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의 탈출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98화

by 오래된 타자기


12장 1
(1872-1873)



매독에 걸린 이들, 광인들, 국왕들, 꼭두각시들, 복화술자들,

그대들의 영혼, 그대들의 육체, 그대들의 독설, 그대들의 누더기,

그게 이 망할 놈의 파리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썩어 문드러진 도시는 고약한 냄새로 그대들을 흔들어댈 뿐이로다!


- 아르튀르 랭보



전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네란 한 영혼 또한 저 내면 깊은 곳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가족 모두가 파리에 다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일체 모습을 감췄다. 기요 가는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고 아틀리에 역시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욕망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더군다나 대단한 무엇을 꿈꾸는 열망조차도 사그라지고 말았다.


마네는 사라져 버린 욕망을 되살림과 동시에 자신이 꿈꾸던 보다 강렬하고 근사한 것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레옹이 혼자 기거하도록 세를 낸 아래층 건물에 화구들을 갖다 놓았다. 그럼으로써 또 한 차례 레옹을 제물로 바친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고 화가인 마네는 다시 그림을 그려야 마땅한 일이었다.


모두가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가 돌아왔지만 끝내 바지유만이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돌아오지 못할 운명. 그리고 베르트. 하지만 그녀를 여전히 화가 집단에 끼워 넣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꼬흐넬리 모리소 부인은 늘 딸 곁에 붙어 앉아 마네를 헐뜯을 기회만 오면 펄쩍 뛰듯이 그에 관한 험담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느낌이에요.” 그렇듯 베르트는 마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마네는 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병이 악화된 탓으로 쌍방 간에 만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정한 기일을 다 채우고 난 연후에나 그녀를 만나러 베르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베르트의 모친은 이런 마네에게 악의에 찬 행동만을 일삼았다. 마치 그녀가 집에 없다는 걸 확실히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베르트는 셰르부르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네.”


“얼마 나요?”


“그건, 모르지. 그에 대해선 아무도 몰라. 지가 원했기 때문이야. 지가 다시 파리로 오기를 원한다면 몰라도.”


모친은 마네에게 단호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마네를 아주 우습게 여겼다.


마네가 실망한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차마 숨길 수조차 없었다. 베르트 모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네는 흐느껴 울기만 했다.


처음으로 겪는 비참한 심정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살인자들을 피해 도망친 뒤레에게까지 돈을 빌리고,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에게 다시 돈을 빌린 마네는 그 길로 베르트에게 달려갈까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다면, 그 이상으로 늘 그녀와 아내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릴 뿐이다. 게다가 두 여자 모두 그를 사랑하고 있는 이상 그것을 구실 삼아 두 여자 사이를 어쩔 수 없이 오가면서 양쪽을 다 감내해야 할 처지였다.


마네의 한결같은 성마른 조급한 행동을 지켜보던 베르트나 아내나 할 것 없이 이쪽저쪽에서 마치 서로 단합한 듯 행동했다. 레옹이 아무리 혼자 잠자러 생 페테르스부르 가 51번지로 간다 해도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마네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레옹이 기거하는 공간을 화실로 쓰려는 생각조차 그만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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