869-1870.
11장 9
(1870-1871)
파리를 떠난 마네는 가족과 재회했다. 마네는 간통한 아내를 둔 오쟁이 진 남편처럼 삐쩍 말랐지만, 수잔은 끔찍하게도 뚱뚱한 몸을 하고 있었다. 베르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부푼 몸이 무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족과 재회한 곳은 온종일 따뜻한 햇살 가득한 청명한 날씨가 연일 이어졌다. 아내와 모친 사이에서 다시 살아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다시 붓을 쥐어야겠다는 맘까지 생겼다. 그것도 햇살 환한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는 꿈에 젖어갔다. 이때 레옹을 다룬 그림을 두 점 그렸는데, 하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난간에 기댄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하지만 베르트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녀를 잊으려 긴 시간을 억지로 잠자리에 누워 뒤척였지만 자꾸만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휴식을 취해야만 건강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말에 마네 역시 긴 휴식에 들어갔다.
무슨 까닭에 마네는 대서양 가에 집을 빌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한창 휴양지로 개발되고 있는 보르도 인근의 바닷가 아르카숑과 같은 곳에? 그것도 날씨마저 온화하고 산책하기 좋은 곳에 한 달 정도 살 집을 빌리지 않았을까? 마네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졸라를 만나기 위해 마네는 보르도로 향했다. 졸라는 보르도에서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알베르 드 발르루아는 중죄 재판을 피해 보르도에 은신하던 차에 새로 구성된 국민의회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마네는 정치 집회에 참석해서는 분격을 터뜨렸다. 그렇잖아도 귀스타브가 보낸 편지 때문에 극도로 화가 나있던 참이었다. 귀스타브가 편지에서 “난 프랑스가 오줌똥 못 가리는 자들에 의해 끌려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했던 것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카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보르도 항구를 마네는 화폭에 담아 갔다. 3월 초 드디어 아르카숑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고부터는 오로지 건강을 되찾고자 애쓰면서 베르트는 애써 잊으려 노력했다. 역설적으로 마네는 그렇게도 싫어하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리 한 것일까? 이와 함께 팔레트 역시 환한 색조로 바뀌어갔다.
감베타와 함께 하던 귀스타브는 항상 진보적 공화주의자인 감베타를 지지하고 나섰다. 일방적인 평화조약을 받아들인 데 대해 온 프랑스 인들이 굴욕에 따른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수도는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들었다. 정부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권력층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공화주의에 대한 귀스타브의 열정과 야망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귀스타브는 마네에게 파리에 돌아오는 걸 만류했다. 사회적 보건망은 완전히 망가져 불안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봄철의 일시적 온난 현상 또한 전염병을 돌게 만들 충분한 요인일 수 있었다.
3월 3일 귀스타브의 판단은 옳았다. “끔찍하게도 치욕스러운 일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여세를 몰아 도시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머리타래가 잡힌 채로 콩코흐드 광장에 끌려 나온 여인네들은 옷이 찢긴 채 알몸으로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이겨져 분수대에 내던져졌다. 프러시아 군대가 타고 있던 말똥을 뒤집어쓴 여인네들 하며…….” 목숨을 지탱하고자, 자신이 낳은 어린것들에게 뭐라도 먹이기 위해 식량을 훔쳤다고 저 난리들이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런 꼴을 당하고 강간당하고…….
파리에서는 연일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티에흐는 프러시아와 수치스러운 평화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파리를 되찾은 후에 이 골 빈 영감탱이는 – 당시 나이가 74세였다. – 베르사유에 주둔하고 있는 프러시아 군대에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지난날의 향수에 젖어 반신불수나 다름없는 왕당파들이 그나마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수족마저 잘라버렸다.
파리 인민들은 단지 피를 흘릴 뿐이고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해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들의 마음속엔 아무런 승산이 없는 싸움일 뿐이었다. 그들은 베르사유에서 구정체를 되살리고자 서로 작당하여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티에흐는 7월까지 군대에 동원된 모든 노동자들에게서 무기를 회수할 것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프러시아 군대에게 용감하게 무기를 든 자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은 지가 벌써 다섯 달 째나 되었다.
파리 포위 공격이 있고 난 다음부터 그들은 먹을 것도 없이 난방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더군다나 안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은 티에흐의 결정에 대규모로 반발하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무장봉기까지 일으켰다. 이 불행한 사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 이뤄졌다.
3월 18일 두 명의 장군이 총살을 당했다. 혁명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3월 26일 파리 전역에서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법으로 정한 선거 유권자 수가 확 줄어든 상황이었다. 부자들은 해외 망명지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빈곤층 역시 제국의 권력의 남용에 대해 거의 광적으로 분노를 쏟아냈다. 티에흐가 권력을 쥐고 시간만 질질 끌기만 할 뿐, 그가 고집 피우는 것에 화가 난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좌 정치세력이 파리를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티에흐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5만 명에 달하는 프러시아 군 병력을 투입했다. 범죄 가운데 최악의 범죄가 자행되기에 이르렀다. 반란과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프러시아 군대와 연합하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베르사유 프랑스 정부군이 이번에는 파리를 공격하고 나섰다.
격렬한 폭동의 분위기만이 감지되는 상황에서 이틀이 지난 뒤 마침내 코뮌(la Commune)이 선포되었다. 파리 코뮌의 목표는 연방주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특권의 폐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착취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꿈꾸는 세상…….
베르트와 그녀의 부모는 광음이 유수와 같음을 느꼈다. 생 제르맹에서 퇴역한 퓌비 드 샤반느는 새로 구성된 국민의회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모리소 집안사람들에게 곧 그들의 삶을 위해 애쓸 것이며, 재산까지도 온전히 보존하게 해 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들은 앞으로 두 번 다시 공습을 겪는 일 없이 모두가 베르사유에 한데 모여 함께 지내면서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들만 보낼 것을 꿈꾸었다. 티뷔흐스 역시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오직 베르트만이 공화주의야말로 가장 훌륭한 정치 체제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했을 따름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트는 더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다시 화가로서의 삶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며, 언니들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너무 황폐해진 탓에 이제 겨우 간신히 잃어버린 삶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프랑스 전역에 빠른 속도로 험악한 분위기가 퍼져나가듯, 그녀의 집안도 점차 그와 같은 분위기에 출렁거렸다. 서로 별개임을 주장하면서 서로를 험악하게 대할 뿐인 균열된 프랑스는 과격파와 온건파 간에 대립과 충돌이 점점 가시화되어 가는 중이었다. 또한 파리는 지방과 대립하고 있었다. 프러시아 군대에 의한 파리 포위 공격 시에 지방은 미친 듯이 날뛰는 살인마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원래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닌 베르트는 도처에 번져있는 불화와 반목에 따른 언쟁에 다시는 끼어들거나 섞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간에 프랑스 인들은 가족 안에서조차 별것도 아닌 일에도 화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파리는 또다시 공습을 당했다. 4월 2일 프러시아 군대의 지원을 받은 베르사유 정부군이 수도 파리를 침공하여 거리를 하나씩 점거해 나갔다. 더군다나 국민 모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혁명을 완전히 분쇄하기 위한 공습이었다. ‘코뮌 당원들(Communaux)’인 코뮤나르드들은 저항했다. 온건파는 뒤로 물러섰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졌지만, 공화국을 쟁취했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