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97화
[대문 사진] 에두아르 마네, 「바리케이드(La barricade)」, 1871.
11장 11
(1870-1871)
7월 마네는 귀스타브와 함께 베르사유를 찾았다. 새로 구성된 국민회의를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 에두아르는 감베타의 초상을, 자신이 꿈에 그리던 영웅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잠시 기차에 동승한 감베타는 더는 포즈를 취할 만큼 한가롭지도, 또한 그러고 싶은 맘조차 없었다. 비록 감베타가 마네가 그린 보르도 항구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했다 할지라도 마네의 그림 솜씨만큼은 별로 맘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감베타의 맘에 드는 요소는 오직 색채(le chromo) 뿐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은 단언컨대 그들 모두가 한 통속일 뿐이오. 그들에게 예술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 보시오. 당신 앞에서 그들은 끔찍할 정도로 반동적인 행동만 취할 것이오.
감베타가 마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네가 아주 독특할 정도로 정치 화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여기에 있었다.
「막시밀리언의 처형」으로부터 「케아르사르쥬 해전」을 거쳐 「바리케이드들」을 관통하는 위험천만할 정도로 대담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한결같이 한쪽으로 쏠린 시선을 유지한 채,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다루고자 한 꿈을 마네는 결코 접지 않았던 것이다.
앙리 로슈포르가 <전조등>에 기고한 기사를 보면 “프랑스의 백성은 3천6백만에 달한다. 일일이 따져보지 않아도 불평불만의 원인이 되는 숫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1871년 8월 14일 쿠르베는 코뮌에 가담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방돔 광장에 서있는 나폴레옹 전승비를 오직 혼자서만 쓰러뜨린 건 아니지 않은가? 6개월 감옥형에 5백 프랑 벌금에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전승비를 다시 세울 비용을 부과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전승비를 다시 제작하는 비용은 3십만 프랑에 달했다.
수치스럽고 더러울 뿐인 제국의 어마어마한 폭력을 상징하는 재판은 그처럼 식인귀조차 무일푼으로 뿌리 채 뽑아버릴 수 있을 만큼 강압적인 것이었다!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나폴레옹 전승비를 없애버리고자 했던 것처럼 쿠르베 역시도 전승비를 파괴하고자 작정하고 나섰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꿈이 여물기도 전에 쿠르베는 카페 구석에 틀어박혀 버럭 소리만 지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승비를 다시 제작하여 제 자리에 세울 비용을 어떻게 조달한단 말인가? 온 생애를 다 바쳐 돈을 긁어모아도 부족한 액수였다. 죽고 나서도 갚아야 할 빚이었다!
화실에 있는 그림들, 컬렉션 등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치워야 할 처지가 되었다. 모두 다 처분해야만 하는 상황!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감옥에 있던 쿠르베를 뒤발 박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이송했다. 부댕과 모네가 스스로 선택한 망명지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쿠르베를 면담하러 찾아갔다. 그를 떠나보내는 비통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쿠르베는 꽤 길고 빽빽하게 인쇄된 비참한 추방자 명단의 맨 첫머리를 차지했다. 만일 추방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면 감옥에 갇혀 수형생활을 치러야만 했으며, 그것도 원치 않는다면 프랑스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신세였다.
오직 빅토르 위고만이 코뮌에 죄를 묻는 것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만인들 앞에 코뮌의 전사들을 개망신 주어서는 안 된다고 나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위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르쥬 상드는 ‘광기에 찬 소란법석’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르콩트 드 리슬은 “비열하고도 잔인한 쿠르베와 그에게 아직 빌붙어 있는 화가 집단처럼 르누아르와 마네가 언제든지 공포를 조장할 수 있는 코뮌 전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이 썩어빠진 돌팔이 화가들이” 무장투쟁에 나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시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마네는 지칠 대로 지쳤다. 그는 베르트에게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지긋지긋한 사건들뿐이오. 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이 이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소. 모두가 각자 주변 사람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있을 뿐이오. 무슨 일만 터지면 모든 걸 우리가 공모하고 획책했다 하니 우리를 족쳐대는 것도 유분수요. 우린 이제 완전히 파탄이 나버렸소. 제 각기 살 길을 찾아야만 할 것 같소. 난 오직 그대가 집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이 지긋지긋한 꼴을 겪지 않게 된 것을 무척이나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오. 난 지금 마드무아젤인 그대를 떠올리고 있소. 셰르부르에 그대가 그리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란 걸 확신하고 있소. 모두들 다 파리로 돌아오고 있소. 다른 곳에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마네는 모든 걸 이야기한 셈이다. 한 마디로 모든 걸 함축한 셈이었다.
실상 꼬흐넬리는 착한 남편과 낚시를 하러 다시 집을 나서려고만 하는 베르트를 집에 꼭 붙어있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전에 준하는 코뮌 혁명이 발생한 관계로 올해도 보불전쟁이 발발한 지난해와 같이 미술전람회는 개최되지 않았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장담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것이 조금씩 가라앉아가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기대하는 계절이 부활할 조짐을 보이기까지 했다. 조심스러운 가운데 모두가 이제는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건 단지 일시적으로 스쳐갈 뿐인 화창한 계절에 대한 향수일 뿐이었다. 고통과 추위에 신물이 나 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인. 오직 긴 여름휴가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다시 도래하였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