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21화
[대문 사진] 전시회 당시 샤리바리(Le Charivari)에 게재된 샹(Cham)의 캐리커처
13장 7
(1873-1874)
드가는 무일푼인 처지에 메달을 거머쥐었건만 자신의 성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른 화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기교만 내세우는 관학풍에 젖어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가하는 모욕을 꾹 참고만 있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공식적인 관전에 의한 미술전람회가 개최되는 동안 그들만이 모여 꾸린 미니 낙선자들의 전람회에 매달리면서부터 빈둥빈둥 놀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전시회이긴 했으나, 이를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돈까지 빌렸다. 공식적으로 미술전람회가 개막식 테이프를 끊기 보름 전에 그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실주의 화가들의 미술전람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성공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긴 했지만, 그들 모두가 그들만의 전시회에 의욕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들이 힘을 합친 덕분에 이제까지 상상할 수조차 없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만의 전시회가 성대하게 개최되기에 이른 것이다.
마네를 에워싼 화가 집단이 그토록 마네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전시회 개최를 그만두게끔 온갖 회유와 방해를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그들이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설득한 게 주효했다.
모두가 마네에 동조하고 나섰지만,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오직 세잔만이 전시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은 전시 준비를 하는 동안 젊은 시절 보들레르 주변에 모여들던 이들을 기억 속에 떠올리면서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더군다나 과거에 나다르라 불리던 투흐나숑이 카푸친느 대로에 위치한 자신의 아틀리에를 전시회 장소로 기꺼이 제공하기로 나서기까지 했다.
누구보다도 이들에게 우정 어린 도움을 준 나다르는 이미 자신의 그 유명한 열기구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그의 아틀리에에서 개최되는 전시회는 한층 빛을 발할 수가 있었다. 오펜바흐와 보들레르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이미 나다르에게 각별한 호의를 입은 터라 나다르가 우정에 입각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선심 쓰듯 장소를 제공한 건 그들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더군다나 나다르는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작품을 걸 수 있도록 공간을 변형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효율적으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 기간도 맘껏 조절하게끔 배려했다.
전시회에는 30명의 작가만이 참여했지만, 2백여 점의 작품이 내걸렸다! 전시 규정은 르누아르가 일임하여 정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평등하게 작가들을 대우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르누아르는 예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화가였다. 반면 피사로는 코뮤니스트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공평하게 전시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규정은 중간 크기나 작은 크기의 작품만을 내건다는 규정이었다. 두 번째로 간격을 충분히 띈 채, 두 줄에 걸쳐 작품을 전시한다는 규정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면서 작품과 충분히 호흡할 수 있도록 작품을 배열하고 전시”하고자 한 해결책이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마네는 작품들 사이의 간격을 충분히 띄운 채 전시해야 만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즉석에서 그와 같은 규정을 채택했다.
뜻밖의 전시 방법이긴 했으나 사람들은 미술전람회 방식에 이미 익숙해 있던 터라 관전에서와 같이 높낮이 할 것 없이 다닥다닥 손에 닿을 듯이 걸려있는 작품들에 더 친숙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은 모든 관제 기관들과 완전히 결별한다고 선언하고 그들만의 협동조합을 영속시키기 위한 전략에 골몰했다. 기존의 단체들과는 다른 방식과 다른 형태로 존속시키기 위한 좀 더 그럴듯한 전략을 꾸미고자 고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관전에 의한 미술전람회 시스템을 본떠 자신들의 단체를 결성한다는 자체가 여러모로 온당치 않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아니 관전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고 나섰다. 마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관전을 고수하고자 하는 태도를 전혀 철회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마네로서는 이 때문에 공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잠마저 잘 수가 없었다. 여론이 그들을 몰아세울 것만 같아 두려워 몸서리 처지기까지 했다. 그들의 전시회에 그들의 모든 운명이 걸려 있었던 탓이다.
전시장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다 모여들건 뻔한 이치였다. 방문객 가운데에는 그들에게 고무적인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환쟁이들이나 남의 작품을 존중할 줄 모르는 엉터리화가들도 섞여있을 것이 분명했다. 비참할 정도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황에서 허우적댈 건 불 본 듯 뻔한 일이고 연일 많은 이들의 야유와 비판을 감내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스캔들도 일어나면 안 되었다. 「올랭피아」때문에 너무나도 비싼 대가와 홍역을 치른 바 있는 마네인지라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전시장에는 그 어떤 소요나 소란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했다.
공식적인 미술전람회가 개최되기 보름 전 사실주의 화가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에 대한 가장 호의적인 평가가 “전시장을 찾아와서 제일 좋아할 사람은 아이들일 것 같다. 아니면 아마추어들이나!” 정도였다. 온 전시장 안이 술렁거리면서 작품들에게 가래침마저 뱉을 태세였다. 야유와 경멸에 찬 외침들이 그들을 압살할 듯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샤리바리> 신문 기자였던 루이 르화는 모네가 그린 「해 뜨는 인상(Impression soleil levant)」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참 인상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작품에게서 그와 같은 인상만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게재한 기사 제목이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L’exposition des impressionnistes)’였다. 그들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조롱하고자 한 의도를 지닌 말이었다.
그리고 말은 이미 내뱉어졌다. 절대로 다시 주어 담을 수 없는 것이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내뱉은 인상파 화가들(impressionnistes)이란 말이 그들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으며, 그들을 상징하는 표제어로까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공식적인 이름이 붙었다. 마네는 그 대부 격인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마네는 절대 자신이 그에 속한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네는 허공에 다 대고 제발 그런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외쳐댔다. 하지만 마네에 대한 스캔들은 어느 누구도 그걸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정당하면서도 타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 이곳에서 1874년 역사적인 인상파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처음 전시회가 개최될 당시에는 ‘인상파 전시회’라 하지 않고 관전에서 ‘낙선한 자들의 전시회’ 또는 ‘사실주의 화가들 전시회’ 혹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의 전시회’란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2] 1874년 나다르의 아틀리에에서 개최된 최초의 역사적인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클로드 모네가 출품한 이 작품을 두고 <샤리바리(Charivari)> 기자였던 루이 르화(Louis Le Roy)가 ‘인상적이다(Je suis impressionné)’라고 조롱 섞인 평을 한 것이 곧 이들 화가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