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9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파리 코뮌 혁명 시기에 예술위원장이었던 귀스타브 쿠르베가 주축이 되어 반코뮤나르드들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한 상징적 사건이 된 방돔 광장에 서있는 나폴레옹 전승비를 파괴하는 장면을 다룬 역사화.



11장 10
(1870-1871)



1871년 5월 16일 파리 코뮌 혁명 시기에 쿠르베가 주축이 된 코뮤나르드들이 나폴레옹 전승비를 파괴하는 장면을 다룬 역사화.


4월 12일 베르사유 정부군은 파리를 폭격했다. 프러시아 군대조차도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야비하고 가증스러운 짓마저 벌어졌다! 악랄한 범죄적 소행에 충격을 받은 귀스타브는 열기구를 이용하여 으젠을 피신시켰다. 이제까지 귀스타브는 으젠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귀스타브는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이고도 충직할 것만 같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인 마리에게도 피신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열기구 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귀스타브는 감베타와 함께 파리에 남아 다음 일을 계획했다. 파리 법조인들을 주축으로 한 공화주의 연맹을 조직하여 파리 코뮌과 베르사유 정부 간의 화해를 시도하고자 나섰다!


파리 곳곳에서 베르사유 정부군은 코뮤나르드들을 추격하면서 이들을 응징하기에 이르렀다. 코뮤나르드라고 의심되는 이들을 모두 색출하기 시작한 건 물론이고, 사회주의자 행세를 하는 이들까지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하여튼 모든 코뮤나르드들은 사형에 처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기아 다음으로 찾아온 공포 분위기가 파리를 점령해 갔다. 모든 이들을 코뮤나르드들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탓이었다. 음모, 위협, 포고, 태형 등이 일반화되기에 이른 건 물론이고, 처형이 연일 비일비재하게 자행되면서 파리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가족들 간에도 포상금을 노린 밀고까지 성행하면서 파리는 점차 모두가 미쳐 날뛰는 광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세느 강가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르누아르가 코뮌 당원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르누아르라! 만일 그의 지인들이 코뮤나르드들이라면 그 역시도 코뮌 당원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그건 너무도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문제는 르누아르가 베르사유 인근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들은 르누아르를 수상한 첩자로 여겨 체포한 것이다. 파리 6구 구청으로 끌려온 르누아르는 과거에 도움을 주던 친구 덕분으로 처형당하기 직전에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화가의 아틀리에까지 과격파와 온건파 사이에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제까지 르누아르는 엉망진창인 정치판에서 늘 봉변당하기 일쑤였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사건의 소용돌이가 그저 흘러가는 물살에 떠내려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면 급격한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마저 물살의 흐름에 따라 먼바다로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흐르는 물은 거슬림이 없기에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르누아르는 또한 열탕을 오가듯 한 번은 온건파 쪽으로 한 번은 과격파 쪽으로 오갔다. 모든 노선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여기저기에 친구들도 많았다.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고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더하여 그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척 애를 쓰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르누아르는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행운도 따라 그 무엇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이게 바로 그가 속한 화가 집단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드가는 공화주의자들 사이에 끼는 걸 극도로 자제했다. 코뮤나르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가는 절대로 그들 사이에 끼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을 힐난하거나 욕하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는 누가 있으나마나 전혀 개의치 않고 혼자 떠들어대길 좋아하는 몰상식한 쿠르베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처럼 드가 역시도 잘못을 저질렀다고 몰아세운 탓에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다. 드가 또한 파리 코뮌에 시달림을 당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마네가 없자 드가는 어느 날 느닷없이 홀로 쓸쓸하게 남아있다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마네가 베르트의 집을 찾자 그녀 역시도 뼈저리게 혼자임을 토로했다. 3주를 다 채운 뒤, 베르트 가족은 다시 프랭클린 거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색하기 짝이 없는 베르트의 부친은 완전히 불타 없어진 딸의 아틀리에를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이제는 어디서 그림을 그려야 하나? 또 뭘 그린단 말인가? 드가는 베르트에게 다시 시골로 돌아가서 좀 휴양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녀의 몸이 완전히 완쾌되지 않은 탓이었다. 언니들 또한 함께 살아갈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 홀로 집을 지키면 될 일이었다.


아르카숑에서 마네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휴식만 취했다. 그는 파리에서 전해오는 소식에 전율했다. 소식들은 한결같이 절망적인 것들뿐이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공습당한 파리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금지된 탓이었다. 그림들은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얼마나 더 시간을 연장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베르트는? 베르트는 여전히 파리에 있을까?


