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미술전람회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06화

by 오래된 타자기


12장 9
(1872-1873)



마네는 의기양양하게 승전가를 외쳤다. 미술전람회든 다른 전시회든 그는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로 바뀔 것이 틀림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처음 참가하는 미술전람회인지라 단박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작품을 출품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뭘로? 지난 1년 가까이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만 했을 따름이다. 이젠 정치적인 제스처를 쓰겠다는 것인가? 점잔 빼듯이?


미술전람회에는 「케르사르쥬 호와 앨라바마 호와의 해전」을 출품했다.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은 마침내 공화국이 새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작품에 대한 검열조차도 사라졌다!


1864, Le Combat du Kearsarge et de l'alabama.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케르사르쥬 호와 앨라바마 호와의 해전(Le Combat du Kearsarge et de l'Alabama)」, 1864.


하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 완전한 판단착오. 미술전람회 심사위원회에는 전쟁을 소재로 한 어떠한 작품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새로운 심사규정이 하달되었다. 새로 수립된 가톨릭에 입각한 왕당파 체제에 윤리적이고도 정치적으로 저촉될 수 있는 어떠한 작품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었다! 다시 검열의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심사위원회는 오로지 이념적인 판단으로 심사 규정마저 결정해 버렸다.


이 얼어 죽을 메쏘니에 바보 놈 같으니라고. 국가수비대에 복무할 때 상관이었던 작자가 이 모든 걸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대체 그 인간은 마네가 ‘함선’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메쏘니에는 더군다나 코뮤나르드들이 제작한 모든 작품들을 아주 엄격하고도 가혹할 정도로 검열을 가했다. 가련한 쿠르베! 당연히 그를 추종하던 다른 많은 작가들도 자동적으로 미술전람회 출품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만일 전쟁을 다룬 작품들을 금기시해야만 했다면, 심사위원들은 어리석게도 맹목적으로 해전 상황에서 한 척의 함선만을 바라본 꼴이 된다. 결국 무식한 메쏘니에가 마네가 예술을 통해 이룩한 아메리카의 발견을 도외시하고 나선 것이다.


1872년 5월 11일 마네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몰래 들어가듯, 미술전람회가 열리고 있는 샹젤리제 대로변에 위치한 산업박람회장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자신의 작품은 오직 한 작품만 걸려있었다. 그것도 8년 전에 그린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랑-휘엘이 그에게 다가와 새로운 확신을 심어주었다.


난생처음 겪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지는 않았다. 작품을 본 뒤랑티는 마네의 작품에 열광했다. 두 사람 간의 말다툼은 벌써 오래전에 잊었다는 표정이었다. 뒤랑티는 자못 진지하게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바르베 도레빌리 역시 마네에게 멋지게 갑옷을 입히고 투구까지 씌워주었다.


“나는 바다에서 태어났다. 파도 거품 속에서 자랐다. 내 조상 중엔 해적이 된 자들도 있고 생선 장수들도 있다. (···) 마네 씨가 그린 바다는 나를 파도에 휩쓸리게 만든다. 혼잣말을 한다. 저 바다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라고.”


역사적 리얼리티는 그들이 파놓은 함정을 무사히 벗어나게 해 줬다. 그처럼 아무도 코뮌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볼프 역시 <피가로> 신문 사교계란에다가 그 어떤 소문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네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을 조롱하듯이 미소 짓고 있는 우아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뒤랑-휘엘이 엄청난 돈을 주고 마네의 그림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네는 일약 거리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미술 시장에서 작품이 거래되는 순간 회화는 진부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작품들 속에 감춰진 석류알들을 하나둘씩 뽑아먹고 있을 뿐이다. 이젠 더는 현대성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에 얼마간이라도 앙갚음을 하려는 듯 이번 미술전람회에서는 상당한 불평불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격식을 따지고 점잔을 떠는 인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는 신화적 장면들이 과잉 현상을 초래한 데 따른 불만이었다. “비록 우리가 코뮌에서 겨우 벗어났다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프러시아 군대의 포로일 뿐”이라고 그들은 노발대발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첨꾼에 지나지 않는 짐짓 교양 있는 척하는 온갖 잡동사니 인간들만 들끓고 있는 까닭에 마네의 존재는 한층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추락. 아무도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분위기만큼은 확연했다.


너무 우애를 지키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우정에 연연했던 탓으로 마네는 전시장에 그가 좋아하는 친구들의 작품이 걸리지 않은 것에 안타까워했다. 피사로, 시슬레, 기요맹,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등은 출품자 명단에서 아예 삭제되었다. 그들의 작품이 한결같이 너무도 분명한 주제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현대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이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마네가 새로 사귄 시인들은 카페 한쪽 으슥한 「구석진 테이블」에서 술잔을 들고 있다. 저 먼 곳으로 떠난 팡탱 역시 그곳에 앉아있다. 에바는 무심함 속에 얼굴을 내밀고, 퓌비는 마네의 희망과 함께 하고 있다. 베르트는 검열당한 작품 속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 모두가 마네에게는 파스텔 색조와도 같은 아련한 존재들이기만 하다. 마네는 그녀를 너무 늦게 자신과 같은 화가로 인정한 것에 대해,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화가로 여긴 걸 후회했다. 그게 과연 지금에 와서 마네와 베르트를 판단하는 기준에 입각해 볼 때 마네가 선택한 최선의 결정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만 남는다.


올해 미술전람회에서는 그처럼 자신을 비방하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전시는 마침내 종료되었다. 그는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곤 네덜란드로 출발했다. 아내와 함께. 말 그대로 아내에게 그동안 성깔을 부리면서 못되게 군 것을 빌기 위함이었다. 그 밖의 것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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