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15화
13장 1
(1873-1874)
겨울이 끝났다네.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고
맑은 창공과 지상엔 햇빛만이 넘실거리네.
깊고 쓸쓸한 마음조차 사라지고
여기저기 벅찬 기쁨만 넘쳐흐른다네.
- 폴 베를렌느
그만의 거리 4번지에 아틀리에를 장만한 뒤로부터 마네는 화가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보불전쟁이 터진 이후로 모든 게 꺼림칙하기만 했다. 베르트 모리소를 잊어야만 한다고?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네란 한 영혼의 뇌리 속에는 늘 베르트가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마네가 몽상에 빠질 때마다 베르트는 어김없이 떠올라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녀에게 그림 속 모델이 되어 달라 간청한 끝에 새로 장만한 아틀리에에서 그녀가 포즈를 취하면서부터 마네의 삶도 다시 활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아틀리에를 화려하게 꾸미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랏빛 승마용 장화들을 갖다 놓았는가 하면, 막 유행하기 시작한 꽃가게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꽃들을 사다가 꽂아놓기도 했다. 새로운 그림을 준비할 때마다 그녀가 선호하는 자리를 떠올리면서 그녀의 맘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 있는 포즈를 취할 자리를 매번 바꿔가며 새롭게 단장했다.
되도록이면 베르트 모친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그녀가 포즈를 취할 곳을 마련하고자 애썼다. 베르트의 모친은 늘 딸 곁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에두아르는 둘만을 위한 무언의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는 걸 모친이 전혀 눈치챌 수 없도록 포즈의 사각까지 고안해 냈다.
두 사람은 목청껏 이야기하지 않고도 익살맞은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그 방면에 도통해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모든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입 밖으로 발설할 필요조차 없었다. 매번 서로 마주 대한 채 지내느라 서로를 향한 눈길로 얼마든지 애정을 표할 수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대체 무엇을 감추려 한 것일까? 거기에는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 격렬하고 불타는 그 무언가가 두 사람에게는 있었다. 모든 구속과 압제를 훨훨 불태워버릴 듯한 정념의 불길은 그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각자 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정념을 조절하고 제어하고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터라 그 강렬하기만 한 힘을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힘을 믿은 베르트는 눈에 보이면서 동시에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방법을 통해 마네에 대한 애정을 불태워갔다. 지혜로운 방법을 통하여 어느 것 하나 숨기는 법 없이 강렬한 정념의 불길을 그들의 예술로까지 승화시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네가 베르트에게 신겨준 분홍색 구두 덕분에 두 남녀가 혹시 프라고나의 후예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리게 만든다. 우아함이란 바이러스가 그처럼 온 집안에 퍼져가고 있었다!
마네는 베르트의 누드화를 그림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떠올린 적이 없었다. 더하여 자신의 모델들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옷을 입히고 분장시키려는 의도 또한 전혀 없었다. 그녀 역시 화가가 의도한 포즈를 취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마네는 그녀가 정물처럼 단지 하나의 오브제로 비칠 때는 가차 없이 붓질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가 여성적인 매력을 무기 삼아 그를 유혹할 때는 거침없이 붓질을 해 나갔다.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보라색 제비꽃과 함께 할 때 마네의 붓질은 거침이 없었다. 두 사람 간의 은밀한 합의가 이뤄진 셈이다. 완전무결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모습이기조차 했다. 베르트는 심지어 빅토린느가 애용하던 그녀만의 독특한 액세서리에 해당하는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올랭피아」에서 빅토린느가 목에 두른 리본 목도리였다!
마네의 붓질을 통하여 베르트는 활짝 피어났다.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눈부신 빛으로 떠오른 적이 없었다. 보들레르가 그렇게 갈망하면서 꿈꾸던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비로소 작품에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보들레르를 졸졸 따라다니던 젊디 젊은 시인인 폴 베를렌느는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되기에 이르렀다. 마네 옆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만 했던 베를렌느였던지라 파리 공습이 있는 동안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 것에 마네는 적잖이 불안해했다. 부랑아나 떠돌이에 불과했던 어린 나이의 잡놈과 온갖 상궤를 벗어난 짓을 한 탓에 가는 데마다 좌중의 웃음거리가 되는가 싶더니 아예 자취마저 감춰버리고 만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푸른 눈을 지닌 그 어린 악마(아르튀르 랭보) 때문에 베를렌느가 완전히 뿌리 뽑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시인들 동아리와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팡탱은 그러나 베를렌느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베를렌느가 결코 죽는 법 없이 여전히 런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