아니다. 그녀는 결국 셰르부르에 있는 언니 집으로 떠났다. 죽고 싶을 정도로 쓸쓸하기만 한 곳으로. 쓸쓸해 버릇해 하는 것 또한 그녀의 제2의 천성이었다. 베르트는 그렇듯 모친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마네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연일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판국에 파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현실 감각이 완연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있는 곳은 그처럼 파리에서 너무도 먼 거리였다. 다시 파리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렵고도 험난한 일이기만 했다.


많은 숫자에 달하는 식구들과 함께 이동해야 하는 까닭에 파리로 상경하는 일은 거리상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엔 대서양 바닷가로 간 뒤에, 이틀은 로양에서 머물고, 이틀은 로슈포르에서, 이틀은 낭트 하는 식으로 파리를 향해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파리에서는 내전이 더 격화되어 가는 양상을 띠었다. 베르사유 정부군은 파리에 대한 공습을 더욱 강화했다. 소식을 접한 마네는 어찌할 바 모르는 채 풀리기앙에 숙소를 정하고 머물렀다. 도저히 그림을 그릴 기분이 아니었다. 마네는 오직 레옹을 데리고 낚시질만 했다. 그럼에도 불안은 가중되었다.


5월 초, 마네는 파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불안한 심정은 여전했다. 연일 이상 흥분에 따른 발작증세가 일어나 가던 길을 멈추고 투흐에 머물렀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마네는 아내와 모친과 하녀 그리고 반려동물들을 안전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남자인 자신과 으젠 그리고 레옹 이 셋이서도 그들을 부양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또다시 공습을 당한 도시에 가족을 데리고 가는 동안 포위 공격에 가족의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전해오는 소식은 한결같이 불안감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마네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5월 21일이 되자 베르사유 정부군은 결국 파리에 입성했다. 총을 쏘며 바리케이드들을 무너뜨린 뒤 파리 대주교를 포함한 볼모들에게까지 무참히 총질을 가했다. 또한 시내로 통하는 모든 길들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세느 강이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베르사유 정부군에는 티뷔흐스도 속해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움직이는 건 모두 다 총질을 가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가리질 않았다. 사망한 자들은 일일이 셀 수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몽소 공원과 몽마르트르에서 몇 백 명의 코뮌 당원들이 이에 저항했다. 베르사유 정부군은 코뮌의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뜨리고자 온 파리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로 말미암아 화재가 발생하여 튈르리 궁전을 비롯하여 재무청사, 레지옹 도뇌르 궁전, 파리 시청사, 법원 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파리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파리 전체가 불탔다.


1871년 에두아르 마네가 파리 코뮌 전사들과 베르사유 정부군 사이의 내전(Guerre Civile) 상황을 묘사한 작품. 왼쪽 하단에 마네의 서명이 선명하다.


코뮌은 불길 속에 피를 흘리며 빈사상태가 되어갔다. 정의가 사라진 가운데 잔인하고도 끔찍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하는 비극마저 속출했다. 피비린내 나는 한 주가 그렇게 흘러갔다. 여기저기서 평온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자는 소리가 빗발쳤다!


프랑스는 찢기고 갈라진 채 너덜너덜 해진 상태로 누더기 꼴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프랑스가 완전히 조각조각 나뉘기를 바란 듯한 형국이었다.


티에흐는 프러시아에게 알자스와 로렌을 넘겨주기까지 했다! 화가 난 프랑스 인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폭동이 진압되었다더군……. 드가 씨가 재능이 뛰어난 덕에 아주 바빠질 것 같아.” 꼬흐넬리 모리소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다가 눈치 없이 그런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베르사유 정부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는 티뷔흐스가 시골뜨기 같은 코뮌 당원 놈들이란 경멸이 섞인 어투로 부르는 드가와 마네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티뷔흐스는 자신의 모친에게 이야기하기를 “오늘날 아직도 폭동과 반란을 진압한 동력에 해당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어요. 저는 그들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어머님 생각은 어때요?”


파리 시민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어떤 부류에 속해있든지 간에 그와 무관하게 베르사유 정부군에 의해 하루 동안 처형된 숫자만 2만에서 4만에 달했다.


누가 미친 것인가?


파리 코뮌은 묵시록에 나오는 종말의 세상과도 같은 나날들을 겪은 뒤에 완성되었다. 모든 것이 불에 타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지르고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는 가운데 완성되었다.


파리 시청을 비롯하여 구청 건물들 모두가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로 폭삭 무너진 건물은 이제 더는 그 수많은 장부들과 시민명부들 그리고 국가 기록문서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낱 종잇장에 불과한 서류와 온갖 문서들이 뜨거운 불길에 연소되어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지고 만 탓이다. 루브르 역시 큰 피해를 당했다. 튈르리 궁전은 완전히 전소되었다. 오직 폐허만이 그와 같은 사실을 증언해 줄 뿐이었다.


