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03화
[대문 사진] 페르 라쉐즈 묘지 안의 파리 코뮌의 벽
12장 6
(1872-1873)
베르사유 정부군에 의한 파리 공습이 개시되자마자 마네가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 마네의 단짝들은 파리 코뮌 공화국의 주장을 지지하는 16명의 파리 예술가들로 구성된 예술위원회에 마네를 회원으로 끼워 넣었다. 위원장은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마네는 이 같은 사실을 도외시했다. 누구 한 사람 이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질 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그와 같은 사실을 지극히 만족스레 여기거나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코뮤나르드들과 전혀 다른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는 자체가 아주 위험한 일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란 나라의 고삐를 쥔 자들은 인정사정보지 않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코뮌에 가담했다고 의심되는 자들을 모두 단죄하고자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마네는 코뮌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파리로 돌아왔다. 따라서 쿠르베가 위원장으로 있는 예술위원회에 단 한 차례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마네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렇다. 이 불길하기만 한 군주제의 몰락은 결코 마네 형제가 바라는 공화국을 탄생시키게 만드는 사건과는 직결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베르트 모리소 역시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네가 그녀를 보는 걸 번번이 거절하고 나섰다. 1월 초 결국은 으제니 마네 부인이 복원한 음악회 모임에 자신의 모친을 대동하고 베르트가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 전에 양가 집안에서 열리던 저녁 모임에 참석하던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 빠짐없이 다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 전에도 그녀는 아주 예외적일 정도로 드물게 모임에 참석했었다.
이제는 그들 모두가 다시 수잔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지켜보았다. 곡 하나가 끝나면 이어 다른 곡을 연주하고, 그 곡마저 끝나면 또 다른 곡을 연주하고, 수잔의 연주 솜씨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끝이 없었다. 전쟁을 피해 피난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피아노 연주 솜씨는 일취월장을 한 듯이 보였다.
수잔의 놀랍고도 훌륭한 연주 솜씨는 점점 빛을 더해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 거실에서 음악회를 연 시어머니의 자존심까지 한층 드높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남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 솜씨이기도 했다.
이 가련한 여인을 꼬흐넬리 여사는 딸 에드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 있잖아. 거위 간을 생산하는 프랑스 남서쪽 지방 말이야. 거기로 피신해 가 있는 동안 그녀에게 거위 간만 멕였나 봐. (수잔이)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거위처럼 뚱뚱해졌으니 말이야.”
베르트는 저녁 모임 내내 으젠과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소곤거리면서 보내기 일쑤였다. 에두아르는 난생처음으로 동생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결국 형제간에 베르트를 서로 차지하려고 덤벼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에두아르가 질투를 느끼면 느낄수록 으젠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더해갔다.
동시에 아주 사소한 일이긴 했어도 베르트는 예전의 살찐 몸 상태로 돌아가질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화장을 더 짙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녀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울 정도는 아니나 찬연히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에두아르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쑥덕거릴 까봐 조심스레 그녀에게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으니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모친에게 에두아르가 그림을 그릴 테니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 의향을 묻기까지 했다. 그것도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결국 마네 집에 그녀가 모친을 동반하고 나타나면 모든 게 피곤해질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언제쯤이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게 될까요?” 순진한 체하면서 그녀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물음이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장황하게 늘어놓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에두아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잠시 망연히 허공만 쳐다보던 에두아르는 베르트 앞에서 횡설수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더니 마침내 그녀에게 딱 잘라 이야기를 던졌다. 새로 아틀리에를 장만하면 그때 그녀를 다시 부를 것이란 약속이었다.
마네는 어제까지도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던 이들에게서 과거에 서로 누렸던 우애는 되찾질 못하고 있었다. 오직 어쩌다가 머리를 맞대고 언제쯤이나 왕년의 유대 관계를 다시 이어갈까 고민만 될 뿐이었다. 스테방, 샹흘뢰리, 브라끄몽, 프랭, 르누아르, 모네, 휘슬러, 종킨드, 피사로 등은 언제든지 마네를 위해 달려올 진짜 친구들이었다.
드가가 빠졌다. 드가는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의 뉴올리언스에 가있는 바람에 자리에 없었다. 그가 없다는 것이 마네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애석하기만 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에 쪼들리다 보니 친구들 대부분이 뿔뿔이 시골로 흩어지고 말았다. 착하고 온순하기만 했던 팡탱은 이른바 사교계를 들락거리는 이들로부터 온갖 시달림을 당한 끝에 쉽게 돌아오기 못할 먼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전쟁의 공포에 질리고 굶주림에 지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혼비백산이 된 채, 8개여 월에 걸친 칩거생활에 들어간 뒤, 이를 청산하고 파리로 돌아와서 겨우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원래 살던 세느 강 좌안 지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팡탱은 생 라자르 거리를 떠났다.
팡탱은 동료들의 명성을 영원불사의 차원으로까지 드높이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전쟁이 모든 걸 바꿔놓고 말았다. 친구들마저도 바꿔놓기에 이르렀다. 1872년 미술전람회를 위해 팡탱은 촌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선량하기만 한 이들의 저녁식사를 담은 작품을 완성했다.
그림 속에는 새로이 친구가 된 시인들이 구석진 자리에 놓인 테이블을 마주하고 저녁을 들고 있다. 한 명은 시인 베를렌느이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는 새파란 나이의 랭보라 불리는 이제 막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인이다.
그가 바로 파리 공습이 있는 동안 마네에게 황홀하도록 멋진 시를 써서 보내준 시인이다. 모두가 랭보를 밉상에다가 가증스런 젊은 풋내기로 취급한 데다가 팡탱은 결코 랭보를 만난 적도 없다.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또 다른 술꾼들은 레옹 발라드와 까미유 펠르탕이다.
졸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젊고 야심에 찬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있는 구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처럼 장광설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런 탓에 더는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마네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진 빚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졸라 본인을 위해서도 마네가 단지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오랑우탄만도 못한 감수성을 지닌 듯한 무식한 졸라가 화가들의 작업을 언급한 것 자체가 경멸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졸라가 명성을 휘날리면서 필력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들 사이에는 반목과 불신의 간극 또한 점차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졸라가 세잔을 완전히 저 밑바닥 인생으로 치부했을 때에는 마네는 이제까지 졸라를 칭송해 오던 것마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마네가 어느 날 피사로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를 “아무래도 그 까탈스러운 액상프로방스 태생의 사내가 졸라 때문에 우리들 곁에서 더 멀어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것만 같아 보이네 그려.” 세잔은 그 말이 결코 자신에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돌아온 모네와 피사로는 더는 파리에서 살아갈 궁여지책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면 닿는 거리에다가 살림을 꾸려놓고 화구를 펼쳐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은 센 마흔느에 자리를 잡았고, 다른 한 사람은 발두와즈에 정착했다. 이는 말 그대로 바티뇰 화가 군단과의 교류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