투흐에서 파리로 가는 첫 기차를 탄 마네는 가족을 한 곳으로 모으고자 파리까지 갔다. 오르세 역에 내리자마자 죽음의 냄새가 확 끼쳐왔다. 시체들이 강변을 따라 길게 쭉 이어져있었다. 부패한 시체에게서 나는 냄새에 섞여 피비린내마저 진동했다. 시신에 대한 수거가 제때에 이뤄지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채, 시간만 흐른 탓이었다.


마네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무사했지만, 기요 가에 있는 마네의 아틀리에는 풍비박산이 된 채였다. 마지막으로 아틀리에에 들른 것이 지난 11월 초 베르트와 함께였다. 모든 게 아득하기만 했다. 마네는 기억을 더듬어갔다. 화들짝 놀란 마네는 열쇠를 건물주인에게 반납했다. 아틀리에에 다시 들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생 페테르스부르 가의 49번지에 위치한 가족이 기거하는 아파트 바로 옆 건물인 51번지 아래층을 세냈다. 마네는 레옹에게 그곳에 지내라고 넌지시 제의했다. 레옹은 이제 18살이 되었다. 독립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그곳에 아틀리에를 마련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아틀리에가 나타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레옹이 아직 어리다고 판단한 마네는 레옹을 다시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레옹이 기거하던 곳에다가 보관 중인 그림들을 되찾아 한 곳에 모아놓을 참이었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그림들뿐만 아니라 뒤레 소유의 지하창고에 보관 중인 그림들까지도 한 곳에 보관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 뒤레의 창고에 있던 그림들은 약탈을 모면했다.


결국 테오도르 뒤레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적 같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린치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뒤레는 자신의 애인인 엔리꼬 세르누시와 함께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있는 파리를 도망쳤다. 엔리꼬는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이였다.


무엇보다도 가증스러운 일은 베르사유 정부군들이 도덕군자인 척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동성애를 즐기던 뒤레를 공공장소에서 화형에 처하고자 시도했으며, 화형에 처해질 뒤레 본인에게는 사랑의 대가에 따른 합당한 처벌임을 강압적으로 주지시키려고까지 했다!


악의에 차있을 뿐만 아니라 남을 험담하길 좋아하고 중상모략질을 일삼는 이들을 피해 도망치기로 작정한 뒤레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중심으로 세상 구경에 나섰다. 중국, 일본, 미국 등……. 떠나기 전에 뒤레는 마네에게 「투우사」란 그림을 산다는 조건으로 수표를 보내주었다.


마네의 수중에 돈이 떨어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전쟁, 파리 포위 공습, 코뮌은 마네 집안의 재정상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결국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재산이 남아있었지만, 그들이 피신해 있는 동안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 탓에 그들이 데리고 있던 너무나도 충직하기만 한 하녀인 마리에게조차 제대로 수당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시도 마네 가족의 곁을 벗어난 적이 없던 하녀가 어느 날 하루 온종일을 집을 비웠다. 과부인 마네 부인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하녀가 귀스타브에게 감베타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자신에게 월급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하층 계급에 속해있는 하녀가 더 이상 고통받을 일은 없게 되었다. 뒤레가 보낸 돈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수중에 돈이 생기자 그들 모두는 안심했다.


요 몇 달 동안 마네는 뼈저리게 시련을 겪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가족들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화마저 퍼부었다. 으젠하고도 매번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언쟁하기 일쑤였다. 마네는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 한 사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심지어는 아내에게조차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보였다 할지라도 무시하듯 아주 거친 태도로 일관했으며, 자식도 거리를 띄운 채 대했다. 남쪽으로 피신 가서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마네의 이 돌변한 모습에 가족들 모두는 충격에 빠졌다.


오직 큰 아들 생각뿐인 모친에게조차 매몰스럽게 굴면서 면박을 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런 마네에게 으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네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탓으로 가만히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돈도 없고 성공도 확신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에 대한 회의만 들뿐, 어떤 확신이나 가능성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앞날에 대한 회의에 몸부림치면서 그는 오직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더군다나 베르트마저 파리에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옳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파리는 아직 확신하기엔 일렀다. 여전히 모두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상황일 뿐, 광란의 도가니는 여전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파리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갈 수조차 없어 보였다. 마네는 전혀 그림 그릴 마음이 나지 않았으나 감베타의 초상을 한 번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여긴 상황에서 프랑스를 구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가능치 않으리라 여기던 순간에조차 감베타만이 낙담하지 않고 프랑스를 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베르트 또한 항상 파리를 떠나 있을 작정은 아니었다! 드가가 셰르부르에 있는 그녀에게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그곳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전쟁을 탓해야만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설 힘마저 잃고 말았다. 기력이 너무 소진한 탓이었다. 그녀는 수채화를 그리는 것마저 그만두고 말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족과의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